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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상엔 별별 온갖 물건이 다 있는데 왜 와이퍼가 있는 고글을 안 만들었을까?”
“그러게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데….”
“근데 지금 얼굴에 흐르는 게 땀이냐, 빗물이냐?”
우리말 관용 어구 중 ‘비 맞은 중’이란 표현이 있다. 스님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으나 혼잣말로 궁시렁궁시렁 중얼거리는 모양새를 비꼬아 흔히 비 맞은 중처럼 중중거린다고 표현한다.
집단 가출 자전거전국일주 제9차 투어(변산-함평)에서 가출 멤버들은 모두 ‘비 맞은 중’이 되었다.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리면서도 저마다 상대도 없는 공허한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해댄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출발점인 전북 부안군 변산면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더 굵어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밀려 사선을 그리며 흩뿌리는 빗줄기가 목덜미에 닿자 한기에 소름이 좍 돋는다.
차에 싣기 위해 떼어놓았던 자전거 바퀴를 조립하는 멤버들의 손길이 학교가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이 마지못해 책가방을 챙기듯 굼뜨다. 모두들 곁눈질로 허영만 대장의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대장의 입에서 ‘오늘은 날씨가 나빠 라이딩 포기’라는 말이 떨어질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방수재킷을 꼼꼼히 챙겨 입은 대장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저 자전거에 올라타 출발했고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대원들이 뒤를 이었다.
우중(雨中) 라이딩은 처량하고 꿉꿉했다. 출발하자마자 얼굴이 젖었고 이어서 장갑이 질척해진다. 설상가상 젖은 노면을 구르는 바퀴에서 튀어오른 빗물이 엉덩이와 신발까지 흠뻑 적셨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힘들 뿐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게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잔뜩 움츠린 채 어기적거리며 페달링을 하던 대원들은 고갯길로 접어들며 몸에서 열이 나자 평소처럼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고글이 뿌옇게 되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고글을 쓰고 있자니 렌즈에 빗물이 묻어 앞이 잘 안 보이고, 벗으면 빗방울이 눈으로 직접 들어와 역시 시야 확보가 어렵다.
아뿔싸, 길 잘못 들었네!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전거 행렬은 비 내리는 변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736번도로를 허위허위 달려간다. 앞사람의 뒷바퀴에서 튀는 물방울은 간격을 띄우면 피할 수 있었으나 내 자전거의 앞바퀴에서 수직으로 솟구치는 물은 피할 길이 없다.
두 번째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길을 쏟아져내려가다 나타난 이정표를 보고 필자는 속으로 비명을 지를 만큼 놀랐다. 남여치. 원래 계획한 코스는 변산을 왼쪽에 두고 달려 마동삼거리를 거쳐 곰소항으로 진출하는 것이었으나 엉뚱한 곳이 나타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사포를 지나 마포삼거리에서 좌회전했어야 했는데 한발 앞서 변산면사무소에서 좌회전해 버렸다.
공교롭게도 가야 할 길과 잘못 든 길의 도로 번호가 같아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짙은 안개 속에서 들머리를 놓쳐버린 것이다.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자전거 여행이 꼭 특정한 길로 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문제가 심각한 것이, 이 잘못 든 길은 부안의 명소 곰소항을 들르지 못하고 줄포로 가버린다는 점. 게다가 주행거리도 2배 이상 길다.
팀의 내비게이터로서 코스를 잡아가는 역할을 하는 필자로서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아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쫄딱 젖은 채 이를 악물고 달리는 멤버들의 얼굴을 보자 ‘이 길이 아닌개벼’라는 얘기를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잘못 든 길을 돌아갈 수도 없어, 마오쩌뚱의 어록에 나오는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天要下雨 娘要嫁人 由他去)’를 떠올리며 영문도 모른 채 엉뚱한 코스로 접어든 멤버들을 이끌고 어쩔 도리 없이 내쳐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