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서
오도청 양호실에서 부항을 뜰까 했는데
띠리리 전화가 온다.
"예산을 가야 하는데......차편이 마땅찮네."
운전 못하는 남편은 비에 젖은 낙엽, 그 이상이다.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차 시간에 가까스로 대어
공주에 오니 5시.
대기 중이던 법화를 태우고.
약속 장소에 내려 준다.
끝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니,
기사 노릇도 직업으로 하자면 참 애로가 많겠다.
아직 해는 남아 있고
예산이라는 이 아름다운 고장을
발로 한번 밟아 보고 싶어
슬금슬금 걷기 시작한다.
조금 걸어 나가니 바로 시장통.
'닭개장 팝니다'라고 써 붙여 놓은 허름한 음식점과
햇 양파를 잔뜩 쌓아 둔 채소 가게와
낫과 호미가 보이는 철물점 등등
각 업종을 망라한 가게가 늘어서 있다.
시장통을 지나니 제법 번화한 거리가 나오고
버스 정류장의 팻말에는
쌍송백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의 장승백이는 들었는데
예산에 쌍송백이가 있다는 건 처음 안다.
버스 노선표를 보니 삽교, 덕산, 수덕사까지도 운행한다.
그렇지만 또다시 차를 탈 일은 없겠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니 향천사 1.5킬로미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머리에 불이 반짝~ 들어오는 순간.
'그래, 바로 저기야.
향천사를 가 보는 거야.'
목적지가 생기니 어슬렁거리던 발걸음에도
절로 절도(節度)가 생긴다.
한마음 마트를 끼고 올라가니
굴을 뚫고 나온 도로 교각이 높이 서 있다.
좋았을 풍광이 높은 교각 때문에 살풍경해지고 말았다.
교각을 지나니 다시 눈맛이 좋아진다.
길가로는 잘 지은 저택들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마당에 꽃나무가 환하고 꽃밭도 잘 가꾸어 놓았는데
길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길을 따라 걸어 놓은 플래카드만 요란스럽다.
초파일을 맞아 향천사에서 걸어놓은
각종 기도와 봉축법회 안내문들이다.
절이 가까워질수록 써붙여 놓은 표지판들이 더 많아진다.
주차 금지라느니 애완견 반입금지라느니
불미스런 사태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느니 등등......
어째 산사 초입의 문자가 시정보다 더 살벌한지 모르겠다.
드디어 향천사,
편액 앞면에는 금오산 향천사라고 쓰였고
뒤에는 호서천불선원이라고 쓰였다.
절 초입에 조르륵 피어 있는
수선화를 보고서야
마땅찮은 마음이 스러진다.
절 마당에 들어서며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수종을 짐작하기 어려운 활엽수 세 그루가
절 마당에 턱 턱 턱 서 있다.
제법 둥치가 굵은 거목이다.
절 뒤로는 금오산이 절을 감싸듯이 안았고
아름드리 소나무도 잘 자라 있다.
향적사 안내문을 본다.
백제 시대 의각대사가 세운 절이니
고찰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오래된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고
극락전 오른쪽으로도 새로 터를 닦고 있다.
절에서 돌아나오는 길
지는 해가 던져 주는 마지막 빛을 받으며 걷는다.
햇빛 아래 빛나던 꽃들과 잎들이
어둠 속으로 스륵스륵 말려들어간다.
작은 개울가에 도착했을 때는
나트륨 가로등이 노랗게 켜지기 시작했다.
개울가에 핀 벚꽃이 가로등 불빛에 환하다.
큰길을 버리고
개울 옆에 붙은 작은 길을 택한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폭이다.
지붕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
큰길에서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이렇게 사는 냄새 물씬 나는 골목이 있다.
작은 창문에 켜진 불빛들이 정답다.
저 창 너머에는 누가 살까.
허리 굽은 할머니?
떠꺼머리 총각?
좁은 길이 끝나는 곳에 찻길이 나온다.
갈 때는 직각삼각형의 직각을 낀 두 변으로 갔다가
올 때는 빗변으로 온 것이니
말하자면 지름길로 온 셈이다.
저녁 여덟 시인데
자그마한 소읍에는 벌써 인적이 드물다.
노란 가로등이 띠엄띠엄 켜져 있는 사이로
간간이 꽃향기 날리고
하늘엔 별도 하나둘 뜬다.
멀리서 온 여행객 같은 기분이 든다.
돌아갈 곳이 어디인가, 아득해지기도 한다.
어디로 산책을 갔던 것이며
이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2009. 홍차 |
첫댓글 운전기사 출장 제대로 다녀오셨네요. 예산이 공주에서 어느쪽에 있는지요?
북쪽입니다.~ 예당저수지, 덕산 온천, 기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