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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
그러므로 보살이 비전(秘典)을 용궁에서 찾아냈으며, 대현이 동하(東夏)에 크게 드날렸다.
돌아보니 정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었으니 다행하여라. 상법과 계법의 시대에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으며 더욱이 성주(聖主)를 만났으며 영산(靈山)에 있으면서 생각이 그윽한 종지(宗旨)에 다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是以로 菩薩이 搜祕於龍宮하시고
시이 보살 수비어용궁
大賢이 闡揚於東夏하시니라
대현 천양어동하
顧惟正法之代에도 尚匿清輝러니 幸哉라
고유정법지대 상익청휘 행재
像季之時에 偶斯玄化하고 況逢聖主하며
상계지시 우사현화 황봉성주
得在靈山하야 竭思幽宗하니 豈無慶躍이리요
득재영산 갈사유종 기무경약
제9門,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感慶逢遇]
1,널리 펼치게 된 근본 이유[弘闡源由]]
是以로 菩薩이 搜祕於龍宮하시고 大賢이 闡揚於東夏하시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비전을 용궁에서 찾아냈으며, 대현이 동하에 크게 드날렸다.
2,만난 것을 감격함을 밝히다[正明感遇]
顧惟正法之代에도 尚匿清輝러니 幸哉라 像季之時에 偶斯玄化하고 況逢聖主하며 得在靈山하야 竭思幽宗하니 豈無慶躍이리요
돌아보니 정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었으니 다행하여라. 상법과 계법의 시대에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으며 더욱이 성주를 만났으며 영산에 있으면서 생각이 그윽한 종지에 다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제9門, 感慶逢遇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
감경봉우(感慶逢遇) :화엄경 만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뜻이다. 화엄경 만난 것을 감탄하고 경사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화엄경을 만난 데는 여러가지 인연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도반이 화엄법회에 가자고 해서 왔다든지 어떤 인연으로 만났든지간에 화엄경을 한 번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 감동스럽고 아주 경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1, 弘闡源由
널리 펼치게 된 근본 이유
是以로 菩薩이 搜祕於龍宮하시고 大賢이 闡揚於東夏하시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비전을 용궁에서 찾아냈으며, 대현이 동하에 크게 드날렸다.
*
홍천원유(弘闡源由)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까닭을 널리 열어서 드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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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是以)로 :그러므로
보살(菩薩)이 수비어용궁(搜秘於龍宮)이요 : 보살이 용궁에 비장되어 있는 것을 찾아왔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부처님 열반 5백년 내지 6백년 경에 세상에 드러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화엄경 약찬게’도 ‘용수보살 약찬게’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다 속에는 그 바다를 주재하는 용궁이 있다. 바다 속 용궁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용왕을 데려오듯이, 불법의 큰 바다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가장 요긴하고 가장 중요한 화엄경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다. 불법대해라는 큰 바다가 있다면 총본산이라고 할까 그
중심, 중앙에서 화엄경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8門에서 나온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화엄경은 참으로 항상하고 늘 우주법계에 있는 미묘한 설법이며 어느 세계 어느 시대에든지 다 통하는 큰 법규다. 우리 마음과 성품에 딱 들어맞는 지극한 말씀이고, 부처의 경지를 가르치는 아주 요긴한 궤범이다. 화엄경의 깊고 깊은 뜻을 공부하고 나서 다른 경전을 가만히 살펴보니 마치 맑은 날 태양이 하늘에 떠서 온갖 빛들을 다 빼앗아 버린 것과 같고 수미산이 바다에서 하늘 높이 솟았는데 작은 산들은 전부 그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화엄경의 격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훌륭한 화엄경을 용수보살이 용궁에 비장되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용궁은 전설이 됐든 사실이 됐든 상관없이 바다의 중심에 있다. 불법이라고 하는 드넓은 바다, 태평양 바다보다도 더 넓은 불법대해에 가장 중심자리에서 화엄경을 찾아왔다. 모든 경전들 가운데 화엄경이야말로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을 용수보살이 찾아서 세상에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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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大賢)이: 큰 현인이
천양어동하(闡揚於東夏)로다 : 중국에 크게 날렸다. 큰 현인들이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쪽으로 화엄경을 크게 날리게 되었다. 화엄경은 큰 현인인 실타난타스님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보조를 하면서 인도말로 된 것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동하(東夏)라고 한 것이 중국을 말한다. 천양(闡揚)은 드날리는 것이다. 인도말을 번역해서 중국에 드날리게 되었다.
화엄경을 중국에 처음 번역한 스님은 불타발타라[覺賢]스님이다. 그리고 지엄(智儼)스님, 법업(法業)스님, 일조삼장(日照三藏)스님 이런 분들이 화엄경을 많이 드날렸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 80화엄은 측천무후의 명에 의해 서역에 가서 구해온 화엄경 완질이다. 이것을 실차난타라고 하는 스님이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이 80화엄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기 전에는 신라시대 스님들은 60화엄경 밖에 보지 못했다. 후대에 이 80화엄경 완질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후로는 모두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80화엄경을 보게 되었다.
2, 正明感遇
만난 것을 감격함을 밝히다
顧惟正法之代에도 尚匿清輝러니 幸哉라 像季之時에 偶斯玄化하고 況逢聖主하며 得在靈山하야 竭思幽宗하니 豈無慶躍이리요
돌아보니 정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었으니 다행하여라. 상법과 계법의 시대에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으며 더욱이 성주를 만났으며 영산에 있으면서 생각이 그윽한 종지에 다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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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감우(正明感遇) : 화엄경 만난 것을 감격해 하는 것을 바로 밝힌다. 무엇때문에 화엄경 만난 것이 감동스러운 것인가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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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법지대(顧惟政法之代)에도 : 가만히 돌아보아 생각하건대 정법시대 부처님 당시라 하더라도
상익청휘(尙匿淸輝)러니 : 오히려 맑은 빛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용수보살이 불멸 500년 내지 600년경에 화엄경을 세상에 펼치게 되었다. 그러니 정법 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었다. 화엄의 도리가 제대로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크게 드날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밝은 빛을 숨긴다. 밝은 빛은 감춰지게 마련인데
행재(幸哉)라 :참 다행스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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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지시(像季之時)에 :상법의 끝자락에, 상법과 계법시대에라고도 해석한다.
세존의 열반 후 불교가 어떻게 행해지는가에 따라서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를 나눈다.
정법 시대는 오백 년을 잡는데 세존당시와 똑같은 법이 행해지는 시대다.
상법시대는 천 년을 잡는데 정법과 비슷한 시대다. 계법시대는 만 년을 잡는데 말법시대다.이 학설은 분분하지만 대개 그렇게 친다.
또 금강경에서는 5오백년이라고 해서 해탈견고(解脫堅固) 선정견고(禪定堅固) 다문견고(多聞堅固) 탑사견고(塔寺堅固) 투쟁견고(鬪諍堅固) 등으로 다섯 시대를 오백년씩 잘라서 이야기 하는 설도 있다.
청량스님이 상법의 끝자락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글을 지을 당시의 년대를 보아서 이 화엄경을 만나고 서문을 쓰고, 화엄경의 주서(註序)를 쓰게 된 시기가 상법의 끝자락, 말법시대에 접어드는 때라는 말이다. 지금은 입멸후 2600년, 2700년으로 접어드는 시대니까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사현화(偶斯玄化)하고 :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다. 현화는 아주 깊고 오묘한 교화라는 뜻이다. 불교는 여러 가지 차원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고 중생제도를 한다. 우리가 화엄경으로써 교화를 받는 것은 명품교화다.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깊고 유현하고 오묘한 차원이 높은 교화다. 그동안 접해봐서 알겠지만 불법에 수많은 방편이 있다. 교화의 차원도 여러 단계다. 예를 들어서 유치원생을 상대로 하는 불교가 있는가 하면,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불교가 있고, 중학생을 상대로 하는 불교, 고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불교 등등 별별 차원의 불교가 있다.그런데 이 현화(玄化)라고 하는 것은 가장 높은 박사학위를 한 열 개쯤 받은 뒤에 공부하는 그 높고 현묘한 교화를 만났다는 것이다.
어째서 현묘한 교화인가. 망상과 번뇌를 없애고 선한 일과 복덕을 많이 쌓아서 얻어진 것이 성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차원이 낮은 가르침이다. 현화가 아니다.
화엄경의 입장에서는 참선을 해야 된다거나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거나 번뇌를 제거해야 된다거나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는 등등의 조건에 의한 성불이 아니다.
지음이 없이 짓는 것, 수행을 하되 수행하는 것이 전혀 없는 성불의 법이다. 그래서 현묘한 교화다.
본래의 성불을 드러내고 드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현묘한 교화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안 된다. 차라리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쉽다. 그런데 본성불을 말하고, 사람만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모두 다 성불을 이뤘다고 하는 것이 화엄경의 도리다. 물론 이런 이치를 선종에서도 많이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 높은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역시 이러한 말법시대에 기기묘묘한 이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청량스님의 시대를 이야기 한다면
황봉성주(況逢聖主)하며 : 하물며 성스럽고 밝은 천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물론 측천무후도 포함이 된다. 나라의 천자가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이해하고 뒷받침 해줘야 출가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수행하고 전법하고 포교할 수가 있다.그런데 청량스님은 천자가 불교를 아주 좋아하고 보호하는 시대를 만나 정치적 환경, 사회적 환경이 불교 공부하기에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성주(聖主)는 비로자나 법신부처님이다. 화엄경은 법신부처님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설하신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법신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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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재영산(得在靈山)하야: 영산(靈山)에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마치 부처님 생시에 영축산에 머물면서 가장 교화가 성황을 이루었을 당시에 함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인도에서 부처님이 한참 교화를 많이 해서 그야말로 신도가 수백만 명이 되고 출가한 스님들도 수십만 명이 되어 불법이 성행했을 무렵과 같다.
또 한편 이 문장의 영산은 영축산이 아니라 청량산 즉 오대산을 말하기도 한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산다. 그래서 중국의 청량산이나 우리나라 오대산을 문수도량이라고 한다. 청량국사는 자신이 그 좋은 신령스러운 산, 청량산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화엄경 소초를 집필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사유종(竭思幽宗)하니 : 그윽한 종지, 이 화엄경의 깊은 도리에 내 생각을 다 바칠 수가 있었다.
기무경약(豈無慶躍)이리요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윽한 종지를 다 생각할 수 있게 됐으니 어찌 경사스럽고 기쁘지 아니한가.
뛸 뜻이 기뻐할 일이다. 경약은 경사스러울 경(慶)자에다 뛸 약(躍)자다.
아주 경사스러워서 펄쩍펄쩍 뛸 정도로 이 화엄경 만난 것을 생각하면 감동스럽다는 것이다.
‘내 생각을 그윽한 종지에 다 바칠 수 있으니 내가 얼마나 복이 많고 다행한 사람이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교를 펴고 화엄경을 공부하기 너무 좋다. 내가 있는 이 도량도 너무 좋다. 나는 이 세상에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라는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청량국사는 ‘기무경약(豈無慶躍)가’ 라고 하는 말에 또 주석을 달기를‘만고(萬古)에 득기사소(得其死所)라’‘이 몸 바쳐서 그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기무경약(豈無慶躍)가’ 라고 하는 말 가지고는 부족하다 싶어서
‘이 몸을 바쳐서 내 그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부연 설명한다.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던지 화엄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너무 좋은 것이다.
이보다 더 높은 교화는 우리가 어디 가서 만날 수가 없다.화엄경의 차원보다 더 높은 교화는 이 세상에 도대체 있을 수가 없다. 염불선이 어떻다 비파사나가 어떻다 참선이 어떻다 하는 것은 전부 화엄경 저 아래 수준이다.
그래서 우사현화(偶斯玄化)다. 아주 깊고 오묘한 교화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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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스님이 소에 쓴 그 부연설명이 너무나도 감동스러워서 내가 스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竭思幽宗】者,慶所修也。大方廣佛華嚴經即毘盧遮那之淵府.普賢菩薩之心髓.一切諸佛之所證.一切菩薩之所持.包性相之無遺.圓理智而特出.不入餘人之手.何幸捧而持之.積行菩薩猶迷.何幸探乎幽邃.亡軀得其死.所竭思有其所歸.幸之三也.豈無慶躍結上三也.其猶溺巨海而遇芳舟.墜長空而乘靈鶴.慶躍之至手舞何階.是故感之慶之.唯聖賢之知我也。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 바로 이 화엄경이다[大方廣佛華嚴經即毘盧遮那之淵府]:화엄경 안에 들어가면 비로자나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보현보살의 심장이다[普賢菩薩之心髓]:이 화엄경이 보현보살의 심장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은 일체 제불이 증득한 것이다[一切諸佛之所證] : 모든 깨달은 분들의 그 깨달음의 내용은 모두 다 화엄경의 도리다.
일체보살이 수지한다[一菩薩之所持]:모든 보살들은 전부 화엄경을 수지한다.
화엄경의 도리는 우리 본성과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 남김없이 포함하고 있다[包性相之無遺]:화엄경은 세상의 이치, 인생의 이치와 그 이치를 꿰뚫는 지혜가 다 원융하게 무르녹아 있다.
이치와 지혜는 다르다[圓理智而特出]: 이치가 나의 인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지혜가 된다.
아무 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不入餘人之手]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강원에서 화엄경을 끝까지 다 봤었다. 뒤에 스님들은 현담만 본다든지 나중에는 입법계품만 본다든지, 그것마저도 안 하고 그냥 화엄경을 구경도 안 하고 강원을 졸업하기도 한다. 설사 화엄경을 끝까지 다 봤다한들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이런 것을 우리에게 이끌어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무슨 행운으로 이렇게 화엄경을 받들어 지니고, 비록 서툴지만 강의를 듣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이것은 너무 다행이다[何幸捧而持之]
서문에도 ‘적행보살(積行菩薩)도 폭시린어용문(曝鰓鱗於龍門)이요’하는 표현이 있었다. 수행을 상당히 쌓았다 하는 보살도 화엄경의 도리는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상덕성문(上德聲聞)도 두시청어가회(杜視聽於嘉會)’라는 말도 있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같은 아주 덕이 높은 성문들도 화엄경법회가 있다, 그런 근사한 법회가 이 세상에 있단다 하는 소문만 들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봉사와 같았고 귀머거리와 같았다는 것이다[積行菩薩猶迷]
그런데 청량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무슨 행운으로 이 그윽한 깊은 지취를 찾게 되었는가[何幸探乎幽邃]
그러면서 아주 감동할 만한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亡軀得其死 所竭思有其所歸] :사실은 내가 청량스님의 이 이야기 한마디를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다. 청량스님이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한 것은 그동안 ‘내가 어디서 죽을까? 어디서 죽을까?’ 수십 년 생각하다가 화엄경을 보고 비로소 ‘화엄경에서 죽어야 되겠다, 이 목숨 바쳐 기꺼이 내가 이 화엄경을 공부하다 죽겠다.’ 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 대한 청량스님의 연구서가 제일 많다. 얼마나 화엄경에 감동 했으면
그 죽을 곳을 내가 얻었다.[득기사소(得其死所)]라고 했겠는가. 근사한 표현이다. 그 속에는 모든 의미가 다 포함 되어 있다. 우리나라 고려 때 보조 지눌스님도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지눌스님이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요약한 책이 세 권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눌스님을 보조국사로 부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화엄학자라고 부른다. 화엄경에 대한 연구서가 양적으로 제일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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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에 나온 내용들은 참 중요한 대목이다. ‘이 몸 바쳐 죽을 곳을 얻었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청량스님답다. 여기에서 우리가 청량스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화엄경에 심취하고 그 많은 저술을 남긴 이유를 알 만하다.
나는 평생 스님들 교육에 몸담고 살아왔고, 이쯤 와서 아직 말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많은 스님들과 함께 다시 화엄경 공부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어서 온 힘을 여기에 다 쏟고 있다. 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이야기 난 김에 덧붙인다면 나는 청량스님의 소초 속에 있는 글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탄허스님이 화엄합론을 다 번역하고 나서 원고를 교정할 때 여기 부산에 삼덕사라고 하는 곳에서 교정을 봤는데 그 때 각성스님 통광스님과 같이 교정을 볼 때였다. 나도 숱한 경전을 보았지만 다른 경전을 보다가는 그렇게 눈물 흘린 일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내가 무슨 운명인가 싶은 것이 그 옛날 청량스님이 오대산에서 화엄경을 연구할 때 부목으로 군불이라도 때었던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화엄경 본문, 법화경 본문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데 깨알같이 쓴 청량스님의 화엄소초를 읽다가 눈물을 흘린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사실 조금 엉뚱한 데서 내가 눈물을 흘렸다.
무슨 내용인가 하니, 청량스님이 ‘중생무변서원도’ 하는 사홍서원을 가지고 상(相) 공(空) 성(性)이라고 하는 삼관(三觀)에 배대를 한 내용이다. 삼관은 다른 말로 삼종(三宗)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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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 ‘미혹한 중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꼭 제도해야 한다’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것을 상식적인 가관(假觀)적인 안목이라고 한다. 상종(相宗)의 안목이다.
그런데 한 차원 높이 올라가면 중생은 본래 공한 것이고 부처도 공하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입장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되 본래 공하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관(空觀)적인 안목, 공종(空宗)의 안목이다. 반야심경이 그렇고 금강경이니 600부 반야가 그런 입장이다. 모든 존재가 공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중생을 제도를 한다면 상당히 가볍다. 이렇게 가벼운 공의 견해에서 더 나아가 중도관(中道觀)적인 견해가 있다. 이것은 성종(性宗)의 견해다. ‘본래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삼관과 사홍서원을 배대해서 청량스님이 낱낱이 설명해 놓은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상으로 본다. 그래서 번뇌 역시 무거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미혹하고 번뇌 많고 업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려면 참 힘이 들고 그 번뇌가 끊어질 수가 없다.
번뇌가 공한 줄을 알고 끊어야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번뇌가 곧 보리인 줄 알고 번뇌를 끊어야 된다.
궁극적으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뚜렷이 알고 또 열심히 중생제도를 하는 것이다.
청량스님이 뛰어난 솜씨로 그렇게 써놓은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이런 이치구나.’ 하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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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는 청량스님의 말씀도 감동이다. 다른 사람의 뜻이나 사회적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자기의 능력과 자기 생명을 완전히 연소시킬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참으로 멋진 삶이고 잘 사는 삶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서 이런 저런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인생을 소진해 버리고 세월에 떠밀려 죽는다.
청량스님은 ‘내가 이런 좋은 상황에서 이렇게 깊은 종지를 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경사스럽고 다행하지 아니한가. 내가 이 몸 바쳐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말씀한다. 자기 의지로 자기인생을 완전히 연소시키겠다는 의미로써 ‘내 생명을 연소시킬 장소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화엄경에 대한 애착이고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에 대한 환희심이다. 화엄경에 대한 청량스님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첫댓글 고맙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나무대방광불 화엄경 나무대방광불 화엄경 나무대방광불 화엄경 () .
고맙습니다 _()()()_
感慶逢遇/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
偶斯玄化/아주 깊고 오묘한 교화.지음이 없이 짓는 것, 수행을 하되 수행하는 것이 전혀 없는 성불의 법이다.
그래서 현묘한 교화다. 본래의 성불을 드러내고 드날리는 것이다.고맙습니다_()()()_
이몸바쳐 할수있는 일을 찾아 공부하고 헌신 하겠음을 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_()()()_
感慶逢遇...._()()()_
화엄경 공부할수 있어서대단히 고맙습니다.
華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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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 바로 이 화엄경...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는 청량스님...
고맙습니다....혜명화 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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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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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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