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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김삿갓(金炳淵)의 [가상대담] 두 사람 다 강원도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세종때 태어나서 성종때 삶을 마감한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인이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21세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하산하여 관서와 관동지방을 두루 돌며 기인행각과 함께 시문을 남겼고 한때 경주 남산에 칩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한 많은 생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에서 마감했다. 영월땅에 피신해 살았다. 향시에 나갔다가 뒤늦게 조부의 내력을 알고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숱한 기인행각을 벌였다. 해학과 풍자 넘치는 파격적인 시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부른다. 그는 전남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 정시롱 사랑방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3년 후 차남 익균이 부친의 묘를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다가 다시 햇빛을 본 것은 116년이 흐른 1982년, 영월 향토사학자인 고 박영국 선생이 10여년을 탐문한 끝에 찾아냈다.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 본명이 김병연인 방랑시인 김삿갓(金笠) 헤지고 잘려 입었는지 걸쳤는지, 날아가던 까마귀가 사촌하자고 덤빌까 걱정되네 그려.. 기생집에 장고없는 격이지요. 그 옛날 저잣거리에서 영의정 정창손을 꾸짖고, 찾아온 판서 서거정을 농락하던 기백으로 한잔 드십시오. 술 한잔 나누고싶던 참이었네. 생육신이라고 내 위패를 후세사람들이 단종임금이 계신 영월에 둔 것이나 전라도 화순땅에 버려졌던 자네의 시신을 자네 둘째 아들이 수습해다 영월땅에 묻어 준 것이나 영월이 우리들 영혼의 고향이 된 것이 우선 같고. 그 다음, 어르신이나 저나 소싯적에는 명문거족으로 일단 과거에 들기만하면 장래가 보장됐을텐데 병고가 생겨 일찌감치 뜻을 꺾었지요. 공교롭게도 홍경래 난 때 전사한 가산군수 정시를 칭송하고 목숨을 부지한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하라는 내용이었지..? 나이 스물이 되도록 집안내력을 헤아려보지 못하다니. 과장에 나아가 장원급제만 하지않았더라도 평생 가슴에 못질하고 살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정권을 지탱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바람에 숱한 목숨들 앗아갔지.. 사민정책때문에 당시에는 서북쪽 사람들을 멀리했단 말이야. 그 결과 어떠했는가. 반감을 가진 동량들이 들고 일어나 푸대접 무대접을 규탄하며 조정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냔 말야. 무대접 푸대접을 따지면 강원도 사람들이 먼저인데 워낙 도민들이 무던해서..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 이름을 감추고 얼굴을 가리기로 했습니다. 삿갓을 눌러쓰고 무작정 방랑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있거늘 뜬 구름 같은 인생은 공연히 스스로 바쁘기만 하구나). 시를 읊고 나니 마음이 허전해져서 술이 더 당기는구만. 그래, 그때는 모두 운명에 매였다고 생각했었지. 운명에 죽고, 운명에 살고,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운명을 거스른 사람이야. 습니까. 부모가 지은 죄 대물림받아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하고, 조상이 머슴이면 머슴으로만 살아야 했던 운명.. 저는 그래서 쓰잘데 없는 말짓거리로 인가사를 희롱하며 동가식 서가숙 방랑을 일삼았지만 어르신은 마음만 달리했으면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공명을 누렸을 것이 아닙니까..?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화답한 시 때문에 다섯살때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지. 과연 신동이란 소문이 세종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입궐까지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세종임금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네. 보답하고자 열심히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가 수양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공부 끝, 보던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내려와 자네처럼 유랑의 길을 떠났지.. 벼슬살이에 아주 뜻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고 입방아를 찧는 모양인데 스물네살 때 관서지방을 유랑하고 돌아와서 쓴 '탕유관서록' 에 밝혔듯이 본래 내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명리를 즐겨하지 않을 뿐더러 도를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서울을 떠났던 바, 세종임금의 정리를 생각해 효녕의 부름을 어렵사리 받아들인 것 뿐일세. 남아있는 작품이 몇편 안된다는 점이지요. 산수자연을 읊은 시보다 반골기질을 드러내거나 세상을 풍자 희롱한 작품을 후세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해 주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지요. 그 중 인심의 변덕 스러움을 날씨에 비유해 지으신 사청사우(乍晴乍雨)는 그대로 어른신이 살아오신 세상이 아닙니까..? 하늘의 도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다 문득 돌이켜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더니 도리어 스스로 공명을 구함이랴.(하략) 스무나무 밑에 앉은 서러운(三十) 나그네에게 망할(사십)놈의 집안에서 쉰밥(五十)을 주는구나. 집에 돌아가 설익은(三十)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 한바탕 골탕먹였죠. 아침 일찍 서당에 찾아와보니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도다. 방안에는 모두 귀한 물건만 있으나 학생은 합해 열 명이 되지 못하는구나. 살펴보면 재물만 밝히는 요즘 선생들을 힐책한 내용인데, 자네 시편의 그런 점이 민중을 사로잡았으렷다. '소양정'이 기억납니다. 시란 자기실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대 시인가운데 어르신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드물지 않나 생각합니다.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용장사 매월당에서 7년여 칩거하며 집필하신 '금오신화'는 유교와 불교가 혼합된 사상을 엿보게해주는데 과연 어르신은 학승입니까, 유학자입니까..? 이상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본명이 김병연인 방랑시인 김삿갓(金笠)의 가상 대담이였다. 방랑시인김삿갓-명국환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 전경.. 김시습이 마지막 생을 마무리 한 곳이다. ↑ 무량사 경내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詩碑이다.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는 김삿갓의 묘비이다. ↑ 와석리 노루목 김삿갓 묘비 주변에 있는 조각물들이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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