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노래는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는다는 옛 기생의 명예란, 글쎄, 미화된 회고조였기 쉽다. 본질적으로 관기(官妓)였던 조선시대의 기생은 신분으로 따지자면 천민이었고, 관(官)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나 응해야 했으며, 늙거나 병들어서 몸을 빼려 해도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기적(妓籍)에 올리는 이른바 대비정속(代婢定屬)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양반님네들과 사랑노름을 즐길 수 있었다 해도, 속내가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기생이라는 이름을 장식하는 수사학은 자못 현란하였다. 기생이라면 홍장이나 소춘풍처럼 재모(才貌)로 소문날 수도 있었고, 황진이나 매창처럼 시인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으며, 진주의 논개나 평양의 계월향처럼 의기(義妓)로서 이름을 드높일 수도 있었다. 예외적인 명성을 쌓았을 때의 일이었지만, 기생은 임기응변의 재치를 갖춘 미인이요 시・서・화의 달인이었으며 의(義)와 절(節)을 자랑하는 기인이기도 했다.
근대 이후 이런 영화는 끝났다. 홍장・소춘풍이나 황진이・매창은, 더더구나 논개나 계월향 같은 명기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이능화는 『조선해어화사』에서 역대 기생들의 시를 들면서 20세기 초엽까지 화제로 삼으려 했지만 『신해음사(辛亥吟社)』에 실린 한시 한두 편을 발견해 냈을 뿐이다. 기생 신분도 아닌 윤효원의 일화를 궁색하게 덧붙여야 했을 정도로, 근대 이후 기생이 시・서・화에서 남긴 자취는 보잘것없었다. 대신 20세기 초 기생이 차지한 자리는 대중적 화제의 중심이었다. 기생은 무대의 히로인이었고, 유행을 선도한 총아였다. 강향란은 여학생들의 단발이 논란거리가 되기 10년 전 1922년에 벌써 단발을 감행함으로써 시선을 모았고, 강명화와 이화련・문기화 등은 1920년대 초반 정사(情死)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다. 기생은 남보다 앞서 새로운 유행에 뛰어듦으로써 명성을 날릴 수 있었다. 새로운 유행의 선도층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무정』의 히사시가미(庇髮)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무정』. 『매일신보』가 소설을 연재한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해조는 1910년부터 1913년 사이 무려 15편의 소설을 연재하였고, 『쌍옥루』(1912)・『장한몽』(1913)・『눈물』(1913~14)・『정부원』(1914~15) 등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린 소설 또한 같은 지면에 연재되었다. 『무정』 연재가 시작되기 직전 실린 소설 또한 신소설인 『속・장한몽』이었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은 『매일신보』 연재 신소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또한 『무정』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이전의 연재소설이 연극과 결부되어, 미리 대강의 내용을 숙지하고 연극을 관람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대본으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면, 『무정』은 글쓰기 자체의 힘으로 대중적 인기를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무정』은 끝끝내 연극화되지 않았다.
여학생과 기생이라는 이채로운 존재를 두 축으로 했다는 점에서도 『무정』의 발상은 새롭다. 『혈의누』에서 주인공 옥련을 여학생으로 등장시킨 이래 여학생 주인공을 내세운 소설은 드물지 않았다. 『추월색』・『금강문』・『안의성』・『해안』 등을 통해 최찬식이 특히 여학생을 자주 등장시켰고, 그밖에 『홍도화』나 『모란화』・『쌍옥루』・『장한몽』 등에도 여학생의 형상이 등장한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생을 축으로 한 소설 또한 드물지 않아서, 『모란병』・『화의혈』・『명월정』 등이 절조를 지킨 기생을 화젯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이 두 존재를 함께, 그것도 경쟁자로 등장시킨 소설은 없었다. 이광수는 한결 과감했던 셈이다. 물론, 『무정』에서 형식을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선형과 영채가 대조를 이루는 것은 비단 여학생과 기생이라는 신분에서만은 아니다. 선형은 미국에 가서 깃털 달린 서양 모자에 서양옷을 입고 영어로 자유로이 회화할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장로의 딸이요, 영채는 『소학』 열녀전의 세계를 신봉하는 진사의 딸이다. 선형의 아버지 김장로가 새 시대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서울 세도가의 자손이라면, 영채의 아버지 박진사는 너무 일찍 깨었기에 비극적 운명을 맞고 만 서북 양반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이념적 기반 자체가 다른 선형과 영채는, 그러나 무엇보다 여학생과 기생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형식이 안동 김장로의 집을 찾아가는 『무정』의 첫 장면. 형식은 처녀와의 1:1 대면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면서 선형과의 접촉을 미리 상상하고 얼굴을 붉힌다.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 선형과 혼약이 이루어진 후일까지도 형식의 마음을 쇄락하게 만드는 것은 고운 적삼 아래 비치는 살결, 은근히 풍기는 향내, 그리고 풍성한 까만 머리다. “처녀의 까만 머리와 쪽진 서양 머리에 꽂은 널따란 옥색 리본”, 무엇보다 형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전형적인 여학생 복색이다. 서양 부인의 머리 모양새를 흉내내 1900년경 일본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오래잖아 한국으로 건너온 히사시가미. 앞머리는 풍성하게 쑥 내민 모양으로 빗고 뒷머리는 틀어올린 이 머리형은 여학생을 상징하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앞머리를 쑥 내밀게 빗는 대신 가르마를 비스듬히 타고 뒷머리를 올린 트레머리 또한 서양 부인의 치장과 비슷한 모양새로 각광을 받았다. 치렁치렁 땋아내린 댕기머리를 고집하는 여학생 또한 늦게까지 남아 있었지만, 1930년대에 단발이 유행하기까지 많은 여학생이 선망한 머리모양은 서양식 트레머리였다. 틀어올린 뒷머리에는 흔히 리본 장식을 붙였다. 형식이 개인 교습이라는 명목으로나마 선형과 개인적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선형이 이처럼 새로운 스타일로 단장한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교습을 마치고 돌아온 형식에게 하숙집 주인 노파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준다. 형식이 집에 없는 새 젊은 여자가 찾아왔더라는 것,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더라는 것이다. 헤어진 지 7년 만에 형식의 거처를 알아낸 영채가 하필 선형과 첫 교습을 약속한 날, 같은 시각에 찾아왔던 것. 영채 역시 선형처럼 히사시가미로 머리를 꾸미고 있는데, 이렇게 단장한 것은 비단 형식 앞에서만은 아니었다. 죽기를 결심하고 평양 가는 기차를 탔을 때도 영채는 여학생처럼 차려 입어 찻간에서 만난 병욱에게서 “그런데 방학이 되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영채는 머뭇거리며 학생이 아니라고 답하지만, 복장으로 혼란을 일으키기는 병욱 자신도 마찬가지.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한 병욱은 일본옷을 입고 있어 영채에게 “일본 부인이 어떻게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나” 하는 의아심을 불러 일으켰던 참이다. 영채와 병욱은 모두 복장이 잘못된 기호로 작용하는 가운데 만난다. 일종의 오인이 작용한 셈인데, 이같은 오인은 의도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청량사 폭행 장면에서 영채 머리에 드리워 있던 “핏빛 같은 왜중 댕기”를 보면 연회석에서 영채가 택했던 머리형은 쪽지고 비녀 꽂는 옛 스타일이었던 성싶고, 그렇다면 영채는 거리에 나설 때 이 익숙한 스타일을 부러 손보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소란, 기생의 학생장(學生裝)
『무정』이 발표된 1917년까지만 해도 여학생은 그리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19세기 말 처음 여학교가 생겨났을 무렵에는 누구도 학생 모집에 응하려 하지 않았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도 거부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거리로 나서고 공적인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 낯선 경험이었으므로, 의지할 데 없는 고아라든가 행동거지가 자유로웠던 기생과 첩실 외에는 갓 열린 학교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일부 여학교에서 서양식 원피스에 본네트를 교복으로 채택하는 파격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여학생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희귀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차 대중적 확산을 준비하면서 여학생은 기왕의 복장을 조금씩 변형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댕기머리가 줄어들고 트레머리가 유행했으며, 정강이께에 올라오는 짧은 통치마가 공식화되었고, 발에는 서양 버선 즉 양말(洋襪)에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소란이 있었지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던 장옷도 벗어던졌다. 대신 양산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손에는 연한 색 손가방을 들었다. 1930년대에 다시 서양식 교복이 제정되기까지 여학생의 전형적인 차림은 이러하였다.
앞을 부풀리거나 어슷하게 가르마 탄 서양식 트레머리, 짧은 통치마, 양말에 구두, 그리고 양산에 핸드백. 이 요소 중 몇 가지를 갖추었다면 여학생으로 지목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안의성』이나 『무정』에서부터 주목을 끌었던 새로운 머리모양은 여학생이라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교회나 음악회처럼 신식 남녀가 모이는 장소에 가 보면 “띄엄띄엄 쪽진 이와 땋은 이가 없지 않았으되, 대개는 푸수수한 트레머리의 꽃밭”(현진건, ⌈까막잡기⌋)이었다. 귀밑머리를 서너 올 늘어뜨리고 곱게 틀어올린 머리가 모여 있는 모양은 “탐스럽게 핀 검은 모란화송이의 동산”이라 일컬을 만했다. 풍성한 머리채 아래 보얀 목덜미가 엿보이는 모습은 검은 모란꽃에 흰 줄기가 달려 있는 양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여학생의 복장이 대중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할 무렵, 거리에는 마찬가지 복색으로 차린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고운 비단, 화사한 빛 삼회장 저고리, 남의 머리채를 사다 엮어 올린 어여머리 등 사치스런 차림새로 양반 부녀자들까지 물들인다는 비난을 받았던 기생이 바야흐로 탈바꿈을 시작했던 것이다. 목덜미까지 분을 희게 바르고 울긋불긋한 비단옷에 저고리 뒷고대를 젖혀 입어 대번에 눈에 띄었던 기생의 모습은 점차 여학생의 외양과 비슷해져 갔다. 기생을 상징했던 붉은 양산도 사라졌고, 삼패까지 양산을 들게 허용했다고 항의차 일패들이 양산에 붙였던 ‘기(妓)’자는 더구나 자취를 감추었다. 각 권번에서 권번 머릿글자를 금속으로 새겨 뒤꽂이 장식으로 꽂게 했던 관습도 없어졌다. 트레머리에 구두를 신고 수수한 빛깔 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나선다면 기생 신분을 쉽게 식별해 낼 수 없었다.
이 탓인지 기생의 여학생 복장은 점점 거세게 유행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얼핏 보기에는 검소한 것 같으나 실은 신성무구한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행위요, 결국 “탕녀와 여학생을 구별하는 경계선이 무너”지는 폐단을 낳았다고 했다. 추업(醜業)하는 여자들이 학생처럼 꾸미고 다닌 탓에 여학생을 보고도 유녀(遊女)로 그릇 알아 의례 힐난을 해 대는 지경이라고도 했다. 따로 제복을 제정하고 교표를 달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1923년 1월에는 서울 네 권번 관계자들이 모여 “1. 근래 기생 중에는 여학생이나 양가 여자와 같이 차리고 다니는 자가 있은즉 이후로는 이와 같은 일을 금지할 일 2. 기생이 손에게 대한 태도를 더욱 공순히 하야 기생의 본분을 지키게 할 일”의 두 개 항을 결의했으나 이후에도 기생의 학생 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생들은 “방석감 옷”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감탄의 시선 또한 모았던 화려한 비단옷을 벗어던지고 기꺼이 흰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걸쳤다. 단정하게 빗어 기름 발라 붙이고 비녀와 뒤꽂이로 장식한 쪽머리 대신 서양식 트레머리를 꾸미고 거리로 나섰다.
관기(官妓) 축출, 그 이후
기생이 여학생을 모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학생이 기생을 모방한 일도 없지 않았다. 김동인의 ⌈눈을 겨우 뜰 때⌋에 등장하는 당돌한 기생 금패는 “이전에는 삼십 이상의 늙은 여학생들이 많더니 차차 어린 여학생들이 보이게” 된 3・1 운동 이후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동시에 여학생들의 풍조가 사치해지는 것을 보았고 이를 “여학생들이 기생을 본받는다”고 부름으로써 일종 승자의 쾌락을 만끽하였다. 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머리장식을 하고, 게다가 근대 이전에는 기생들만 들었던 양산을 손에 듦으로써 여학생들은 자칫 기생을 닮아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기생이 여학생을 흉내냈다면 여학생 또한 기생을 본떴다.
기생과 여학생이 모두 새로운 존재 양식을 계발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같은 혼란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새로 등장한 존재였으니 만큼 말투와 의복, 행동거지를 온통 창안해 내야 했던 여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생들 또한 심각한 존재 변이를 겪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들이 대거 축출된 후부터 관(官)에 소속된 연회 보조자로서의 기생의 위치는 대폭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이라면 내의원에 소속되어 의녀로 일하거나 상의사(尙衣司)에 소속되어 침선비(針線婢)로 일하다가, 지방이라면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있다가 궁중 연회가 있을 때 동원되는 것이 통례였던 시절이 가고, 자유로이 영업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지방에서 동원된 선상기(選上妓)에 한해 별감・포교・장교와 대갓집 겸인으로 제한된 기둥서방을 두고 유흥 영업을 하게 허용했던 조선 후기의 관습이 모든 기생의 상시적인 조건이 된 것이라 해도 좋겠다. 외면상 자유로워진 기생들은 이번에는 각 조합으로 묶였고, 1914년부터는 조합이 권번으로 개편되어 서울에 한성・대정・한남・경화의 네 권번이, 지방 도시에도 대개 하나씩의 권번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기생은 작부(酌婦)나 창부(娼婦)와 달랐다. 작부가 사숙(私塾)에서 1~2년간 장고마디라든가 잡가 토막을 익혀 색주가로 팔려나가고 창부가 별 훈련 없이 신정(新町)으로 진출했던 것과는 달리, 기생이 되려면 권번에서 4~5년간 기악을 익혀야 했다. 신정, 즉 신마찌에 팔려가게 된 여자가 “제 몸을 서 푼짜리 개고기 팔 듯”하게 되었다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 작부 명색을 부러워했을 지경이니(한용운, 『박명』), 기생과의 거리는 일층 까마득했을 터이다. 조선총독부 또한 위생검사 등의 관리에 있어서 ‘기생’과 ‘창기’를 구분하였다. 기생들은 소리나 가야금을 익혀 예기(藝妓)로 행세할 수 있었고, 서양 잠옷 비슷하게 만든 무도복을 입고 무도회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름나기에 따라서는 돈을 모아들일 수도 있었다. 기생을 부르는 값은 1910년대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5원, 시간별 가격이 책정된 후로는 첫 시간은 1원 50전, 두 시간째부터는 시간당 70전이었고 1920년대 중반에는 이것이 각각 1원 95전과 1원 30전으로 올랐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이 돈 중 일부는 기생세로 나갔고 일부는 권번으로 들어갔으며 나머지 금액이 시간에 따라 각 기생에게 할당되었다. 대개는 기생어미에게 권번 수업료와 생활비 명목으로 빚을 지고 있었으니 돈을 오롯이 제가 차지할 수야 없었겠지만, 작부나 창부에 비하자면 기생의 처지는 한결 나은 것이었다.
무대 위에 선 기생
여학생 복장을 흉내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이 모두 엄격한 의미에서의 기생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작부도 있고 혹은 창부까지도 섞여 있었다. 기생만이었다면 도리어 이같은 혼란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 사정이 달라지지만, 1910년대라면 기생은 여학생과도 다르고 이전의 기생과도 다른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찾을 수 있었다. 대중 공연의 히로인으로서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생들이 처음 대중을 상대로 한 공연에 나선 것은 1902년 고종 즉위 40년 칭경례(稱慶禮)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 때는 남아 있던 관기뿐 아니라 무명색이나 삼패까지 ‘예기’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는데, 정작 칭경례는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지만 공연을 위해 모였던 기생들은 협률사가 사설극장으로 탈바꿈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생들은 판소리와 가야금 연주를 선보였을 뿐 아니라 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주역 역할을 맡았고, 심지어 ⌈장한몽⌋ 같은 신파극에 도전하기까지 했다. 1910년대에 광무대와 연흥사의 무대를 채웠던 이들은 기생이었고, 1915년 설립된 구파 배우조합의 “남녀 배우” 중 여배우 또한 기생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예단(藝檀) 1백인’이라는 기사는 1910년대의 극장계에서 기생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매일신보』에서는 이 연재물을 싣기 전 “조선 전도의 남녀를 물론하고” 가무와 음곡 등 예술이 뛰어난 자 1백인을 소개하겠다고 공고했지만, 실제로 소개된 1백인 중 남자는 혁신단의 임성구, 광대 심정순, 정악정습소 교사 이병문 등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온통 기생 사진과 소개글로 채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춘외춘이라고 이름지었을 때에는 사시로 봄기운을 띄울 것은 묻지 않아도 알 것이요, 겸하여 그 성품의 온화함은 미루어 알지로다. 동글납작한 얼굴에 쌍꺼풀진 듯한 눈은 애교가 가득하다 할는지. 앉으나 서나 일점 수운(愁雲)이 얼굴에 가리워 있는 것은 그 심중에 말하지 못할 근심이 있음을 발표함이 아닌가. 그도 고이치 아니하도다. 본래는 황해도 황주군 태생으로, 가계가 곤궁하여 그 노모를 데리고 경성으로 올라오니 그때는 십사세라. 사고무친한 타향에서 더욱이 생활할 방도가 없으므로, 박한영이라고 하는 사람을 의뢰하여 광교 기생조합에 입참하여 가무를 배우니, 천질로 타고난 재주가 수년 동안에 거문고 양금 남무 검무 노래 가사 시조, 여러 가지를 통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래이니(…)”. “금이냐 옥이냐 동자삼이냐. 광무대 안에는 옥엽이로다. 고향은 어디매뇨. 경상도 창녕 땅. 금년이 십사세라. 잘하는 것은 무엇인고. 승무, 춘향가, 방자놀음, 기타 잡가 등이라. 구세부터 대구 기생조합에서 공부하고, 십이세에 경성으로 올라오고, 자시로 광무대에 연일 출연하여 다수한 관객의 환영을 받는 터이라(…)”(『매일신보』 1914. 2. 19 및 2. 24).
신파극이 밀려오기 시작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전통 가창・무용과 창극을 주 레퍼토리로 했던 1910년대의 극장가에서 기생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서울의 상설극장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관객 대중은 젊고 아리따운데다 가무에 능한 기생의 존재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매일신보』뿐 아니라 『신문계』『반도시론』 등의 잡지에서도 기생 소개에 열을 올린 것을 보면, 일단 공개된 기생이라는 존재는 마치 대중 스타와도 같은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생의 기예는 소수를 위한 연회에서 쓰이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 앞의 공연에서 빛을 내기 시작하여 기생을 ‘예인’・‘배우’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무정』의 영채가 병욱의 바이올린을 접한 후 “기생도 일종 예술가다”라는 자각을 얻은 것은 그 혼자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옛날 명기들은 다 예술가로다. 그네는 음악을 하고 무도를 하고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자기도 예술가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내 천직인가 하였다” 하면서 솔깃해했던 영채의 마음은 ‘예(藝)’라는 글자가 달리 해석되기 시작하던 시기, 달라진 기생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여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연극의 주류가 근대극으로 바뀌고 전문 배우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배우’로서의 기생의 지반은 곧 흔들리게 되지만, 1910년대 한때, 기생의 대중 무대의 스타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거리’를 둘러싼 쟁탈전
그렇다고는 해도 충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근대 이전이라면, 아니, 1900년대까지만 해도 기생은 홀로 예외적인 여성이었다. 장옷을 덮어쓰지도 않고 하녀를 앞세우지도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여성은 기생 외에는 없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여자가 장을 보는 독특한 관습을 지킨 곳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럴 듯하게 차리고 도회 거리를 나다닐 수 있는 여성은 기생뿐이었다. 1910년대까지도 신소설이 길에 나서자마자 위기에 처하는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거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산책자로서의 여성이란 아직 상상하기 힘들었다. 남보다 앞서 신교육을 받은 조건을 갖추었다 해도, 혹은 핍박과 음모를 피해 가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처했다 해도, 거리를 방황하는 여성이라면 일단 유녀(遊女)로 취급하는 것이 당연한 감각이었다. 제아무리 남다른 뜻과 기개를 품었다고 해도 길 위로 나서는 순간 여성은 순결성의 위험에 몰려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학생은 이런 상황 속에 던져진 새로운 존재였다.
드물게 간호부나 상점 경영자 같은 ‘직업 부인’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학생보다도 일층 희귀한 존재였다. 1920년대 초반 기생 수가 3천여명이었던 데 비해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수는 총 1천5백여명. 아직 고보 인가를 얻지 못했던 몇몇 여학교와 일본 유학생 수를 합친다 해도 여학생 총수도 기생수에 한참 뒤지는 형편이었다. “학교문이 터질 지경”이었다는 평판을 받았던 교육열이 일기 이전인 3・1 운동 전이라면 볼균형은 더욱 심각했을 터이다. 보통학교로 따져도 강제병합 직후 약 2천명, 3・1 운동 직전 3~4천명에 불과했던 여자 입학생이 1920년에는 약 6천, 1921년에는 9천, 1920년대 말에는 2만명에 육박하게 증가했을 정도로 1919년 이후의 교육열은 두드러진 것이었으니, 그 이전, 1910년대에 여자고보생의 존재가 얼마나 드문 것이었을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정』의 작가 이광수는 유달리 민감했지만, 1910년대에 『무정』의 영채와 선형처럼 기생과 여학생이 경쟁 관계에 놓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기차에서 영채를 처음 만나 학생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병욱이 “그러면 이 여자는 무엇일까(…) 남의 첩이라는 생각도 난다” 한 것을 보면 홀로 집밖에 나선 젊은 여자란 학생 아니면 기생―‘첩’이란 대개 ‘기생’과 겹치는 명사였다―이라는 생각이야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지만, 여학생의 존재는 아직 미약하였다.
여학생이 친숙한 존재가 된 것은 3・1 운동 이후였다고 해야 옳겠다. 숫자도 적었고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던 여학생이라는 존재는 1920년대 전반의 폭발적인 교육열 속에서, 또한 취학연령 표준화라는 정책의 안정 속에서 또 하나의 ‘거리의 여성’이 되었다. 바야흐로 기생과 여학생이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 둘은 도회의 거리거리를 활보하면서 이목을 끄는 젊은 여성들이었고, 또한 똑같이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찾아야 할 필요에 처해 있었다. 기생은 무대에 서고 음반을 취입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끌고 있는 참이었고, 여학생은 거리 곳곳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교회나 청년회・강연회・음악회 같은 새로운 문화를 개척해 가는 중이었다. 이 둘이 서로를 의식하고 모방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쳤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더욱 중요해진, 거리를 둘러싼 쟁탈전이 막 시작된 것이다.
대역의 짧은 영광과 결말
“‘여학생’ 하면 웬일인지 시선과 귀가 이상하여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 채만식인 등단작 ⌈세 길로⌋(1924)에서 여학생을 둘러싼 기차 안 풍경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한마디를 던진다. “그가 썩 미인인 것도 아니요, 또 여학생이 아닌 다른 여자가 그 찻간에 타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지만” 승객들은 여학생의 굽 높은 구두와 짧은 치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면서. 이 정도였다면 누가 거리의 주역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에서 승패는 처음부터 갈려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기생은 화려한 각광을 받았던 1910년대에도 결코 ‘온당한’ 존재는 아니었고, 반면 여학생은 몇 가지 불량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가슴을 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여학생이 실질적인 매음에 나선 일조차 없지 않았지만, 신교육을 받은 학생이라는 사실은 추문에조차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였다. 무엇보다, 여학생이 기생을 모방하기보다는 기생이 여학생을 모방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주도권의 소재를 알려주고 있다. 섬세한 문학 청년이었던 나도향마저 다른 등장인물은 모두 DH, MP, R, L 등의 이니셜로 감추면서 기생만은 서슴없이 ‘설영’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아닌가(⌈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여학생은 보호해야 할 사적 존재였지만, 기생은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개방된 존재였다. 본질적으로 기생은 한때의 희롱거리, 지나면 잊혀지는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학생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는 사실은 문제였다. 여학생은 “눈과 귀”를 끌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어떻게 말을 걸고 손을 잡을 수 있는지,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지, 그 문법은 계발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들어온 바깥의 풍문과 더불어 여학생이라는 존재가 점점 자주 눈에 띄면서 새로운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했지만, 구체적인 소통의 방식은 어눌할 때였다. 여염집 여자와도 다르고 기생과도 다른 이 새롭고 신비한 대상에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는지? 오래잖아 밀어(蜜語)가 계발되고 연애편지라는 형식이 등장하고 만남의 양식이 정립되기 시작했지만,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한 지 처음 몇 년 간 여학생은 안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엘렌 케이의 자극으로 자유 이혼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기 전이라면, 게다가 아직 젊지만 일찍 기혼남이 된 남성들의 입장에서라면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욕망은 잔뜩 달떴는데도 저만치 보이는 대상에 쉽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연애의 첫 번째 주역이 여학생이 아니라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따라서 당연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것은 마치 단발로 화제를 모은 최초의 인물이 기생이었다는 사실과도 흡사한 상황이었다. 기생 강향란은 갖은 간난신고를 겪은 후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의미”로 단발에 남장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신여성 사이에 단발이 유행하고 있다는 풍문과 더불어 일종 ‘유행의 선도’로서 화제를 모았고, 이후에도 드물잖게 있었던 기생의 단발 또한 대개 그러하였다. 기생의 단발은 주로 기생 영업을 그만두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거나 정절을 지키겠다는 맹세였고, 남자가 억지로 머리를 깎은 충격적인 사건에서도 그 본뜻은 여성미의 상징인 머리채를 잘라냄으로써 연회석에 나설 수 없게끔 만들겠다는 것이었으나, 단발이 화젯거리가 된 것은 외래 풍조와의 관련 속에서였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작 단발을 단행하는 신여성은 보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이유야 어쨌든 기생의 단발은 미리 자극된 호기심과 적절한 조응을 이루었다. 강향란의 선례를 따른 기생들 또한 한편으로는 유행을 십분 의식했을 것이다. 단발이나 양장, 연애와 정사 등의 사건은 궁극적으로 신여성을 주역으로 내세워야 할 것이었으나, 풍문이 적절한 현실태를 찾기 전 짧은 몇 년 동안, 기생은 훌륭한 대역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외국의 풍문으로,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 사이에는 신정 유곽 일본인 창부들의 사건으로 입에 오르내렸던 정사의 경우 역시, 처음 등장한 것은 기생의 사연으로서였다. 조중환은 번안작 『장한몽』에서 인기 높은 기생과 가난한 청년 사이의 정사 시도를 삽화적으로 묘사한 바 있었고, 나도향은 『환희(幻戱)』(1922~23)에서 기생 설화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애인에게 따로 여학생 연인이 있는 줄로 그릇 안 까닭에 광증으로까지 몰려간 설화는 “트레머리를 해야지 영철씨는 사랑을 한다나. 서양머리한 사람만 사랑한대”하고 중얼거리는 착란 속에서 자살을 결행했으니, 여학생의 존재에 밀려난 기생의 비극까지 묘사해 냈다 할 수 있겠다. 현진건 또한 각도는 다르지만 ⌈그리운 흘긴 눈⌋(1924)에서 기생과 정사하려는 남자를 보여준 바 있었고, “너 나랑 정사 안하련?” 하면서 기생에게 농반 진반 제안을 건네는 청년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허구가 아닌 현실 속에서 보더라도, 갖은 화제를 뿌린 끝에 192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기생 강명화는 ‘정사’라는 단어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가장 도드라진 사례였다.
정사 파트너로서의 기생 이전에 연애 파트너로서의 기생이 존재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정』의 월화가 품었던 연정은 그것을 예비한 것이었고, 『환희』의 설화가 그러했으며, 염상섭의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1924)에 나오는 도홍 또한 그러하였다. 남성의 입장에서라면?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에 등장하는 석태는 애인과 외양이 흡사한 기생 홍련을 부르기를 즐기고, 현진건 장편 『지새는 안개』(1923)의 주인공 창섭은 여학생 정애에게 사랑을 구하다 실패한 후 정애를 닮은 기생 운향과의 인연에 얽혀든다. 기생은 여학생이라는 낯선 존재에게 접근하기 전에 거치는 일종의 시험대였고, 훌륭한 대리물이었다. 현진건의 ⌈타락자⌋(1922)나 염상섭의 ⌈전화⌋(1925)에 비친 것 같은 영악하고 잇속 빠른 존재로서의 기생도 있었지만, 1920년대 초반 한국 근대소설에 선보인 기생의 모습은 대체로 그러하였다. 유행을 선도하고, 순정을 키워내고, 목숨 건 사랑의 신화에까지 도전했던 1920년대 초의 기생― 이들은 여학생과 경쟁하고 동시에 여학생을 모방했지만, 위태로운 줄타기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여학생이 압도적인 기세로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카페라는 새로운 유흥 공간이 기존의 요리점을 위협하면서 여급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유흥의 보조자였으되 오랜 역사를 통해 다채로운 이력을 쌓아온 기생은, 이번에야말로 퇴락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삽화 및 설명>
1. ‘무정의 히사시가미’ 부분에: 『명치・대정 가정사 연표』 342면 右下 사진을 왼쪽에, 324면 右下 사진을 오른쪽에 배치해 한 컷을 만든 후(일본어 설명글은 빼고) 설명은 “1900년대 초 일본, 히사시가미 머리를 한 부인(왼쪽)과 히사시가미의 변형을 기조로 한 각 여학교 머리형(오른쪽). 히사시가미는 당시 서양 부인의 머리형을 본뜬 것이었다.”
2. ‘소란, 기생의 학생장’ 부분에: 『동아일보』 1923. 1. 7 4면 연재소설 삽화, 설명은 “1920년대 초반의 전형적인 여학생 복장.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들고 있다. 머리는 히사시가미를 변형시킨 트레머리. “둥그스름하게 아무렇게나 틀어얹었던 서양머리”를 “한옆으로 가르마를 타고 기름을 발라 한편 눈썹 위로 비스듬하게 어려덮이게” 세련화한 것이 이 머리였다.
3. 같은 부분에: 『동아일보』 1923. 3. 30 8면 세창양화점 광고 중 여학생 삽화만. “손에는 손가방을 들고 짧은 치마 아래로 구두를 내보이고 있는 여학생. 1920년대 초반의 광고에 등장한 모습이지만, 머리는 당시 여학생 사이에서는 드물었던 단발로 정리하고 있다.”
4. ‘배우가 된 기생’ 정도에: 기생 사진 중 두 종류. ‘기생의 모습(1910년대)’를 왼쪽에, ‘조선미인화보’ 해당 컷에서 딴 두 사람 모습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쪽지고 성장(盛裝)한 1910년대 기생의 모습(왼쪽). 그러나 여학생의 새로운 스타일은 곧 기생에게도 영향을 미쳐, 연회석에 나설 때조차 귀밑머리를 풀고 가르마를 비스듬하게 탄다든지 앞머리를 조금 늘어뜨리는 치장이 유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