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서기 42년 신라 유리왕은 경상북도 청도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을 멸망시켰다. 이서국 왕손은 낙동강을 서남쪽으로 건너 가야국을 만들고,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건국신 이자나기 부부가 되었다. 태양신을 모시는 이자나기 부부가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이 일본 열도라고 전하며, 나라 이름은 대팔주국(大八洲國)이라 하였다.
신라 건국 이후, 일본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로부터 이자나기[伊耶那岐(=이진아시伊珍阿豉)]와 이자나미(伊耶那美)신이 도래하여 일본을 건국하였다. 이자(伊耶)는 일(一)과 같다. 뜻은 하나, 첫번째 신이라는 의미다. 또한 한반도의 이서국(伊西國) 출신(나기)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본래 이스(伊西), 혹은 우스(內)는 구슬(珍)을 나타낸다. 구슬 진(珍)은 우쓰(宇圖)로 발음하라고 [일본서기] 저자가 주석하였다. 이스(伊西)는 동시에 여자 무당(巫堂), 신녀(神女)을 의미한다.
부여의 영역이었던 내몽고 서요하(西遼河)의 천산(天山) 지역에서는 지금도 남자 무당을 박(博)이라고 하며, 여자무당을 이도칸(伊都干)이라 부르는데 굿[驅邪(=굿)]을 하여 구사치병(驅邪治病) 한다. 일본발음으로는 이쯔칸이 된다.
[삼국유사]에서 가야의 본래 관직명 이름은 아도간(阿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干이 있었는데 이도칸(伊都干)과도 관련된다. 이도간이 가야에서 이스칸(伊都干)으로 변하여서 이서국(伊西國)이나, 일본의 이도(伊都), 이세(伊勢) 등의 지명과 이스케요리[伊須氣余理(신무천황비)] 등의 인명을 남긴 것이다.
남자무당 박(博)에서 신라왕 박혁거세의 성씨 박(朴)씨도 유래되는 것이고, 방언으로 신라왕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했는데 차차웅은 '무당'이란 뜻이었다.
이자, 이진아의 어원은 '이슬'이다. 이는 “이어진 구슬 목걸이 영(瓔)”를 의미한다. 신라왕 박혁거세의 최초 호칭이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한(居瑟邯)이었다.
거슬한(居瑟邯)의 거(居)도 훈(訓)인 이슬로 읽으면 이슬한이 된다. 고대 일본의 이름 중의 쿠시다마(櫛玉姬)나 타마쿠시(玉櫛媛)도 우리말 줄-다마에서 비롯되니 줄에 꿴 옥, 영(瓔)이라는 뜻이다.
신라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때에, 신라의 확장으로 경상북도 청도(淸道)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이서국이 서기 42년에 멸망하자, 이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서국의 후손이 일본의 건국신(建國神)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다.
이서국성(伊西國城)이 있던 청도군 오도산성(烏刀山城:까마귀[봉황?]칼) 부근의 예전리(禮田里)에서 발굴된 청동검을 보면 '초기 비파형 청동검'이다.
만주의 요양시(遼陽市)와 무순시(撫順市)에서 이와 비슷한 초기 비파형 청동검이 발굴 되었는데 이는 후단군시대 최초 기자(奇子)였던 서우여(徐于余)의 번한조선(番韓朝鮮)에서 만든 형식이다. (구자일의 [한국고대역사지리] 참조)
즉 이서국은 그 유물로 보아서 bc1100년경의 후단군조선시대에, 서우여 기자 영역(전단군조선의 마한과 번한 영역)에서 만들어서 전파된 것이다. 즉 서기 42년에 망했어도 이미 천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나라다.
경상북도 고령군의 대가야(大加耶)에는 이진아시(伊珍阿豉)라는 왕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고령군高靈郡]에는 신라 석학 최치원이 남긴 대가야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伊珍阿豉王(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이고 도설지왕까지 520년이었다. 가야산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 감응하여서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를 낳았으니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本大伽倻國[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五百二十年[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뇌질주일, 뇌질청예는 가야산 정견모주의 후손이다. 그녀의 남편 이비가(夷毗訶)는 일본식으로 '이히'고 (伊를 日子)로 보면 큰 제사장이라는 뜻이니 이서국(伊西國)의 왕 또는 남자 무당을 의미한다.
그런데 42년에 신라 유리왕이 이 이서국을 멸망시켰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해 42년은 바로 대가야와 금관가야 등의 건국년도이기도 하다.
즉 42년에 망한 이서국의 왕실로부터 정견모주와 두 아들이 청도(靑道)로부터 낙동강을 건너서 경상북도 고령(高靈)으로 피난와서 42년에 대가야를 세운 것이다. 김해(金海)의 금관가야(金官伽倻)도 역시 42년에 건국되었다.
두 아들의 성을 뇌질(惱窒)이라 하였는데, 고대 일본말로 보아서 뇌질의 어원은 뇌직[瀬織(일본발음 세오루)]으로 고려된다.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말하는 '아진아시'의 다른 이름인 '내진주지'의 '내진(內珍)'과 같은 발음이다.
지금 일본말로는 금직(錦織)이다. 즉 비단을 짜는 일이다. 따라서 “비단 짜는 신녀, 뇌직(瀬織)”의 아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진(內珍)의 한자식 발음이다.
일본의 히미코여왕이 된 뇌직(내진)진비매[瀬織津比賣]가 일본 발음으로 '세오리츠히메'인데 바로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의 '세오녀(細烏女)'인 것이며, '세오(뇌직/내직)녀'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비단을 일본에서 짰고, 신라에도 나누어 주었다.
뇌(惱, 瀬)는 우리말 동사로서 바늘을 누비다, 자수를 놓다의 어간 “놓”이다.
서기 42년 육가야(六伽倻) 건국 직후에 대가야왕 뇌질주일, 즉 이진아시(伊珍阿豉)는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의 건국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 부부신(夫婦神)이되었다.
일본의 여러 지방의 토착신들은 이 대가야의 왕 이자나기와 그의 부인 이자나미의 후예라고 하는데, 대가야에서 함께 건너간 가야인들의 세력이 된다.
이자나기 부부 중에서 이자나미는 가야로 돌아와서 죽었고, [고사기]는 이를 황천국(荒天國)으로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이자나기는 가야에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주] 아메리카인디언 풍속에서 보듯이 신석기시대에는 사나운 동물을 죽여서 그 짐승들의 이빨을 줄줄이 꿰어 매달은 목걸이가 힘 센 추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점차로 사회가 발달되어서 이빨이 아니라 구슬을 꿰어 달게 되었다. 굽은옥(曲玉)의 생김새도 본래 동물의 이빨 모양에서 유래된 것이다.
“쿠사나기쯔루기”와 함께 대대로 전승되어 온 일본 천황의 신보(神寶) 중에도 구멍이 뚫린 곡옥(曲玉)이 있다.
따라서 이빨(보물)의 고어가 이슬(잇살)이었거나, 이빨을 꿴 것, 혹은 구슬을 꿴 것이 이슬이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언이 있는데 구슬을 꿴 것이 바로 또 “이슬”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한시대 마한(馬韓) 등에서는 금은(金銀)보다 옥(玉)이 더 가치있는 보물이었다.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의 마한 설명을 보면 마한(馬韓)은 오로지 구슬-목걸이(瓔珠)를 중시했다. 마한은 구슬목걸이를 재보로 삼았다. 唯重瓔珠以瓔珠為財寶。
혹은 구슬을 옷에 달기도 하고,혹은 목에 매달아서 늘여뜨렸다. 或以綴衣為飾或以縣頸垂耳,금은비단이 이슬(珍)을 대신하지 못하고,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다. 不以金銀錦繡為珍以珠玉綴成的頸飾.
따라서 주옥(珠玉)을 달아맨 구슬-목걸이(瓔珠)에 대한 우리말이 바로 이슬(珍)이었던 것이다. 구슬은 단지 옥(玉)이고, 구슬을 꿴 이슬을 진(珍), 영주(瓔珠), 영락(瓔珞)이라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라왕칭 거서간, 거슬한, 이사금은 모두 “이슬한”을 가리키고 이는 이빨, 즉 곡옥을 매단 목걸이의 왕이라는 뜻이다.
진한인 신라왕이 이슬한이었으니 변한[弁韓(고령군의 북쪽 성주군(星州郡)은 고대 성산가야(星山伽倻), 벽진군(碧珍郡) 등으로 불렸는데 별한, 변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의 왕도 역시 그래서 이진아시(伊珍阿豉)라고 적은 것이고, 이진아시는 “이슬아시”로 읽고 이슬아시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가야왕의 호칭이 된다. 그런데 일본에 건너가서 이자나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주] 가야산 정견모주가 낳은 대가야왕은 뇌질주일(朱日)이라 하였는데 붉은구슬(赤玉)을 의미하고, 금관가야왕은 뇌질청예(靑裔)라고 하였는데 푸른옷(靑衣)를 의미한다.
[주] 북부여(北夫餘)가 bc107년에 한무제에게 패전한 후에 새로 일어난 졸본부여(卒本夫餘)에 밀려나서 bc86년에 새로 세운 곳이 가섭원(迦葉原)부여다.
“가야”는 바로 북부여의 새로운 땅이름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에서 유래되었다. 가섭원은 본래 후단군조선이 일어난 우현왕 고등(高登)의 고향 개사원(蓋斯原), 개사수(蓋斯水)가 어원이다.
개사원, 가섭원이 가시원, 가이원 즉 가야가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는 가시-하라(橿-原)로 되었다. 부여 육부족에 구가(狗加)가 있었는데 동물 “개”의 옛 발음 가이, 가이ㅅ 와 관련된다.
따라서 가시하라를 가야 혹은 가라라고 한 것이다. 구사한국(狗邪韓國)에 개(狗)가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주] 고대 중국에서는 구사(狗邪)라는 신령한 동물 신상이 있어서 사악함을 쫓아냈다. 후에는 벽사(辟邪)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결국 조선의 해태(獬豸) 상과 비슷하다.
[주] 김수로왕이 자리잡은 바닷가 금관가야에는 서기 48년 7월, 중국 사천(泗川) 안악(安岳)으로부터 피난해온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건너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하고 불교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普州太后許黄玉: 許黄玉,32年9月3日出生 吊漢建爲郡普州,即今瑞云許家坡。47年,四川境内發生了以雷遷爲首的聲勢浩大的暴動。48年,東漢政府爲防止再次發生叛乱,强行將“乱民”7000余人遷往江夏(今武漢一帶)。年方16歲,許黄玉家族等20余人殺死随船官兵,奪船東下,經楊子江,在5月中旬漂流入黄海。48年7月27日清晨,一座形似鏝頭狀的島嶼展現在眼前。他們絶地縫生、歡呼雀躍。
김수로왕비의 무덤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적힌 것은 그 출신지 사천 보주(普州)에서의 내력에 의한 것이다.
[주] 한편 김수로왕 때에 인도로부터 석탈해(昔脫解)가 바다를 건너왔는데 [삼국유사]에서 석탈해의 부왕은 완하국왕(玩夏國王) 이라고 했다.
그의 이름 석탈해는 석가모니 시다르타(Sidhartha)의 차자(借字)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가야에는 허황후의 오빠인 허보옥이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는 법명으로 파사석탑을 가지고 와서 불교를 전파하고 있으므로, 석탈해는 일본으로 떠났다가 신라로 들어가서 혁거세후 3대째 이어오고 있던 박씨의 사위가 되어 신라의 4대왕 탈해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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