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요3대사찰♧
통도사(通度寺)
<위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연혁> 646년(신라 선덕여왕 15)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여 산 이름을 영축산, 절 이름을 통도사(通道寺)라고 했다.
자장이 통도사라고 부른 것은 첫째,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한다는 뜻이며 둘째,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고 셋째, 산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사실 자장이 쌓은 계단(械壇)은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득도시켜 통도사가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서의 초석을 마련했다.
통도사는 또한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불보사찰(佛寶寺刹)로 통한다. 창건주 자장이 643년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통도사를 창건했기 때문이며, 봉안된 불보(佛寶)로 인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절로서 부각됐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들 만큼 대규모로 중축했다.
1592년 조선 선조에 이르러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어가자 의승장 사명 유정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청허 휴정에게 보냈다. 휴정은 "계를 지키지 않은 자는 오직 금은 보화에만 관심이 있다"며 1함을 다시 통도사로 돌려보낸적도 있다. 이 때 금강계단 앞 대웅전이 전소되기도 했으나, 1654년 (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로는 통도사국장생석표(通道寺國長生石標), 통도사극락전(通道寺極樂殿), 통도사대광명전(通道寺大光明殿),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通道寺大光明殿三身佛圖), 통도사만세루(通度寺萬歲褸), 통도사명부전(通道寺冥府殿), 통도사삼층석탑(通道寺三層石塔), 통도사석등(通道寺石燈), 통도사약사전(通道寺藥師殿) 등이 있다.
해인사
<위 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가야산(伽倻山) 서남쪽 기슭
<소 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연 혁> 통도사(불보사찰)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선원, 강원, 율원을 함께 갖춘 총림이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800-809)때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돌아온 순응(順應)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다 창건에 착수했으며 순응의 뒤를 이어 이정(利貞)이 완성했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부설기관으로 1993년에 설립한 '장경연구소'가 있고 문화재로는 팔만대장경(국보 32호) 장경판고(국보제52호) 석조여래입상(보물제264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제528호) 반야사 원경대사비(보물 제128호)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 선수희언 각성 등이 있다, 또한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희랑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해인사가는 길>
<숙박시설>
송광사(松廣寺)
<위치>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신평리 2번지 조계산(曹溪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연혁> 신라 말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이 창건하여 길상사라고 불렀다. 1200년(신종 3) 보조(普照) 국사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에 옮겨 와 11년 동안 머물며 수많은 대중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큰 수도도량이 되었다.
지눌은 1182년(명종 12) 도반스님과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했다. 그 뒤 1188년 봄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결사 동지들을 모은 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정진하다가 이 절로 다시 옮겨왔다. 그 뒤 즉위하기 전부터 지눌을 존경했던 희종(재위 1204-1211)은 송광산(松廣山)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고쳐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다. 1210년(희종 6) 지눌이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의 제자 진각 혜심(眞覺 慧諶)이 왕명으로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고, 이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5명의 국사가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 왔다. 따라서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三寶)사찰 중 승보(僧寶)사찰로 불려지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 임경당(臨鏡堂), 보조암(普照庵), 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으며,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절을 떠나 한 때 폐사가 되다시피 했다. 이에 응선(應善)은 불 탄 건물을 중건한 뒤 지리산에 있던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를 모셨다. 선수는 제자 400여 명을 거느리고 이 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그 외의 건물도 보수했다. 그 뒤 600여 명의 승려들이 선수를 모시고 동안거를 성대히 치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유적.유물> 대웅전을 중심으로 설법전, 수선사, 상사당(上舍堂),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응진전, 국사전(국보 제56호), 진영각, 약사전(보물 제302호), 영산전(보물 제303호), 관음전, 명부전, 화엄전, 청량각(淸凉閣), 일주문, 척주각(滌珠閣), 세월각(洗月閣), 우화각(羽化閣),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大藏殿), 종고루(鐘鼓樓), 법왕문 등이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유물들은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을 비롯하여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 노비첩(奴婢帖; 보물 제572호),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경질(經帙; 보물 제134호),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자정국사사리함(慈靜國師舍利函;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 능견난사(能見難思;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고려문서, 금강저(金剛杵;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願佛;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 묘법연화경찬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