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공헌한 삼성 역할 인정해줘야”
서울 광화문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소설 초고는 이미 끝났다”면서 “홍송원과 오리온 거래에서 봤듯이 대기업이 미술품을 비자금 창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다만 미술계 내부 사람들도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행복한 눈물’ 사건 때에도 호암미술관 수장고를 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나오지 않았나. 오히려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삼성이나 홍라희 측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역할을 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홍송원 대표가 제기한 이번 소송도 그런 측면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기업들이 미술품을 비자금 창고로 활용하는 것은 분명한 범죄”라면서도 “미술계 입장에서는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미술판에서 밥벌이를 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이 미술계에 기여한 부분도 분명하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서미갤러리 같은 곳이 앞으로 몇 개 더 나올 수도 있다. 아니 더 있다. 컬렉터가 움직이는 화랑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컬렉터들이 있기 때문에 미술계가 돌아가고 화가들이 작품을 계속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삼성이 우리나라 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을 했다는 건 미술계 사람들은 모두 공감한다.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서미갤러리 사건이 묻히기를 바라는 분위기도 많다. 알다시피 리움미술관은 세계적 미술관이다. 삼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정부에서 손놓고 있을 때 문화재 관리를 해준 셈이다. 홍라희라는 미술애호가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국내 작가가 클 수 있었다. 돈줄은 돈줄대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이 범죄에 이용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보다는 미술계의 시각으로 들여다본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난 싸구려 작가… 싸구려 미술 많이 나와야”
이씨는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추리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한 후 미술장르 작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그는 스스로를 “싸구려 작가”라고 말했다. “아트딜러를 하면서도 비싼 작품은 취급하지 않았다. 1만~2만원짜리 중국 그림도 사오고 몇만원대 러시아 작품도 사온다. 수억원짜리 작품으로 도배하는 호텔이 아니라 몇만원짜리 싸구려 작품들로 펜션이니 모텔에 미술을 채워주는 일을 했다. 주변에서는 ‘배운 게 있는데 쪽팔리게 무슨 짓이냐’ ‘미쳤냐’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싸구려가 좋다. 일종의 도전이고 전위라고 생각한다. 소설도 그런 맥락에서 쓴다. 싸게 읽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정색하고 고상하게 미술계의 문제들을 짚기보다는 웃고 즐기면서 미술계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싸구려’라고 자처하는 이씨가 미술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는 방법은 뭘까. “도덕교과서 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법보다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미술품 양도세니 뭐니 해서 과세해봤자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다. 1억원 주고 사고도 판매자와 구입자가 입을 맞춰 1000만원에 샀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방법이 없다. 법으로 규제를 하기보다는 미술품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에 관심을 갖고 감시의 눈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억, 억 하는 그림값도 문제다. 비싼 그림, 비싼 작가들만 대접하는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이씨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미술시장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예기획사에서 연예인을 키워내고 연예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현대 미술시장도 갤러리, 평론가, 컬렉터, 언론사가 시스템처럼 움직이면서 작가를 키워내고 작품 값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시장을 봐라. 소수의 대기업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몇 개의 대형화랑이 미술판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들이 작가를 키워내고, 작가를 움직이고, 그림값을 움직인다. 물론 그 뒤엔 컬렉터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거기에 평론가·언론도 주연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소 갤러리를 많이 키워야 한다. 한 점에 수십억원씩 하는 세계적인 작가도 키워야겠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 수 있는 그림들이 갤러리에 걸리고 팔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 같은 것도 지속적으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돼야 극소수의 작가만이 잘사는 구조에서 벗어나 많은 작가들이 굶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돈에 움직여도 예술은 제자리 찾아갈 것”
미술계의 문제점을 다룬 소설을 6권째 쓰고 있는 이씨가 미술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긍정적이었다. 돈으로 움직이는 미술시장이지만 그 안에도 미술에 대한 열정과 예술혼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어차피 작가도 밥을 먹어야 작품 활동을 하고, 돈이 돌아야 미술시장도 돌아간다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슬만 먹고 산다는 환상을 버리고 이 시대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 안에서 미술은 꽃필 수 있다. ‘신정아, 홍라희’ 같은 오차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미술시장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믿는다. ‘예술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이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고 소설을 쓰는 이유이다.”
이씨는 “대기업의 미술품 돈세탁을 다룬 소설을 쓴다고 하니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다. 현재 출판사 몇 곳과 접촉 중이고 내년 초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