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우리 나라 음주문화의 변천사
선조들의
음주문화(선사시대 ~ 조선시대)
고대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그리고 삼한의 농경의례등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식에는 마을 단위로 술을 빚어 음주와 가무를 한 기록이 있다. 식량이 남지
않는 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술을 제조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에는 일종의 종교행사로 추수 후에 전체 백성이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았던 것 같다.
삼국 시대에는 귀족 중심으로 술이 자가 제조, 소비되는 형태였다가 후기에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술을 판매하는 업소가 생긴 것 같다.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던 기생 천관녀의 집에 대한 이야기는 신라시대에 귀족들대상의 술집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백제의 의자왕은
삼천 궁녀와 주지육림(酒池肉淋) 속에서 노닐었는데 결국 국가를 망하게 하였다. 이때의 음주 문화는 귀족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의 원효대사 이야기로 볼 때 특수계층이 아닌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도 생긴 것 같다. 원효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서민들과 어울렸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비단 승려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도 당시 그런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허무 속에서의 술(1910~1960)
1910년 한일 합방 후 우리나라의 식자들은 나라를 잃은 우울과 통분을
삭히는 술을 마셨다. 문예지 '폐허'의 동인이었던 변영로 선생의 명정 사십년의 한 구절을 보면 당시 식자들의 음주 문화를 엿볼수
있다. “나는 거의 술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울고불고 몸부림칠 까닭은 추호도 없고,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나의 여생이 얼마나 될지, 변절을 개자식이나 돼지 손자로 아는 이상, 끝끝내 한결같이 마시고 마시고, 꽃꺽어 산(算)
놓고 또 마시다가 마지막 날 도래할 때 의사나 용사처럼 기꺼이 죽을 뿐이다.”
1909년 한일 합방 전해에 주세령을 시행했다. 일제는 1916년부터 강제 단속을 시작했는데, 이른바 '술 상감'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전통가(家)양주를 말살시켰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술은 개량식 약주 및 막걸리,그리고 소주로 획일화되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술 마실 기회도 줄어들었다. 또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우리나라의 명절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으므로 조선
시대의 음주 문화도 이때 단절된 듯하다.
해방 후 미군의 주둔과 6.25를 통하여 서양술이 선보였고, 이로 인하여 부유층들은 고급 양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서민들은 집에서
술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의 명주들은 사라지고 획일적인 개량식 막걸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6.25 이후에도 백성들은 정치적
불안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때의 술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같다. 김진섭씨의 주찬(酒讚)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술의 다른 이름을 소수소(掃愁簫)라 함은 실로 지당한 명명이니, 한잔을 마신 우리는 근심을 잊고 속취를 벗는다. (중략)
이리하여 우리가 이 각박한 현실의 한없는 근심과 괴로움,그리고 뜻과 같지 않은(不如意) 속에 살되 언제든지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술의 위대한 은택(恩澤)이어니와, 우울의 안개가 자욱한 이 세상에서 술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다.”
당시의 술은 시름을 달래 주는 약이었나 보다. 시름의 장에는 모든 격식이 사라진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와 서민들의 흥, 그리고
엄격한 취기 조절 등의 전통 음주 문화는 이렇게 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취함의 시대(60~70년대)
경제 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던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분이 송두리째 변혁을 겪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하였으며 의식주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 농경 문화에서 도시 산업사회 문화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바빠지고 평가 기준은
능률이나 돈이 되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걷잡을 수 없이 들어온 미국식 문화도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와중에 음주 문화도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면 단위마다 막걸리
양조장이 들어서고 생산량이 해마다 늘었다. 1965년부터는 정부의 양곡 정책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물을 술의 원료로 쓸 수
없게 되어 희석식 소주가 대량 공급되었다. 서민들은 소주를 주로 마시게 되었으며 점차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각종 행사에 술을
넘치도록 내놓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폭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음주 문화는 짧은 시간에 술을 연거푸 들이키는 형태로 바뀌었다. 한편 전통적
가치관이 힘을 잃어 가면서 술 취한 후의 행동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대해졌다. 조선 시대의 술좌석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도
아무런 제재없이 행해졌다.
매스컴을 통한 술의 광고나 선전 활동도 사람들의 폭주에 많은 기여를 한 것 같다. 술 마시는 것에 대한 제약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대민 정책 중 하나에는 '술 마시고 심각한 정치 문제는 잊어 버리라'는 것도 있었다. 주세에 있어서 막걸리와 소주는
서민의 술로 취급을 해왔다. 70년대 초반 히트를 친 '한잔의 술'이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당시 음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걱정을 쓸어버리자는 것이었다. 급작스레 단절되어 가는 전통의 가치관과 새시대의 문화적
충격 속에서 생기는 고민을 술로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통음이 필요했나 보다. 당시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술이 어떻게 비쳤을까?
마시면 취하는 것이었을까, 취하면 골치 아픈 일을 잊는 것이었을까. 70년대 중반 대학의 체육행사나 축제 등에 술이 널려 있었다.
누구나 술을 마시는 게 인사처럼 되었고 그것도 빨리 많이 마시는 게 잘하는 것인 양 여겨졌다. 바로 앞 세대의 사람들은 먹는
것이 충분치 않아 실컷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대적 보상 심리에서였을까.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경기 호황의 붐을 타고
사업상 술을 마셨다. 팽창되는 인력 수요와 일감을 맞추기위하여 늦게까지 일하고 나서 짧은 시간에 술을 마셔야 되기 때문이었나
보다. 더구나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아침 4시까지 통행 금지였는데 이것이 폭음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들 중 반체제 인사들은 군사독제에 항거하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마치 일제 시대의 우국지사들이 느꼈던 것 같은 분노를
삭이기 위하여 술을 폭음했다. 저항인들의 대변자들이었던 소위 창비 문인들은 하루에 소주 2~3병 마시는 것이 일상사였다 한다.
이때 주로 마시던 술은 막걸리, 소주였다. 70년대 말에는 맥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통 주막과 소주집에서 서구화된 맥주집이
늘어났고 가정 소비도 꾸준히 늘었다. 60~70년대는 경제 도약과 더불어 술을 마구잡이로 마신 취함의 시대라 생각된다.
접대 음주시대(80년대)
80년대에 들어 대중주인 막걸리의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맥주의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진, 보드카 및 위스키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 특히 이때의 특징은 주류 소비의 고급화가 진행되었고 접대주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고급 술집은 삼국시대로부터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곳에서 권세가들이 정치적 담론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흥을 즐겼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이런 식의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특수 계층만 드나들던 고급 술집에 대중이 드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제반 법규정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성취에 대한 사회 문화적인 뒷받침이 없어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파생된 것이 바로 비뚤어진 접대 문화가 아닌가.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일이 처리되지 않으니 향응을
베풀어 뒷거래를 하여 일을 성사시키기 위함이다. 접대주는 최고의 술과 최고의 서비스를 요한다. 따라서 당시 최고의 술이던 위스키와
접대부의 수요가 급증했다. 접대부 조달을 싸고 인신매매가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에는 룸살롱, 스탠드
바, 카페 등의 업태가 많이 늘었다. 이 모든 업태에는 접대 여성이 들끓었다.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한국인들의 문화가
크게 변화했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6.29 선언으로 군사 독재가 크게 약화되어 국민들의 요구는 거세졌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근검절약의 미덕은 절벽같은 절망에 부딪치게 되었다. 근로자들은 더 이상 양순한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올림픽 이후 사회
개방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은 소비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음주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무절제한 폭음을 일삼았다. 주류 판매 업소는 더욱더 고급화 , 대형화되었다. 사람들은 술의 참맛을 즐기기보다는
술을 통해 허영과 과시를 드러내기 위해 음주를 하였다. 80년대의 음주문화는
거품에 들뜬 사회가 만들어 낸 뭔가 비뚤어진 허구였다.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사에서 가장 퇴락한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신 음주문화의 형성(90년대)
9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1991년
주류의 수입 개방으로 세계의 술이 밀려왔다.
고급 위스키나 브랜디로부터 값싼 와인과 맥주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사람들은 세계 유수의 술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편 해외 여행의 자유화로 사람들이 세계 각지의 음주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즉 우리의 음주 문화도 세계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여년간 성장과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 온 한국 국민들은 점차 환경과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食)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음식에 대한 인식이 양에서 질로, 영양에서 다이어트로 변화하였다. 술을 마실 때도 건강을 생각해서
덜 마시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마이카 붐(my car boom)도 한 몫을 하고 있다. 90년대에 불어닥친 마이카 붐으로 1995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이
주차장으로 변화했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음주와 운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음주운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결과이다.
정부의 주류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1996년 모든 술에는 건강에 대한 경고 문구를 기재하도록 국민건강증진법에 규정하였다.1993년에는
알코올 농도가 17% 이상인 술은 전파 매체(TV나 Radio)를 통한 광고 선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밖에 주류 판매업소
영업시간의 제한 등 주류의 과소비를 진정시킬 수 있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황으로 말미암아 소위 거품
경기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실속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주류 판매업태도 룸살롱에서 좀더 개방적이고 저렴한 형태로 많이 이전되고
있으며, 접대부의 고용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