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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2.12
계엄령
▲ 지난 3일 밤 한 시민이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어요. /장련성 기자
지난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내외를 놀라게 했습니다. 4일 새벽 국회에선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됐고, 계엄은 이날 새벽 4시 30분에 해제됐습니다. 이후 대통령 탄핵과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사상 초유의 출국 금지까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계엄(戒嚴)이 뭘까요? 사전적 의미는 '군사적 필요나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일정한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군(軍)이 맡아 다스리는 일'을 말합니다. 군이 평소엔 없는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채 민간인의 자유를 통제하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계엄령 선포는 평상시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헌법 77조 1항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대통령이 바로 이 조항을 위반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번 비상계엄령 선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3번째였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무슨 일 때문에 계엄령이 선포됐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김재규의 주장 "비상계엄 선포해야"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밤 9시 30분,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 모인 국무위원들을 향해 비상계엄 선포를 강하게 주장한 사람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약 두 시간 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계엄령을 통해 군과 정보부를 연결한 쿠데타를 구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재규는 곧 체포됐지만, 다음 날 새벽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김재규의 계엄령 선포 요구가 받아들여진 셈이죠. 1981년 1월 24일까지 이어진 이 계엄은 대한민국의 12번째 비상계엄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으로 선포된 계엄령이었습니다.
언론인 조갑제는 저서 '박정희'에서 이 계엄령 선포를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건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태'라는 요건에 해당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비상계엄령 선포의 부당성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요건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계엄을 선포하면 권력이 군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중대한 교훈을 준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 후퇴시킨 1979년 계엄령
당시 계엄령 선포 지역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분 계엄 상황에선 계엄사령관이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받지만, 전국 단위 계엄에선 대통령의 명령을 받게 되므로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같은 해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쿠데타를 벌인 데 이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은 계엄 상황에서 정치적 권력을 확고하게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군부는 이날 밤 김종필·김대중 등 정치인을 연행하고 다음 날 새벽 국회의사당을 점령했습니다.
그들이 설립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막강한 실권을 쥐었고 이후 제5공화국 수립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10·26 직후의 비상계엄령은 군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발판이었던 셈입니다. 계엄령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던 것이죠.
여순과 4·3 사건, 6·25 전쟁 때 선포
계엄 선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대한민국 현대사 격동의 고비와 어두운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계엄령 선포는 모두 18차례였으며, 이 중에서 비상계엄이 13회, 비상계엄과 연계된 경비계엄이 5회였습니다〈표 참조〉. 비상계엄하에서는 영장 없는 구금과 언론·출판의 자유 제한 등 조치를 할 수 있으며, 경비계엄은 주로 치안 확보를 위한 것입니다.
첫 비상계엄인 1948년 10월의 계엄은 '10·19 여수·순천(여순)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전남 여수에 주둔한 국군 14연대 일부 군인이 무장봉기한 사건이었죠. 그해 11월에 선포된 두 번째 계엄은 제주도의 '4·3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많은 제주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 사건이었죠.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선포됐던 3~6번째 비상계엄은 모두 6·25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중 6번째는 부산 정치 파동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라 할 수 있었습니다.
1987년 6월에도 없었던 비상계엄
이후엔 양상이 좀 달라집니다. '비상계엄이 실질적인 국가 위기 상황이라기보다는 독재 권력의 정권 유지나 찬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1960년 4월 선포된 7번째 비상계엄은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선 4·19 혁명이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출동한 군은 시위 진압을 자제했습니다. 1961년 5월의 8번째 비상계엄은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5·16 군사정변 이후에 취해진 조치였죠.
1964년 6월의 9번째 비상계엄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가 일어난 이른바 '6·3 사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4·19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던 것이죠. 10번째 비상계엄은 1972년 '10월 유신' 체제의 선언과 함께 취해졌는데, 정치 시스템을 바꿔 박정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79년 10월 부산·경남에 선포된 11번째 비상계엄은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부산·마산(부마) 민주항쟁'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10·26 사건 직후 선포된 12번째 비상계엄 이후 45년이 되도록 계엄령 선포 같은 일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난 '6월 항쟁' 당시 제5공화국 정부는 비상계엄령과 군 투입을 준비했지만,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습니다.
▲ 계엄 선포를 보도한 1972년 10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이에요. 상단 큰 제목에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라고 적혀 있어요. /조선일보DB
▲ 비상계엄 중이었던 1980년 5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문의 모습. 학생들이 있는 학교를 경찰이 둘러싸고 있어요. /조선일보DB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비상계엄은 지금까지 총 13번 선포됐어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