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아톤>, <지킬 앤 하이드>, ‘조승우 신드롬’ 영화 <말아톤>을 통해 스타로 급부상한 영화배우 조승우. ‘조승우 신드롬’이라고까지 회자되는 그의 인기는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조승우의 누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조서연. 두 사람 모두 1970년대 미남 가수로 이름을 떨쳤던 아버지 조경수로부터 고스란히 그 끼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경수는 1970년대 최헌, 최병걸, 김훈과 더불어 트로트 고고의 4대 천왕으로 간주될 만큼 큰 인기를 누리던 가수였다. ‘아내야’, ‘아쉬움’, ‘행복이란’, 그리고 번안곡 ‘징기스칸’ 등이 그의 대표곡. 방송사 가수왕을 휩쓸 만큼 유명했던 그는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채 조승우가 3살이던 해에 부인과도 이혼하고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죽었다’, ‘폐인이 됐다’, ‘사업 실패 후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 ‘주방장이 되었다’는 등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된 바는 없었다.
그러나 본지 확인 결과 그는 4년 전인 2001년, 2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다만 아들 조승우가 주목받는 배우가 되면서 가급적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주변에도 알리지 않은 채 지내왔다.
처음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상당히 망설였다. 무엇보다 ‘한창 활동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유였다. 그러나 계속된 설득에 서서히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많이 부풀어 떠돌았는데 이러한 뜬소문이 자식들에게 더 누가 될 수 있다고 판단, 이참에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를 찾았을 땐 저녁 7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비교적 넓은 카페는 깨끗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기자는 한눈에도 그가 조승우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웃는 눈매나 입가가 영락없이 조승우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닮았어요?(웃음). 사람들이 제 젊었을 때 모습하고 지금 승우하고 완전히 똑같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나이 먹고 살쪄서 그렇지 걔 나이 땐 나도 그랬으니까. 걔가 혈액형도 날 닮았어요. B형요.”
새로운 돌파구 위해 활동 중단, 그리고 미국행 무엇보다 그가 한창 활동할 당시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떠난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말로 하자면 길어요. 사연도 많구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수 활동에 대한 회의, 믿었던 선배에 대한 배신, 그로 인해 겪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마음고생 등 복합적인 것이었어요. 당시엔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었죠.”
1979년 그는 TBC와 KBS의 가수왕을 수상하고, MBC 가수왕까지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전에 자신이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시상식 당일 몹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시상식날이던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무슨 연유에선지 다른 사람이 수상을 하게 됐다. 당시에는 방송 3사의 가수왕을 모두 수상해야만 콘서트를 열 수 있었는데 그 꿈도 날아간 것이었다.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후배들의 음반을 제작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급기야 아는 선배의 부탁으로 배서해줬던 어음이 부도나는 바람에 그 책임까지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1980년 당시 방 세 개짜리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000만원 정도 할 때였는데 그 일로 그는 2억원 가까운 돈을 피해봤다.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그는 그즈음 아내와도 이혼을 했다. 그에겐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다. 그래서 1982년 7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게 된다.
“이혼 당시 승우는 3살, 서연이는 6살이었어요. 한창 어리광 피우고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나이였던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은 큰 상처였을 거예요. 아이들한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크고 나면 이 아버지를 이해해주리라 믿었어요.”
그는 미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경험 부족 탓인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떠돌았던 소문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워낙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졌던 가수였던 데다가 그룹사운드 출신으로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일을 부탁하는 곳은 늘 많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미국에서도 음악을 하게 되더라구요.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죠. 더 이상 음악 안 한다고 미국까지 갔는데 결국 미국에서도 음악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 고생하면서 음악 할 거면 뭐하러 미국에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다른 걸 하고 싶어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자신이 유명한 가수 출신이 아니었다면 접시 닦기, 식당 서빙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때 잘나가던 가수였는데 이런 걸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선뜻 다른 일을 할 수 없더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니구나. 나도 뭘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의 나를 지우는 데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린 거죠.’
원래 음식 만드는 걸 좋아했던 그에게 주위에서 일식 요리를 배우라고 권했다. 늦은 나이에 낯선 직업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심부름부터 배웠다. 그러기를 2년. 그는 비로소 실력 있는 일식 요리사가 되었다.
그 즈음 신문기사를 통해 아들의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중학교 3학년 때 본 뒤로는 만나지 못했던 아들 승우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보도였다. 신문을 덮은 후 그는 아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무작정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춘향뎐>의 촬영현장인 양수리까지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하필 그때 승우가 임권택 감독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게 아닌가.
“멀리서 촬영하는 것을 봤어요. 아무도 모르게…. 승우가 임 감독에게 혼나는 모습이 가슴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남자가 뭐 그 정도 가지고…. 전 오히려 대견해 보였어요. 실력 있는 감독이 직접 발탁한 배우니 혼나면서 배우는 건 당연한 거죠. 저는 그게 다 앞으로 큰 배우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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