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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무실에 학교 후배가 찾아왔다. 그는 한창 정력적으로 일할나이인 40대 초반의 변호사였다. K대 법대를 나오고 한때 S그룹 법무팀에서도 일했다. 그런 그가 고향 청주로 내려와 친구와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한지 3개월이나 됐지만 그는 아직 한건도 수임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활비는 결혼하고 아이낳고 뒤늦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부인이 벌고 있다. 아직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얼굴엔 그늘이 스쳤다.
하지만 개업 변호사는 힘들어도 빛을 지는 경우는 흔치않다. 적어도 개업의사에 비해서는 그렇다. 의료장비나 시설비등 부대비용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신문사회면 한귀퉁이에 치과의사들이 불법사채에 내몰리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광주 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30대 치과의사 A씨는 지난해 11월 사채업자에게 2천여만원을 빌렸다. A씨는 연 240%에 달하는 이자를 감당해야 했지만 치과를 개업하며 제1금융권의 대출 한도를 거의 다 채워 울며 겨자 먹기로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A씨는 개업 후 대형 치과 병원 등에 밀려 경영난에 시달렸고 또다시 돈을 빌려 앞서 대출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기 급급한 상황을 반복해야 했다. A씨는 3개월여간 1천만원이 넘는 이자를 감당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사채업자를 경찰에 고소했다.
한때 치과는 안과, 피부과, 한의원과 함께 인기직종이었다. 하지만 개업 시 대당 수천만원, 수억원을 호가하는 장비와 권리금 등을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실내 인테리어도 웬만한 카페수준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중대형 프랜차이즈 치과병원이 대거 개업하면서 일부 소규모 의원들은 존폐위기를 맞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최근 2년간 전국 시도별 요양기관 개폐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 3년간 3천444개의 치과의원이 개업하고 2천321곳이 영업을 중단, 하루 평균 2곳이 문을 닫았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개업 시 수억원의 대출을 받아 운영을 시작하지만 심각한 경쟁으로 경영난에 시달려 대출금 이자 상환에 부담을 느끼고 폐업하거나 일부는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고 있다.
어디 치과뿐인가. '비아그라'같은 발기부전치료제가 등장한 이후 한의원에 손님이 급감한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밖에 내과와 외과등 동네의원도 간판을 유지하기가 쉽지않다. 장비와 시설에 거액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평일 오후 8시, 주말에도 오후 3시까지 파김치가 되도록 문을 열지만 환자가 많지 않으면 유지하기가 어렵다.
청주 사창동 시장통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후배는 "요즘같아서는 폐업을 한뒤 덜 벌어도 뱃속 편하게 보건소 의사로 취업하고 싶다"며 "환자를 끌려면 고가 장비와 세련된 인테리어에 투자해야 하는데 투자대비 효과가 별로 없을것으로 보여 포기했다"고 말했다.
개업변호사가 개업의사보다 투자비가 덜들어간다고 해서 나은것도 아니다. 예전에 법대를 가서 사시를 패스해 검사나 변호사가 되면 동네 잔치를 벌일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변호사가 되면 목에 힘주고 살 정도로 부도 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 얘기가 됐다.
변호사가 1만명이 넘은지 쾌 됐다. 변호사들 조차 공급과잉이라는 비명이 나올 정도다. 변호사들의 월평균 건수는 1.8건으로 한달에 사건을 한건도 못 맡는 변호사들이 태반이다. 변호사 급격히 증가한 것은 로스쿨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졸업 하면서 로스쿨 변호사 합격생이 1년에 1500명 가량이 나오고 있다. 이때문에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일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도 많고 빚때문에 자살 하는 변호사도 나올 정도다.
한때 행정기관의 서기관급, 대기업의 부장급 대우를 받으며 입사했던 변호사들은 이제 중하위직인 6급 공무원이나 과장급 대우에도 경쟁이 치열하다.
할리우드 영화 '링컨콘티넬탈을 모는 변호사'는 돈을 벌기위해 링컨을 몰고 허세를 부리며 파렴치범 변호까지 맡는 속물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물론 그는 끝까지 양심을 팔진 않지만 변호사가 흔한 미국에선 고객을 쫓아다니고 소송을 권유하며 세일즈하는 변호사가 수두룩하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의사든 변호사든 자격증이 미래를 보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의사든 변호사든 '빈익빈 부익부'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젠 개업 변호사는 특정분야에 경쟁력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개업의사는 실력과 투자는 기본이고 '환자는 왕'이라는 자세로 서비스정신을 갖춰야 먹고사는 시대가 됐다. 그들만의 '정글'은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다.
/ 네이버 블로그<박상준 인사이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