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순언(洪純彦)
1530~1598년
1. 짧은 인연, 아름다운 보은, 조선 왕실의 숙원 문제 '종계변무' 해결되다!~
2.임진왜란 명나라 군대 지원 성사~한 여인과의 인연
종계변무(宗系辨誣)
짧은 만남,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대인께서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도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은 홍(洪)이라 하오."
"오늘은 한국사 전이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동안 KBS에선 역사의 라이벌, 역사추리, TV 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렵고도 먼 역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때문에 한국사 전(傳)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수놓은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들입니다.
한국사 전(傳)은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한국사 전 첫 시간의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역관, 그러니까 통역관인 홍순언이란 인물입니다. 낯선 이름의 홍순언, 그는 조선의 운명을 달라지게 한 인물인데요, 여러분들은 임진왜란 하면 유성룡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이름만 익숙하시겠지만, 실제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수도 무사도 아닌 중인 출신의 역관 홍순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의 역사를 바로 잡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계기가 참 재밌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가 바꾸어 낸 역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당시 조선시대 중국, 일본 등 외교관계를 수록한 책이다.
조선 외교의 기본 방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과 관련된 외교 사례와 더불어 일선에서 활동한 역관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조선 선조 때 중국어 역관 홍순언.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그는 통주에 다다른다.
조선에서 출발한 지 두어 달, 홍순언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그리고 거리를 걷던 그의 발걸음은 한 기생집으로 향한다. 그와 조선에게 역사에 기록될 운명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홍순언과 한 여인과의 예상치 못한 인연이었다. 기생집을 찾은 그에게 한 아름다운 중국 여인이 눈에 얼핏 들어왔다. 순언은 주인에게 그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여인은 소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홍순언은 그녀에게 사연을 물었다.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인데 명나라 북경에 와서 벼슬살이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다 돌아가셔서 지금 관이 객사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스스로 나왔습니다."
순언은 그녀가 가여웠다. 여인에게 필요한 돈은 삼백금. 적지 않은 돈이지만 순언은 전대를 모두 털고 간다. 여인은 조선의 의인에게 이름을 묻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대인께서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도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은 홍이라 하오."
"곤경에 처한 여인을 돕는 의로운 남자. 그리고 그를 비웃는 주위의 사람들!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제가 찾아본 바로 30여 권이 넘었습니다.
선조실록, 통문관지, 성호사설, 서포만필, 연려실기술, 대동기문, 동평위공사견문록...
역사책 뿐만 아니라 소설책도 상당했는데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역사책인 통문관지에 왜 이렇게 홍순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적어놓았을까요?"
"먼저 통문관지가 어떤 책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문관지는 정치적인 외교관계부터 경제적인 통상문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엮어놓은 조선의 외교사입니다.
이러한 책에 홍순언의 이야기가 그만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태조3년(1394년 4월).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태조 이성계가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에서 조선 왕조의 가계에 대해 잘못 기록한 사건이었다.
600여 년전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던 문제의 사건을 대명회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북경사범대학교. 대명회전 정덕본(1510).
대명회전은 명나라의 법전으로 당대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 해놓은 책이다.
이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인임은 고려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러한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조선은 자신의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렇지 않다고 진정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자춘'이라고 자신의 가계를 설명하고 또 이인임의 가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기 위해 명나라로 갔습니다. " - 황여우푸, 중앙민족대학교수, 중국조선사연구회회장
조선은 그후 2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지만 대명회전의 기록은 고쳐지지 않았다.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조선 정계 최대의 외교 현황이었다.
"자신들이 명백하게 잘못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고치지 않는 그런 식으로 나간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시 강대국인 명나라의 오만함 이런 것들이 가장 큰 이유였고,
또 하나는 조선에서 끊임없이 매달리는 이 외교적인 현황에 대해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있는 외교협상 카드로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신병주 박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종계변무, 이번에 홍순언이 이 일을 맡게 된 것이다.
홍순언 북경 사행 - 1584
그러나 이번 사행길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홍순언의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았다.
1574년 홍순언 종계변무 사행. 홍순언은 이미 십 년 전 종계변무의 임무로 북경에 다녀온 적 있었다.
홍순언 - "대명회전을 새로 편찬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잘못 기록된 부분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명나라 예부상서 - "분명한 상황을 모르니까 조사해서 당신들이 갈 때 알려 주겠소. 절은 할 필요없소. 돌아가시오."
- 조천기(朝天記) 중에서
태조 이성계와 이인임의 가계를 자세히 적어 보냈지만 명나라 예부상서의 답은 2백 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명나라 예부상서 - "이 일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오. 그러니까 이미 황제께서 아는 내용을 또 다시 아뢸 수가 없소."
홍순언 - "한 번 더 여쭈어 보시면 안되겠습니까?"
명나라 예부상서 - "대명회전을 다시 편찬하게 되면 귀국이 원하는 내용이 저절로 들어갈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이렇게 십 년 전에도 겪었던 일.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종계변무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한 홍순언 일행은 이곳 동악묘에서 제례를 지낸다.
(동악묘는 어떤 곳인가요?)
"이 동악묘는 조양문 2리 밖에 있는 도교사원으로 원나라 때 세워졌습니다.
명나라 때 조선의 사신이 베이징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먼저 동악묘에 들러 제사를 지냈습니다.
즉, 자신의 여정이 평안하도록 제사를 지낸 후 조양문으로 가던 곳입니다." - 황여우푸, 중국조선사연구회회장
역관 홍순언은 동악묘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염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홍순언이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양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종계변무를 하러 온 홍순언 일행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애타게 그를 찾는 이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石星/명나라의 예부시랑
"이번에 공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부의 석시랑께서 부인과 함께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 동안 홍역관이 오는지 계속 찾았습니다."
홍순언을 맞이한 사람은 명나라의 예부시랑. 외무부차관이 조선 역관을 마중 나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접대였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예부 안에는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통사판관(通事辦管)이라는 이곳의 말단 직원이 조양문으로 나와 조선의 사신을 맞이해 통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부시랑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전례 없는 매우 파격적인 접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황여우푸, 중국조선사연구회회장
"군은 통주(通州)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아내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요!"
예부시랑이 조양문까지 마중 나온 일도 당황스런 일인데 그의 아내는 홍순언에게 절까지 올린다!
예부시랑의 아내는 바로 지난날 통주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절하는 것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그로서는 까마득히 잊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홍순언 덕분에 부모님 장례를 무사히 치루고 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 여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석성은 홍순언을 극진히 대접하며 이번 사행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곧 바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종계변무는 마침 석성이 시랑으로 있는 예부의 소관이었다.
홍순언은 북경에 머무르며 답을 기다렸다. 석성은 특명까지 내리며 애를 쓰지만 시간은 한 달이 넘게 흘러간다.
홍순언이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에 머문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때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이곳에 날아들었다.
대명회전은 조선의 요구대로 바뀌었다. 수정본인 대명회전 만력본(1587)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성계의 세계에 대해 매우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받았고 선조는 이한이며 신라의 사공이라는 벼슬을 했다, 6대손 긍휴는 고려로 왔다." - 장선, 북경사범대 역사계 교수
수정 전후를 대명회전을 비교해봤다.
만력본은 '이자춘'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고
정덕본은 이성계의 숙적이었던 '이인임'의 이름이 있다.
홍순언이 조선 숙원의 사업을 해결하고 압록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를 뒤쫓아오는 이가 있었다. 석성의 부인이 선물을 보낸 것이다.
나전함 열 개. 그 안에 그녀가 직접 짠 비단이 열 필씩 들어있었다.
백 필의 비단에 새겨진 '보은(報恩)'이라는 글자. 모두 부인이 직접 수놓은 것이었다.
사실 조정은 역관 홍순언에게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그러니 홍순언이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보면 당시 선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종계변무에 성공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다시 왕통의 정통성이라든가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았다는 외교적 자신감, 그리고 일반 사대부나 백성들에게 왕실의 떳떳함을 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성과물이었습니다. 이래서 국가에서 큰 경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 신병주 박사
홍순언은 이 일로 나라를 빛낸 공신이 된다.
선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들에게 '광국공신(光國公臣)'의 칭호를 내리는데
열아홉 명의 광국공신 중 역관은 단 한 명이었다.
홍순언은 2등으로 정철이나 유성룡보다도 높은 공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곧 우림위장에 임명받았다.
우림위장은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종2품에 해당된다. 이는 역관이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또 선조는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를 하사하기도 한다.
군호를 하사한다는 것은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선조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했다.
"저희가 지금 을지로 입구에 나와 있는데 이곳이 홍순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이곳은 조선의 숙원이었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홍순언에게 선조가 집과 노비를 하사하여 그가 살았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당시 은혜를 입었던 여인이 '보은'이라고 수놓은 비단을 선물했기 때문에 이곳은 '보은단동', 혹은 '보은거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 이상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보은단동(報恩壇洞)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은 홍순언을 기억했다. 이것이 짧은 인연이 낳은 그 첫번째 이야기다.
2. 조선 시대 역관은 누구인가? 국제무역상, 전문외교관,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차별 '중인'!~
"그렇다고 홍순언이 여인과의 우연한 인연만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가 역관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여러분 외교관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지금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외교관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국제감각, 세련된 매너 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고위관리들과 상대하게 소통할 수 있는 학식까지 갖추어야 했습니다. 역관은 그야말로 다방면의 재능이 요구되는 전문직이었던 것이죠."
"이 엘리트 집단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그 시절 역관이 될려면 역과의 시험에 통과해야 했는데 그 시험 과목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역관이 된 후에도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은 평생 계속 되었습니다. 외국 출장을 가기 전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당연히 출장도 가지 못하고 월급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역관들은 그 시절 실력을 가장 철저히 검증받았던 전문직이었습니다.
헌데 유학을 가지도 못했던 시절, 역관들은 어떻게 외국어를 공부했을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재를 검색해봤다.
노걸대.老乞大 조선 역관들이 공부했던 초급 중국어 회화책이다.
노걸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생들이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노걸대 원본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여러분"
노걸대는 고려 상인 세 명이 중국에 장사하러 가면서 겪게 되는 백여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서 오고 가는 대화로 꾸며져 있다. 홍순언도 이 책으로 중국어를 공부했을 것이다.
백여 가지 상황 중 몇 가지를 재현해봤다.
"주인 아저씨 안녕하셨는가?" "아이고 왕씨 나리가 아니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건강하시고요?" "당신네 여관에는 말먹이가 있었던가?" "마초도 곡식도 모두 있습니다. 검은콩은 한 말에 두 냥 반이고 말먹이는 한 냥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속이는 거는 아니겠지?" "나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리께서는 단골손님으로 저희 가족과 같으니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믿지 못하신다면 어서 다른 여관에 가서 물어보시죠." "됐네. 그냥 한 번 말해 본 것 뿐 일세."
"요즘 쓰이는 회화책 같은 경우는 굉장히 문명화 되어 있다고 해야 되나, 좀 예의있고 교양있고 이런 게 있는데 이 책에는 더 실감나게 되어 있어서 더 재밌고 흥미도 끄는 것 같아요."
노걸대의 주인공이 상인들인 만큼 대부분의 대화가 물건을 사고 팔고 흥정하는 이야기다.
"이 인삼은 좋은 것인가?" "이 인삼은 신라인삼입니다." "그저 그런 정돈데" "당신 무슨 말씀을 하시오? 이 인삼은 제일 좋은 것이오. 뭐가 그저 그렇다고 하시는 거요." "당신이 생각하는 값이나 들어 봅시다." "이 좋은 말 다섯 마리는 한 마리가 은자 팔량이니 합이 40량이요." "당신처럼 그렇게 값을 매기면 고려땅에 가서도 살 수 없어요. 정말로 말을 사려는 것이오? 그냥 놀리는 것이오?" "이 친구.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사지 않는다면 내가 정신 나갔소? 무엇하러 여기까지 와서 흥정을 하겠소?"
"흥정이라고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말하면 최대한 협상을 나한테로 이로운 쪽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에서는 이로운 흥정, 물건값을 깍는 것이죠. 이렇듯 조선에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하는 것, 이것이 조선의 역관들이 했던 임무였다고 하겠습니다." - 황지연 교수, 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
"이 노걸대는 앞서 보셨듯이 대부분 물건을 사고 팔고 흥정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헌데 왜 역관들은 하필 노걸대를 교과서로 사용했을까요? 당시 역관들의 임무에는 통역외에 국제무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순언도 당연히 무역에 관여했습니다. 그렇게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다 석성의 부인이 된 여인을 만났던 것이죠. 그런데 홍순언이 여인을 위해 쓴 3백금의 돈 기억하십니까? 지금으로 치면 억대의 돈인데요, 홍순언은 별 고민없이 그 돈을 내줬습니다. 억대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통주에서 여인에게 준 돈은 관아에서 빌린 무역자금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와 돈을 갚지 못한 순언은 공금횡령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죽는 날까지 옥살이를 해야 하는 홍순언. 그런데 마침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역관의 목을 베겠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죽음이 두려운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의 공금을 대신 갚아주고 죽음의 사행길에 홍순언을 대신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역관들이 큰돈을 융통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전기 역관은 관아에서 빌린 자금이외에도 인삼을 기본 무역자금으로 사용했다.
역관들에겐 공식적인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그 대신에 인삼장사를 해서 번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한 번에 가져가도록 허용된 양은 인삼 10근이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인삼 열 근이면 어느정도나 될까요?"
"이것이 인삼 300그램인데, 이 분량으로 스무 개여야 10근입니다. 은으로 하면 250냥, 쌀로 하면 150가마, 그 때 150가마 하면 굉장히 큰돈이예요. 지금 돈으로 하면 2천만원 정도가 넘어요." - 김성태 조합장, 강동시장 인삼판매조합
국제무역은 역관들의 주업무이기도 했다. 결국 역관들은 사행 경비를 위해 가져가는 인삼과 각종 관청에서 빌려주는 공금을 합쳐서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역관들은 이 무역을 통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가 되기도 했다.
"역관은 조선시대 유일하게 국가로부터 공인된 국제무역상입니다.
역관을 통해 모든 국제무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론 역관 개개인의 성향이나 사업적 수완에 따라 달라겠습니다만 역관은 쉽게 막대한 자금을 접하고 만들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역관 중에는 조선 제일의 갑부라고 할 인물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 이덕일 박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홍순언을 비롯한 역관들은 국제무역상이면서 전문외교관이었다.
모든 외교실무는 역관들이 맡아 해야 했다.
통역이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전문적인 일들은 역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역관이 하는 일을 가벼운 일로 취급하고, 역관은 '같이 설 수 없는 존재'라 여겼다.
역관에 대한 차별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백패는 문과응시생들이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에 합격할 때 받는 문서다.
그러나 역과 합격자는 급제를 할지라도 백패를 받아야 했다.
조선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가 홍패를 받았지만
역관을 천시하면서 문과 합격자와 구별하기 위해 백패를 지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까지도 구별했다.
"조선시대 한양은 이 청계천을 기준으로 해서 북쪽을 북촌이라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북촌은 종친들과 고급관료들이 살았고, 남촌에는 주로 선비들이 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개천을 중심으로 중촌이라 하여, 전문기술관료들이나 아니면 역관, 의원들이 살았기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 이들을 보통 '중인'이라 불렀습니다." - 이상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홍순언이 살았던 보은단동도 중촌에 속해 있다.
남양홍씨 대종중 중앙종회.
"안녕하세요. 족보상에 홍순언이란 인물이 어디쯤 있는지요?"
"아버지는 홍겸이시고, 아들 홍순언, 홍수언 세 분 다 역관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역관은 대대로 역관직을 세습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역관이 되면 역관 이외에 다른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관은 오를 수 있는 자리에도 한계가 있었다. 역관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사역원의 정3품 부정(副正)이 역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그러니 종2품의 우림위장에 역관인 홍순언을 인정할 리 없었다. 홍순언을 파직 시키라는 상소가 연이어 들어왔다.
3. 임진왜란과 명군의 파병!~
나라의 위기에 역관 홍순언 다시 활약하다!~
"역관들의 업무는 사실 모든 것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고위관료들은 오로지 정책결정에만 관여했고 외교와 경제, 문화와 국방에 이르는 모든 실무는 역관들의 활동과 조언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총 여섯 가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오키나와어, 위구르어, 일본어입니다.
정조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하는데 몽골이 망한 지 오래인데 몽골역관을 왜 계속 두어야 하는가란 문제였고, 몽골이 언제 다시 부흥할 지 모르기 때문에 역관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은 문치 못지않게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외교력이 중시되었습니다."
"이처럼 역관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역관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좌우되던 그 때 다시 한 번 전문외교관인 홍순언이 활약합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이 상륙한 지 하루만에 동래성이 무너지고 20일후엔 서울까지 함락된다.
선조가 치욕스런 피난을 떠나야 할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으로써는 명의 도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명 조정은 조선 파병을 주저할 뿐이었다.
명 황궁.
"조선과 왜는 왜국입니다. 왜국끼리 싸우는 데 우리 명나라가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압록강을 수비하면서 형세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선이 갑자기 새처럼 숨는 것은 분명히 스스로 초래한 재앙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왜국까지 가서 돕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조선을 돕자고 말하는 이는 오직 석성 한 사람 뿐이었다.
석성(병부상서-국방부장관) - "조선은 중국에게 왜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정은 우리의 사정입니다. 만일 왜적이 조선을 점령하게 되면 요동을 칠 것이고 또 나아가 사내관에 이르면 북경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명나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 '조선에서 길을 빌려서 명으로 넘어간다'는 최종 목표를 알고 있었지요.
어차피 토요토미의 공격에 최종 목표가 명이라고 한다면 조선에 들어가서 미리 막는 것이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전략적인 구상을 서두른 것입니다." -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석성의 주장은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였다. 일본이 만일 조선땅을 점령하면 그 다음은 명나라로 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데 주저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명나라에서는 왜군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동시에 조선도 함께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이 왜와 함께 중국을 치려 한다는 소문이 요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산해관에 홍순언이 도착했을 때 "너희 나라가 왜놈들과 함께 배반을 한 주제에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느냐!~" 명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욕을 퍼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보름여 만에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오자 명나라 조정의 의심은 더해갔다. 임금이 피난을 가장하여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북상한다는 것이다.
명은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다.
송국신(명 관리) - "그대의 나라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말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팔도의 관찰사 중 누구 한 사람도 말하는 이가 없고 팔도에서 누구 하나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 없소? 이것은 명에 대한 음흉한 반역이 분명하오. 제가 일찌기 국왕을 뵌 일이 있기 때문에 국왕이 실제로 피난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
명의 원군이 오기를 기다린 선조로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석성은 다른 고위사신이 아닌, 역관 홍순언을 급히 부른다. 명이 조선을 믿게 하려면 조선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석성 - "당신 나라일에 나 혼자 힘을 다하고 있소.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뜻은 나와 다르오. 당신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한다면 내가 힘을 쓸 것이요. 그러니 빨리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하도록 하오."
홍순언은 석성의 말을 급히 조선에 전하고 결국 명은 조선에 파병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참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또 종계변무에 성공해서 외교관으로서 성과를 이루었듯이 명의 원군을 이끌어내는데도 외교관의 능력, 역관의 채널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 신병주 박사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순언은 가진 돈을 털어 무기를 구입한다. 명에서 반출이 금지된 무기들이었지만 석성의 허락이 있었다.
활을 만드는 궁각(물소뿔) 1,308편과 화약의 재료인 염초 200근을 구할 수 있었다.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돌아온 홍순언은 통역관이 되어 전장에서 이여송을 따라다녔다.
가장 시급한 일은 평양성의 탈환이었다.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는 반전되었다.
1593년 평양성 전투
이후 전쟁은 7년간 계속 되고 명은 총 21만 명의 군사와 8백 82만의 은화를 지급했다.
마침내 1598년 9월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홍순언은 왜란이 끝난 그 해에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한 듯 세상을 떴다.
그러나 파병을 주장한 석성은 막대한 군비 소모의 책임을 물어 투옥된다. 결국 석성은 1599년 옥사하고 만다.
그리고 400년 뒤, 조선을 도운 죄로 위험에 직면했던 석성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에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석덕완씨는 석성의 14대 후손이다.
석성의 후손들은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귀화했다. 석성은 옥사하기전 가족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넘어왔고 선조는 그들에게 해주땅을 주어 정착하게 한다. 해주석씨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곧 명이 멸망했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위험에 처해졌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득세하니까, 청나라에서 와 가지고 무조건 명나라 유민 잡아내라 하니까, 행여 나가면 죽을까봐 그래서 못나가고 피해서 골짜기까지 왔다고 그렇게 전해듣고 있습니다.
조선역관보은사. 종계변무. 임진동원사. 부인지공." - 석덕완씨는 석성의 14대 후손
해주석씨 족보
석성의 후손들은 이 모든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4백여 년 전. 어려움에 처한 한 여인이 있었고 그녀를 가엾게 여긴 한 남자가 있었다.
역사를 바꾼 것은 홍순언의 측은지심과 은혜를 잊지않은 그녀의 마음이 있다.
"해주석씨말고도 우리나라엔 비슷한 이유로 귀화한 성씨들이 많습니다. 절강신씨, 소주가씨, 삼공마씨, 절강팽씨, 모두 임진왜란 때 우릴 위해 싸울 명나라 후손들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된 과거이자 현재가 된 귀한 인연들입니다."
"역사라는 장대한 광대한 시간을 두고 볼 때 찰나라는 그 짧은 인연이 그들 개인과 가족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필의 비단과 같은 과정을 만드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씨줄과 날줄의 교차점에 조선시대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우리의 역관들이 있었습니다."
|
첫댓글 홍순언이의 이야기을 잘 읽고 갑니다 !
대단히 감사합니다.
홍순언의 의로운 마음과 통큰 베품이 이씨조선의 족보를 바로잡고 나라를 살리는 게기가 되었군요.참으로 훌륭한 역관이고 후세에 길이 남아야 할 이야기 입니다.
역사의 향기(历史的香气)에 속하는 부분인 것같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역사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산자락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