다산 유배지의 풍경 쉼터공원에서 만덕리 다산수련원으로
일화 듣고 풍경 즐기며 걷는 휴식길
무궁화나무 군락이르며 나그네 쉼 제공
다산학당 운영 맞춤형·눈높이 교육 실시
강물이 리을리을 흘러가네
술 취한 아버지 걸음처럼
흥얼거리는 육자배기 그 가락처럼
산이 산을/ 들이 들을/ 물이 물을
흐을르을 / 흐을르을
전라도에서 절라도까지/ 리흘리흘 리흘리흘
목숨 줄 감고 푸는 그 가락처럼
<이대흠 / ‘남도’ 전문>
푸른 산빛으로 흐르는 옛길
깃대봉을 오르는 산길로 나선다. 명발당에서 고갯길의 쉼터 공원까지 ‘리흘리흘’ 휘어진 길을 40분쯤 걸었다. 동네 장터를 돌아온 차일까. 낡은 타이탄에 ‘농기구 수리합니다’를 써 붙인 차가 지난다. 녹음기에서 트로트가 아닌 아이돌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렇게 옛길의 스트리트퍼니처도 변화하고 있다. 저 만물상 같은 타이탄에 어느 보름날에는 달빛이 가득 실려 왔으리라. 장소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는 특별한 아이콘 같은 것을 옛길에서 만나면 왠지 행복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쯤에 아스팔트로 길을 내는 건 뜻밖의 조난이나 사고로 부상자가 생겼을 때 응급 환자의 수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영국 남서부의 휴먼 신도시 ‘파운드베리(poundbury)'는 찰스왕세자가 깊은 관심을 갖는 도시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파운드베리의 주요 교통수단은 ’걷기’와 ‘자전거’라고 한다. 파운드베리의 길은 주요 간선도로를 빼고는 모두 구불구불한 골목인데다 집들 사아 사이 어긋나게 배치돼 마치 집을 지은 뒤 남은 공간에 길을 낸 듯한 모습이라는 글을 읽었다. 느리지만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휴먼신도시는 어디든 새로이 길을 내려는 이들은 생각을 멈춰봐야 할 것 같다. 쉼터 공원까지는 자전거로 이동하며 침묵의 풍경을 즐기면 더없이 좋은 길이다.
바람의 무늬로 듣는 다산학
마을로 들어서자 담 모퉁이 짜투리 땅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환하다. 그 작은 공간을 점유해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는 생명의 여린 숨결- 길경이라 불리며 한약재로 쓰이는 도라지는 시골에서 흔하게 대량재배해 우리에겐 친근한 식물이다. 쉼터를 향하는 길에는 무궁화나무도 길게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쉼터 공원의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히는 동안 바람의 무늬가 다가온다. 준비해 온 음료를 마시며 잠시 쉬는 사이 문화유산 해설가 윤동옥 선생은 다산 선생과 제자들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풀어 주신다.
읍내 생활 8년, 초당 생활 11년- 그렇게 긴 강진 유배 생활 18년 동안 다산은 거처를 네 번 옮긴다. 동문 밖 사의재와 보은산방, 다시 사의재, 제자 이학래의 집 그리고 1818년 해배 시까지 다산초당에 정착해 살았다. 또 다산은 제자들을 강학할 때 개성에 따라 문학(文學)과 이학(理學)으로 나눠 전공을 살려줬다고 한다. 제자들끼리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시작법을 익히게 하고 다산은 이들의 시에 평을 달아 주며 사기를 진작시켜 줬다. 훗날 조선 학술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학술 집단으로 다산 학단은 이곳 강진의 산하에서 맞춤형 교육, 눈높이 교육을 통해 형성됐다.
.....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러운 땅에서 맑은 샘물을 구하는 것과 같고 악취 나는 나무에서 좋은 향기를 찾으려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시의 본질을 터득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과 인간, 본성과 천명의 이치가 무엇인지 알고 인심(人心) 과 도심(道心)이 어떻게 나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의 찌꺼기를 걷어 내고 참된 마음이 발현 되도록 해야 한다(......).
<다산의 참된 시(詩)란? 중에서 >
KBS 방송의 위성 안테나가 있는 깃대봉 정상을 향한다. 산길엔 고사리가 가득하다. 이름 모르는 버섯들도 나무 등걸에 숨은 꽃처럼 피어있다. 걷는 이들을 배려한 산길- 조금 가파른 숲길을 20분 쯤 오르고 나니 소나무 숲 사이로 강진만의 섬들이 보인다. 산과 바다와 들판, 근경의 섬들. 가우도 출렁다리가 한쪽만 보인다. 이곳에서 청자 박물관까지는 도보로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항촌 마을에서 출발해도 하루 품으로 걷기에 알맞은 거리다. 곳곳에 산딸기가 붉은 얼굴로 웃는다. 몇 알을 따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즐긴다. 산길에서 내려다보면 강진만이 감추고 있는 속살까지 환히 보인다. 깊은 골짜기에는 시간의 두께가 쌓이고 벌레들은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소리로 울었다.
부쳐사는 삶
‘마른 것들 모두 살아났으면 좋겠네.’- 한평생 백성 걱정하던 다산의 말씀이 먼 곳에서 번져온다. 길을 따라온 바다 풍경이 장관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 가파르지 않은 산인데 더위 탓인지 일행은 모두 숨을 헐떡인다. 정상에 다다르자 비탈진 언덕에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긴 의자가 놓여 있다. 탁 트인 사방의 풍경을 비행기처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의자 몇 개 준비해 놓은 것만으로 배려가 느껴진다. ‘-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부싯돌의 불이나 물거품이 잠깐 사이에 생겨났다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만물을 그렇게 보고 일찍이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높은 벼슬을 하잖게
여기고 금과 은을 개어진 기왓장처럼 버릴 수 있어.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살되 대상에 함몰되거나 탐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뒤에야 도처에 덫을 설치해 놓아도 빠지지 않고
하늘 가득 그물을 쳐놓아도 걸려들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가든
세상 속으로 들어오든 아무도 그 경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부쳐 사는 삶이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산의 산문 ‘부쳐 사는 삶’ 중에서>
땀에 흠뻑 젖은 표정으로 일행은 웃으며 ‘김치’를 연발하고 정상에서 휴대폰 인증샷을 찍었다. 깃대봉 정상을 내려와 모치재로 향한다.
‘풀이 걸음을 방해 하거든 깎고 나무가 관(冠)을 방해 하거든 잘라내라. 그밖의 일은 자연에 맡겨 두라. 하늘과 땅 사이에 서로 함께 사는 것이야말로 만물로 하여금 제각기 그 삶을 완수하도록 하는 것이니라’ - 선인들의 지혜가 참으로 옳다는 생각을 하며 나뭇가지의 눈높이에 다산 유배길을 표시하는 노란 리본을 묶어 둔다. 다시 이 길을 걸어올 사람들을 위해.
55번 국도로 내려서면 모치재 입구다. 해남방면에서 다산 초당을 찾아오는 이들도 이 모치재를 통과해야 한다. 모치재를 넘어서면 좌측에 마점 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뒤편에는 만덕산(408.6m)이 우측에는 석문산(272m)이, 앞으로는 구강포가 보이는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1912년의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의하면 보암면의 27개 마을 중 “馬店”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조선시대 말기에 “馬帖”에서 “馬店”으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마점”은 전라 병영성에서 근처의 완도, 진도 등지로 오갈 때 말을 매고 쉬어 가던 곳이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마점을 지나 출발지인 다산수련원으로 돌아왔다.
- "사람이 문장을 지니는 것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말씀의 숲에는 다산의 깊은 사색과 가르침이 보인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것이지만 사실은 어디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 떨어져 있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 워즈워드의 자연에 대한 믿음처럼 우리는 다산 유배길에서 작은 ‘시간의 점’ 하나를 얻어 되돌아 왔다.
무등일보 / 김정희 광주 서구 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