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소음에 대응하는 고요한 현존
과잉과 피상성의 시대, 파견받는 자의 내적 자유를 찾아서
이진현 신부(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네 방에 머물러라. 네 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Abba Moses the Black)
개강을 앞두고 잠시 멈춰 돌아봅니다. “지난밤, 눈감기 전,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지금까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뉴스 알림, 추천 영상, AI가 만들어 낸 정교한 글과 이미지들… 웃음, 감탄, 슬픔, 분노, 진심, 거짓 위로까지. 사실 우리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단지 머물지 못했을 뿐, 넘쳐났고 지나갔고 증발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느낌의 운동’을 파토스(πάθος)라 불렀습니다. 외부로부터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사막의 교부들과 이냐시오 성인은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로 안내합니다. 파토스에 지배당하지 않는 상태, 곧 내적 자유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첫 회칙 《고귀한 인류》에서 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AI와 디지털 플랫폼이 우리의 ‘집단 상상력’(collective imagination)을 심대하게 변형시키고 있으며, “과잉 자극의 문화가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에 대한 피로감·권태감·무관심을 낳고 있다.”(§139) 파토스 과잉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감수성의 마비를 낫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디지털 컨텐츠가 끊임없이 우리의 파토스를 자극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내면의 땅에 서 있어야 하는가?”
묵상 요점 1. 인식: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불 뒤에 고요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 (열왕기상 19,12)
엘리야는 극도의 소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의 연속, 곧 파토스의 폭풍 속에서 그는 "이제 충분합니다"(Enough is enough!) 하고 쓰러졌습니다. 오늘의 디지털 환경이 그러합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주의가 감동적인 것, 즉각적인 것에 끌리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생성형 AI는 몇 초 만에 심금을 울리는 묵상 글을 생산합니다. 지식 생성을 넘어 감동까지 생성되고 있습니다. 기꺼이 ‘말씀’으로까지 받아들일 태세입니다.
회칙은 이것을 바벨 증후군이라 부릅니다. ― 인격의 신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데이터와 성과로 환원하려는 단일 디지털 언어의 자만. (§10) 그러나 회칙에 따르면 AI는 공감을 시뮬레이션할 뿐이며, 자신이 생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핵심 위험은 AI를 인격으로 오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점차 “진정한 인간적 연결을 맺으려는 갈망 자체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100)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선한 천사로 가장한 악한 영의 유혹은 처음에는 위로처럼 느껴진다”고 경고합니다. (§332) AI가 생성하는 ‘감동’이 바로 그러한 외양을 갖습니다. 훌륭해 보이고, 더 뭉클하게 들리며, 때로는 영적 신비감까지 느껴집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불 뒤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묵상 요점 2. 성찰: 아파테이아는 무감각이 아니라 자유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αὐτάρκης 법을 배웠습니다.” (필리 4,11)
바오로의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 자기충만 self-sufficiency, 자족 contentment)는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영신수련에서는 이것을 ‘치우치지 않음’(indifference 불편심)으로 표현합니다. (§23) 여기서 더 큰 Magis 내적 자유가 생겨납니다.
회칙은 이런 자유와 상반된 오늘의 위험을 “더 크게 되지 않고 더 많이 가지는 것”(haiving more without being more, §94)이라고 해석합니다. 수단은 늘어나지만 인간성은 성장하지 않은 채 지능이 거대화되면, 애정·의지·헌신·관계라는 삶의 필수 차원들이 그 그늘에 가려집니다. (§113) 교황에 따르면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취약성을 이용해 시간과 주의를 포획합니다. 이런 ‘주의(attention) 경제’에 대한 회칙의 처방은 디지털 절제(digital sobriety)와 내적 자유를 강화하는 교육입니다. (§170) 교황은 플라톤을 인용하여 “가장 깊은 것들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만,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함께 부싯돌을 쳐야’ 이해의 불꽃이 일어난다”(§140)고 새롭게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아파테이아는 정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출처와 방향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회칙의 표현으로 하면 디지털 문화가 ‘산만함·획일화·지배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내적 자유와 비판적 사유가 성숙하는 공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136)
영신수련의 양심성찰을 따라가 봅시다. 알고리즘이 방향을 정하기 전에, 먼저 멈추고 물어봅시다. “이 움직임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끄는가, 멀어지게 하는가?” 그 이전에 더 깊이 자문해 봅시다. “이런 물음을 떠올리는 내적 고요함이 있는가?”
묵상 요점 3. 파견: 고요한 중심에서 나가는 꾸준한 현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 21-22)
감히 요약하건대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 여정에서 기대하는 열매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우리를 파견하는 것입니다. 파견은 언제나 그분의 숨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파토스 과잉의 세상 안으로 파견됩니다.
회칙은 이 역설 앞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AI 시대에, 우리의 절박한 의무는 깊이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어떤 기계도 대체할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 인간성의 위대함을 사랑으로 수호해야 한다." (§15) 그리고 진정한 교육은 “침묵과 깊은 학습, 독서와 신중한 분석의 리듬”을 통합해야 하며, 디지털이 스스로 제공할 수 없는 것, “신뢰가 충만한 관계 속에서 함께 하는 배움의 시간”을 공동체가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46-147)
우리는 다시 강의실과 연구실로, 사무실과 회의실로, 우리의 일상으로 갑니다. AI가 더 많은 정보, 더 정확하고 더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금, 학생들은 우리에게 지혜는커녕 지식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의미’니 ‘이유’니 하는 진지함마저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마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명언 시리즈’ 정도로 넘쳐나고 가벼워지고 증발해 버립니다. 이런 의미 과잉과 수용의 피상성이란 현실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는 아무리 많은 파토스의 파도가 쳐도 흔들리지 않는, ‘늘 거기에 있는’ 꾸준한 현존일 것입니다. 회칙을 인용하자면, “고요한 중심을 가진 사람만이 소음 속에서도 ‘바벨을 짓는 자’가 아니라 친교의 건설자가 될 수 있습니다.” (§16)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쓸모와 쓰임은 빠르게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 장소에 늘 있었던’ 우리의 현존은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AI가 무엇을 생성하든, 알고리즘이 무엇을 추천하든, 우리가 돌아올 수 있는 내면의 방. 오늘 이 침묵이 우리 각자의 ‘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도 수많은 것들이 저의 파토스를 움직이나이다.
비오니 당신의 아파테이아, 당신의 고요함이 저를 멈추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당신의 파토스, 당신의 불꽃이 저를 움직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제 안에 불어넣어 주소서.
당신의 숨으로 저를 파견하소서.
* 영적 독서: 레오 14세 회칙, 『고귀한 인류 Magnifica humanitas』 (2026.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