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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를 꽃이 되게 하는 치유의 시
박 희 용
김재순 시집 『그대 선잠이 좀 더 깊어지도록』에 수록된 52편의 시에는 할머니, 어머니, 젊은 여인, 늙은 남자, 젊은 남자, 나, 아이들 등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미호, 고양이, 발바리와 산수유나무, 낡은 집 등이 막간으로 등장하며 저마다의 사연을 간절하게 하소연하며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 있다.
등장인물이 다양한 것은 곧 시인의 시선과 관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몇 가지 사물이나 현상을 중심으로 좁은 관점의 자기 시 세계를 펼친다. 원로급 시인들 중에는 한두 가지 주제를 수십 년 동안 우려먹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시들이 대동소이, 그렇고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경우는 휴머니즘이라는 한 통로를 통해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전개한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인간상마다 내포하고 있는 정한과 의미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어 현실감이 중후하다. 시인이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상황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과장이나 꾸밈이 없다. 그래서 울림이 크다.
이 땅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여인들의 종합적인 모습인 할머니에 대한 시가 17편으로 28%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어머니가 9번 등장하며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아흔이 넘은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효심이 날이 갈수록 애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이 시집에서 할머니들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에구, 나라가 왜 저래
애들이 기가 막히네
-삼대(삼대)- 중에서
아프리카 니제르 어느 마을의 소녀 엄마와 기아에 스러져가는 갓난쟁이를 보는 할머니의 시각은 대뜸 ‘나라’이다. 나라 없는 설움과, 있어도 무기력한 나라의 간고함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나라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지식이나 논리 이전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자유냐 빵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빵을 선택할 것이다.
죽기 전에 꼭 오고 싶었을 조국이라는 이곳
이제는 경제대국이라는데
조국의 겨울은 아직도 왜 이리 춥고 아득한가
영하 십 도가 넘는 빙판길을 폐지 몇 장 실은
유모차에 의지해 미끄러질 듯 미끄러질 듯
혹한의 아침, 눈길을 가는 할머니
- 연변에서 오신 할머니- 중에서
아비 등에 업혀 만주 땅에 갔다가 수구초심에 따라 늙어서 조국 땅에 돌아온 할머니의 삶은 여전히 안온하지 못하다.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라고 조국은 화려하지만 늙어 귀국한 조선족 할머니에게는 낯선 땅이다. 영하 십 도의 빙판길을 폐지 실은 유모차로 쏘다녀야만 겨우 일상을 이을 수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까. 그것은 빈익빈 부익부, 빈자들은 하루살이에 바빠 저축을 할 수 없지만, 부자들은 거대한 부가 계속해서 부를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 확대재생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부가 부자집 곳간에만 쌓여있기만 할 뿐, 아래 계급으로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다. 부가 늘어나는 것만큼 생산 활동에 투자하고 세금을 많이 낸다면 그 부의 물줄기가 서민대중들에게 흘러내려 가고, 그 끝 가느다란 한 줄기가 이 할머니에게도 가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맑은 하천 옆으로 펼쳐진
논과 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누구인가
저 작은 집의 것이라고
쪼그라든 할머니들의 것이라고
어느 문서가 말을 해줄까
- 어느 절 아래 마을에서 – 중에서
현대에는 대폭 줄었지만 옛날에는 절 아래마을 사하촌은 누대에 걸쳐 위 큰 절의 토지를 소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큰 절들은 넓은 토지와 삼림을 소유하고 있다. 국가의 보조금과 관람료 등도 있지만 토지와 삼림에서 나오는 수입이 상당하다.
이 시 <어느 절 아래 마을에서>는 사찰 소유 토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조선조 때는 토지와 삼림 대부분이 왕의 소유였기 때문에 왕실의 원찰 등 갖가지 이유로 기증을 받았겠지만 인근에 사는 할머니 신도들의 시주로 된 토지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대로 손 모으고 무릎을 꿇고 불전함을 채웠을/ 기원과 공덕은/ 어디서 날개를 접었나’이다. 풍경 소리와 범종 소리는 사하촌에 매일 내려오지만 기원과 공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쌀이든 돈이든 토지든 시주한 것만큼 보답을 못 받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거짓말쟁이인가? 풍경 소리와 범종 소리는 사하촌 민초들의 각성을 마비시키는 자장가인가? 설마 그렇기야 하겠느냐만 ‘대대로’, 너무 오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은 기복 불교, 확대하여 기복 종교에 대한 회의와 각성에까지 이어진다. 오늘날 절과 교회가 나날이 거대화하고 있다. 그러한 거대 종교시설들이 과연 민초들의 소박한 기원과 공덕에 걸맞을까? 절과 교회가 웅장할수록 부처님과 하나님이 웅장하실까? 그리하여 기원하는 민초들마다에 웅장한 보답을 안겨주실까?
김재순 시인의 이 시 <어느 절 아래 마을에서>는 절로 대표되는 여러 종교의 본질과 영향에 대한 의문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느 사람들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성토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인이 사하촌 할머니로 대표되는 큰 절 주변 백성들의 애로와 의문을 대변했는가. 절간을 찾아 정적과 참선의 운치를 노래했지 어디 사하촌 민초들의 애환을 조금이라도 언급했는가.
저리 삘거벗고 댕긴 게 타서 그렇지
쥐어박듯이 한마디 날리는 어머니
이른 봄부터 들판에 사는 고향 이웃들
늦가을이면 이빨만 하얗게 보이던 모습과
아프리카 사람을 동일시하는 어머니
-타서 그럴 뿐 – 중에서
온종일 들판에 사는 고향 이웃들과 아프리카 시골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다. 단지 사는 곳과 환경이 달라서 피부 색깔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한국 사람들도 겨울이 없이 일 년 내내 밖에서 일만 한다면 몇 대 안 가서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새까만 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피부 색깔로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가. 마찬가지로 농민과 노동자들처럼 온종일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진 구리색 피부와 쾌적한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희멀건 피부를 차별하는 것도 일종의 인종차별이다. 구리빛 피부들은 ‘삘거벗고 댕긴 게 타서 그렇지’가 아니라 ‘하루 종일 열심히 몸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우우우, 거센 바람을 넘어뜨리며
할머니가 나간 곳은
종이박스 플라스틱 용기들이
쓰러진 거리
깨지고 찢어진 폐품들을 성모처럼
안아서 유모차에 싣는 할머니
- 할머니 장군 – 중에서
많은 사람이 폐품을 줍는 할머니를 불쌍하게 보지만 시인은 ‘장군’으로 본다. 시인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넘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나타나 용돈 벌이 폐품 수집을 하는 할머니를 장한 어른으로 대접한다. 그 할머니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꿈을 갖고 이 작업을 하고 있다. 비록 작은 벌이지만 번 돈으로 일용품을 사거나 손주들 용돈을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운동도 되고 거리 청소도 되니 일석삼조가 아닌가. 이렇게 크든 작든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세상의 한 구석진 곳을 유지하고 있다. 폐품을 줍는 할머니의 손길이 하찮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손길에 머무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다.
텃밭머리에 쪼그려 앉은
사람인가
희뿌연 더벅머리 산발하고 손짓한다
음마야
어릴 때 본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
한발 물러서다 다시 보니
백 살이 된 이웃 아지매와
아흔이 넘은 내 어머니다
- 고향마을- 중에서
어둑한 대문 밖을 서성였을 할머니도 떠나고
기진맥진 집도 주저앉는데
개나리꽃 앵두꽃 온갖 풀꽃들 우르르 달려가
쓰러지는 집을 부축하네
구석구석 꽃등을 거네
- 마당에 꽃만 가득 – 중에서
오랜만에 걷는 고향 마을 골목길 구불구불 돌아 문득 나타나는 희뿌연 더벅머리 할머니 둘, “음마야”, 순간 깜짝 놀라지만 백 살 이웃 아지매와 아흔 살 어머니,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이다. 검은 머리 찰랑이던 아지매와 어머니는 사라지고 전설의 고향 모습으로 비치는 고향 마을 모습은 애잔한 슬픔이다. 사람이 늙고 집이 늙고 고향 마을이 늙었다. 사람 소리와 아이들 소리로 소란스럽던 고향 마을은 사라지고 듬성듬성 퇴락한 빈집마다 주인이 남기고 간 살림살이들이 소품처럼 놓였다.
현대문명이 발달할수록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고향 마을이다. 도시에 사는 40대 이상 사람들 대부분은 농어촌이 고향이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직 고향을 지키고 있다. 부모들 대부분은 80대 이상이고, 아버지들은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호호백발 어머니들이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고향 마을 고향 집도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빈집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한때는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가족을 거느리고 살았을 고향 집에 개나리꽃, 앵두꽃, 부추꽃들만 남아 떠나간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대를 잇는 법. 어머니들이 사라지면 다시 어머니들이 나타날 것이다. 도시로 갈 사람들은 가고 남은 사람들과 귀촌인들은 빈집을 들어내고 집터를 다스린 다음에 새집을 지어 새로운 가족사를 시작할 것이다. 도시가 아무리 발달해도 농촌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시가 풍기는 매력에도 한계가 있다. 도시 문명에도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드러날 때쯤이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는 인간의 대열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손자 굶겨 죽이겠소
에미 애비 없는 아이요, 오늘도 울면서 학교에 갔소
손자를 꺼내 들자 슬픔은 차르르 쏟아지고
낡은 몸은 팔팔 푸른 줄기를 세웁니다
- 마지막 잎새 – 중에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위대하지만 할머니는 더 위대하다. 어머니의 몫을 다하고 이제 좀 편히 살려고 하는 때에 덜컥 맡게 된 손자. 사연이야 어찌하든지 간에 당장 할머니가 보살피지 않으면 손자는 살 수 없다. ‘산꼭대기에도 화곡이 풍성한 나의 조국’은 다행히 생계비를 보조해 주지만 그것은 풀꽃 한 포기 정도일 뿐이고, 워낙 가난하다 보니 손자는 배고파 울면서 학교에 갔다.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치 북한이나 아프리카와 같은 이런 현실이 세계 10위 권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에 있을까?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돌려 낮은 세상을 본다면 우리나라 사회 곳곳에 이런 딱한 형편이 즐비한 것을 알 수 있다. 생활고에 지쳐 남모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가끔 나오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뭄이 아무리 깊어도 ‘낡은 몸은 펄펄 푸른 줄기를 세우며’, ‘가랑가랑, 어린 손자 쥐며’ 한 백 년, 눈보라의 밤길을 걸어간다. 어머니의 손길에 자식들이 자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할머니의 손길에 의해 손주들이 자란다. 그렇게 가족사는 대를 잇는다.
내가
수저로 찍어 먹고 긁어먹어서
더 이상 발라먹을 게 없어지자
짜증부리고 눈 흘기다가
문득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네
그래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파먹으면 되겠네
- 끝까지 파먹다 – 중에서
현관을 나서며 늘
너는 밥 있나
고개만 끄덕끄덕
니 혼차 두고 나만 가서 우예나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엄마가 일요일도 갔으면 좋겠어
아니 거기서 살면 좋겟어
튀어나오는 패륜을 쳐내며
조심히 내려가서, 손을 잡는다
- 차이 – 중에서
아흔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딸의 심리가 담백하게 표현되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리는 법, 사람과 사람,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효행록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하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는 자식이 있을까? 아마 드물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다. 효자들은 효성 7할 불만 3할 정도일 것이고 불효자들은 효성 3할 불만 7할 정도일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자식들은 50%를 두고 효성과 불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잘 한 일 중에 하나는 요양보험제도를 완비한 것이다.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동안 각 가정마다 애환과 고통이었던 노인 요양 문제를 요양보험제도가 해결해 줌으로써 각 가정의 노인들의 노환에 대처한 방법론에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제 노쇠한 어른들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흉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노인들도 극도로 쇠약하면 자녀들에게 부담 지우지 않고 요양원에 가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딸은 ‘엄마가 일요일에도 갔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니 혼차 두고 나만 가면 우예나” 걱정이다. 이 차이를 번쩍 깨달은 딸은 ‘튀어나오는 패륜을 쳐내며/ 조심히 내려가셔, 손을 잡는다’. 그러면서 언젠가 올 ‘오고 가는 보호 차량들을 기웃거리며/ 눈물 쏟게 하는 날이 울 수도 있겠지’, 멀지 않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조용히 상념에 젖는다. 그 상념의 끝에서 지금까지 내가 찍어 먹고 긁어먹어서 ‘뼈대와 껍질만 남은 어머니’의 아흔이 넘는 나이가 새롭게 보인다. 아흔의 나이가 쓸데없는 헌 옷이 아니라 ‘단단한 생명의 추’가 되어 ‘내게로 늘어질 수 있도록’ 바라며 기운을 차린다. 그리하여 튀어나오는 패륜을 가볍게 쳐내고 계속해서 효녀가 된다.
할머니 다음으로 이 시집의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은 나와 젊은 여인들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 어떤 모습으로 자기 삶을 표현할까.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세월호 때문에 악을 쓰며 싸우는 페친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밥을 먹었다, 순간
솟구치는 맑은 물줄기
4년이나 파 내려가던 암반이 트였다
- 사람이 되어갔다 – 중에서
열여덟 살 고2 자식을 졸지에 잃은, 그것도 캄캄한 배 속에서 차오르는 바닷물을 보며 절규에 절규를 하며 죽어간 아이를 둔 가족들이야 십 년 이십 년을 두고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이들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 역시 4년 동안 검은 리본, 노란 리본을 접어서 일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지만 유명 영화의 한 장면처럼 봤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순간, 세월호 아이들과 가족들과 일심동체가 됨을 느끼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시인은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나 우리 사회 현실은 슬프게도 세월호가 침몰할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얼마 전에도 이태원에서 즐겁게 휴일을 즐기던 사람들이 157명이나 어처구니없이 압사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땅 곳곳 도로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로 연간 수천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곳곳의 산업현장에서는 안전사고가 빈발하여 연간 수천 명의 사상자가 생긴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기억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일상을 흘러간다. 시는 이러한 각종 사고 앞에 무력하다. 사후에 단지 운문으로 된 추도사 몇 줄을 붙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의 ‘솟구치는 맑은 물줄기’처럼 만인의 물줄기가 트인다면, 사고도 좀 숙질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여수에 갔을 때는
거기 붙어살고 싶었다
가끔 가녀린 파도 몇 줄기 뛰어들 수 있는 산자락
낮은 집 마당에 노란 플라스틱 의자 하나
바다를 향해 놓고 오지 않는
여객선을 기다리고 싶었다
- 여수에 갔었다 – 중에서
오래전 여수에 갔을 때는 우민화정책 유언비어 교육으로 전라도를 되게 무서워 한 시인은 이제 전라도를 이해하고 여수를 사랑한다. 영호남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려는 자들은 참 나쁘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나라 전체 모든 국민이 영남의 국힘당과 호남의 민주당 두 쪽으로 확연히 갈라져서 갈등 중이다. 양 지역 출신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국민분열을 조장하여 정치적 이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인에게 전라도 여수는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 노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여수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멍 때리는 시간을 그리워한다. 마찬가지로 호남의 어느 시인도 영남의 어느 곳인가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게 감성이 승한 시인들이 먼저 서로를 그리워함으로써 영호남을 둘러싼 지역감정의 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반대로 정략에 이용되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시를 쓰거나 정치적 발언과 정치적 활동을 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다. 삿된 정치꾼일 뿐이다. 특히 시를 이용하여, 유명세를 이용하여 권력이 빌붙어 관직이나 관변단체 감투를 쓴 자들은 이미 시인, 문인이 아니다. 시를 더럽히는 매시꾼일 뿐이다. 정치꾼 형 시인들이 내노라 설치는 소란스런 세상에 시인의 한 편 시 <여수에 갔었다>는 참된 시인의 마음과 옳은 시인이 지향해야 할 나라 사랑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몇 잔 술을 마신
옥이의 춤과 노래는
김세레나보다도 주현미보다도
나는 더 좋아
또 우는 옥이, 엎드려 우는 그의 등에
내 손을 대고 나도 함께 가끔 울지만
서로 이유는 묻지 않는다
수면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그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동안
우리의 사연도 비슷했으리라
어쩌면 같은 문양은 없으리라
-옥이네 집 근처 공원에서 – 중에서
두 여인의 슬픔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른다. 남자들의 삶은 수면 위의 파도처럼 이리저리 거칠지만 여인들의 삶은 수면 아래에 조용히 흐른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조용한 게 아니다. 파도 대신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그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동안’ 함께 늙어가는 두 여인은 사연도 비슷하다. 그러나 같은 문양은 없다. 우는 옥이의 등에 손을 대고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는 시인 역시 평온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옥이의 노래와 울음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세상에 어디 하루 종일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물며 오랜 시간 동안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있는 불행은 지긋이 누르고 없는 행복은 지긋이 당기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지 어디 아등바등 행복을 가까이하고 불행을 멀리하려 한다고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가. 그리하여 ‘지리멸멸한 개인사는 온전히 묻어두며’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다. 몇 잔 술과 노래 그리고 울음은 옥이와 시인의 슬픔을 말갛게 세척하여 다시 그들로 하여금 일상의 굴레에 든든하게 서도록 한다.
자식이 없는 내게
경아는 내 조카딸
하루에 한 번 이상 전화를 걸어오는
내 얼굴을 닮은 내 조카딸
가녀린 우리 경아, 살 한 점 없는 경아
- 저기 경아가 산다 – 중에서
내 신발 한 번 지나가면
뭉개지고 말 것들
토란 잎에 앉은 물방울 같은 목숨줄
더 움켜쥐려고 악을 바락바락
- 몸부림 – 중에서
웃을 때 살짝 뒤집어지는 윗입술
그 입 모양은 내 아버지와 나
그 아이의 아버지 내 사촌 오빠다
거울을 보며 당겨 내리기도 했던 입술
그날은 어느 조상이 품에 넣어준
붉은 징표가 되었다
- 유전자 - 중에서
고향 일가 동생이
처음 시작한 첫 수확
포도 한 상자 들고 왔다
늦장가 가서
꽁무니에 매단 아직 어린 것
웃음이 방글방글
포도맛처럼 상큼하기는 하다
- 포도 한 상자 – 중에서
‘숭숭 바람이 들어가는 뼈대에/ 햇볕 시멘을 바르려고/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땡볕 속에 분꽃처럼 앉은’ 시인은 자식이 없어서 외롭다. 그래서 몰려드는 개미 떼를 보며 문득 ‘토란 잎에 앉은 물방울 같은 목숨줄’을 함께 하는 존재임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조카딸 경아, 사촌오빠의 딸, 일가 동생과 같은 피붙이들을 생각한다. 세상에 널린 사람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시선도 소중하지만, 얼굴이 닮고, ‘웃을 때 살짝 뒤집어지는 윗입술’을 가진 사촌 오빠의 딸이 더 살갑다. 그것은 시인이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면서 ‘그 아니 후손에게는/ 시 쓰던 조상의 유전자와/ 시 쓰는 유전자가/ 온통 흘러든다면’ 하며 시를 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일말의 자기위안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가슴뼈대를 가진 시인은 종일 허전하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들은 어떤 얼굴 어떤 모습일까.
옆에 둔 핸드폰
나이트클럽 출입문처럼
시커먼 액정의 폰에서
쿵쿵 쾅쾅 유흥의 영업이 한창이다
아이구, 절기는 대서, 중복의 한낮
도색하기 전 금가고 떨어져 나가고
마른 이끼 가득한 여러 개 건물을
손질하자면 얼마나 아득한 절벽처럼 느꼈을까
에라 모르겠다
클럽에 가서 한바탕 신나게 놀다 오자
오색등 빙글빙글 도는 나이트클럽에서
한창 몸을 푸는 그의
선잠이 좀 더 깊어지도록
-핸드폰 나이트클럽 – 중에서
이 시는 무더운 한낮 소도시 공사장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이야기 시이다. 무대와 배역이 단조롭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솔직하여 보여준다. 대서, 중복의 한낮 집 뒤편에서 쿵쿵 쾅쾅 나이트클럽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 주민 모두는 불쾌한 얼굴로 내다본다. 한참 참다가 결국 창문을 열고 “시끄러워 못살겠어요. 소리 좀 낮춰요!”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소리를 달리 해석한다. 작업을 앞두고 잠시 쉬는 시간에 선잠을 자며 틀어놓는 음악이 그의 심신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수박 한쪽 내밀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선잠이 좀 더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마음의 덤불을 거둔다. 공동주택 도색의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젊은 인부가 선잠을 깊이 잘 수 없다. 음악 소리 역시 오래 갈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잠시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거나 항의한다. 하지만 시인은 젊은 인부의 고생과 위로를 짚어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더운데 수고한다고 음료수 한 잔 건네는 마음은 인부의 마음과 몸을 더 싱싱하게 할 것이고, 먼저 가세요 골목이나 교차로에서 잠깐 하는 양보 운전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교통사고를 줄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인부는 인부고 나는 나다. 인부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고 나는 그와 무관한 사람이다. 양보 운전을 하다 보면 내가 갈 시간이 그만큼 늦어진다. 시인의 친절한 마음이 담긴 이 한 편의 시가 호수에 떨어지는 작은 돌맹이가 되어 동심원을 그려나가는 사회가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
저것 보라 소리치며 손짓하는
붉은 볼, 반짝이는 눈으로
동화책 속 그림 같은 산골 아이가 되었네
빗방울을 털며
찬란한 빛깔을 이끌고 나타난 무지개
남자에게서
험악한 어른을 벗겨내고 아이를 찾아주었네
-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설레네 – 중에서
남자에게 무지개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도의 순간이다. 그동안 초로의 남자는 밥 먹는 일꾼들을 일 빨리 하라고 몰아세웠으며, 노임을 어떡하든 덜 주려고 인상을 팍팍 쓰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표정은 늘 삼각도처럼 찌푸려졌고, 두 눈은 언제나 날카로운 감시등이었다. 일과 돈이 삶의 전부인 전형적인 주인어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험악한 어른’의 가면을 털어내고 ‘붉은 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소년’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것은 동화 속 같은 시의 세계로서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다. 사람은 일상의 현실에서 태어나 일상의 현실에서 살아간다. 일상의 현실은 그의 실제이자 가치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현실은 그의 전부를 차지한다. 일상의 현실이 여전하면 사람은 계속 그대로이다. 그러나 일상의 현실에서 어떤 변화의 계기가 닥치면 그는 변화한다. 그래서 시인은 초로의 남자가 이전의 삶과는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변하는 계기를 ‘무지개’로 설정해 놓았다. 이 설정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팍팍한 현실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사는 어느 한순간 비 갠 후에 반짝 무지개가 뜨면 모든 사람의 시선은 하늘로 향한다. 그리곤 가슴에 ‘쿵’하는 소리가 나며 마음이 싱싱해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무지개가 사라지면 쉽게 평상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초로의 남자는 무지개를 보며 삶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꼭 무지개가 아니라도 삶의 즐거움을 깨달을 수 있는 사물과 현상이 자연과 인간 세상 도처에 놓여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일상을 통해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차츰 깨달아 간다.
너무도 간단히
상류에 접어들 때
꽝 꽝 꽝이여
- 도서관에서 복권을 긁다 – 중에서
‘여성지 펴다가/ 문예지 뒤척이다/ 힐금거리는 눈빛들 신문지로 막아내고/
백 원짜리 동전으로/ 슥슥 수십억을 긁은’ 자치복권 두 장이 모두 꽝이다.
허섭쓰레기와 비닐조각 같은 삶을 사는 어느 젊은 남자를 실망시키는 “꽝 꽝 꽝”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누구나 복권 몇 장씩은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사봤다. 승용차에 상품권에 관광까지 한꺼번에 가져오는 당첨은 지극히 드물고, ‘꽝 꽝 꽝’ 소리가 허전했을 것이다.
좋다 나쁘다 사행심이다 대중 기부다 하는 여러 평가를 차치하고 복권은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다. 복권을 사는 마음은 현실이 허전하기 때문이다. 경제 현실이 빈약할수록 일확천금을 꿈꾸며 복권에 집착한다. 현실이 단단한 사람은 복권에 기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복권을 사는 사람들을 선악이나 빈부의 시선으로 볼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권을 사고, 당첨을 기다리는 민심들이 수북하다. 아뫃든 언젠가 이 젊은 남자가 복권에 당첨되어 기뻐할 때가 있을 것이다.
우황 든 소가 나자빠지듯 그가 쓰러지고
맏상주도 아우도 오지 않은 장례식
자꾸만 병풍을 걷어 보던 젊은 아낙은
소리 없이 상여에 매달려
역한 냄새 풍기는 관을 더듬고
소년은 대나무 지팡이로
툭툭 그녀 등을 치고 있었다
- 말복 – 중에서
소처럼 든든하던 그가 갑자기 나자빠졌다. 살림은 -망령든 노모, 병든 딸아이, 맏상주도 아우도 오지 않고, 영정도 없이, 송판떼기 흰 관에 검붉은 옻물, 자갈밭 구덩이다. 소처럼 일해도 이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데, 가장이 툭 쓰러졌으니 젊은 아낙은 어찌 살아 가리요. 말복 더위 후덥지근 하여 짜증나고 그러잖아도 슬픈데 왜 매미는 절정처럼 우는가.
시인은 이 슬프고 답답한 이 가정의 상사를 보며 조용히 시 한 편을 만들었다. 시인이 부조할 수 있는 것은 이 시 한 편뿐이다. 그리하여 소처럼 든든하던 가장 젊은 남자를 순식간에 빼앗아간 하늘에 호소한다, 다시 돌려줄 수 없겠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의 슬픔은 아시라고. 그리하여 작은 행복이라도 내리시라고.
인생살이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를 보았는가? 시의 전부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은 슬픔의 대곡자이다. 하도 기가 막혀 울지도 못하는 상주를 대신해 깊이 울어준다.
괜찮아요, 바람이 걷어줬어요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 말을 남기고
늙은 소에게 가자고 하듯이
낡은 트럭에 천천히 시동을 건다
한아름 벚꽃을
내게 바치고
- 헌화가처럼 – 중에서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비치오리다 -헌화가 -
구 헌화가와 신 헌화가의 차이를 알아보자. 무대는 동해 해변가는 상주 아파트 단지로, 수로부인은 김재순 시인으로, 벼랑을 못 오르는 시종들은 귀 기울이지 않은 젊은 남자로, 늙은 농부는 늙은 인부로, 철쭉은 벚꽃으로, 벼랑은 옹벽으로, 암소는 트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정조는 동일하다.
교과서에서는 <헌화가>의 주제를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연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로부인과 늙은 농부 사이에 무슨 연정이 있겠는가. 시종들은 벼랑을 타지 못하기 때문에 철쭉을 꺾을 수 없었고, 지리에 익숙한 농부는 벼랑을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철쭉을 꺾어 수로부인의 소망을 해결해 주었을 따름이다. 노인은 벼랑을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철쭉을 꺾었고 인부는 여인의 청을 들어 줄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검은 비닐을 벗기고 벚꽃을 나타냈다.
이 시의 중요한 모티브는 ‘검은 비닐’이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검은 비닐이 활짝 핀 벚나무 가지를 덮고 있어서 한 그루 벚꽃을 감상하기에 방해가 된다. 또 옹벽과 높은 나뭇가지란 장애가 있다. 그런 장애를 극복하고 여인의 청을 들어줘 벚나무 한 그루의 화사한 아름다움이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해 준 늙은 남자의 마음이 벚꽃만큼 아름답다. “바람이 걷어줬어요” 말 한 마디 남기는 걸 보면 그 인부의 마음도 시심이 가득하다.
내 열 번 전생의/ 어느 가을 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 유신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 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안동의 원로 시인 김원길 씨의 초기 대표작 <취운정 마담에게> 중의 두 연이다. 이 시의 무대는 김유신 시대인 7세기 말이고, <헌화가>는 8세기 초로서 두 편이 1300년 전의 시공이다. 그런데 <취운정 마담에게>와 <헌화가처럼> 이 두 편은 그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에 전설의 시대 이미지를 불러내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소재와 시상 전개에 있어서 <취운정 마담에게>는 소와 까치를 등장시키지만 움직이지 않는 정물로서 뭔가 불확실한 상상의 세계이다. 머리에서 억지로 만든 시상의 냄새가 난다. 이에 비해 <헌화가처럼>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한편의 산뜻한 묘사이자 고백이다. 훨씬 생동감이 있고 시적 서정이 현실적이다. 아무런 작위가 없이 사실 그대로 다가오면서 ‘~처럼’이 있어도 <헌화가>와 직접 연결된다.
화창한 봄날 창문을 여니 꽃을 만개한 벚나무가 눈에 든다. 그런데 한 부분 검은 비닐이 걸쳐진 나뭇가지의 벚꽃들은 하늘이 안 보여 새초롬하다. 벚나무도 완벽한 벚꽃을 뽐내지 못해 기분이 별로고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도 검은 비닐이다. 지나가는 젊은 남자에게 부탁해 보지만 힐끗 이상한 아줌마네 지나가 버린다. 다시 인근 아파트 공사장의 늙은 인부에게 “저 비닐 좀 벗겨주시겠어요?” 부탁해 본다. 옹벽을 기어올라 나뭇가지에 걸린 검은 비닐을 치운 늙은 남자는 “괜찮아요, 바람이 걷어줬어요” 정말 바람 같은 소리만 남기고 낡은 트럭을 타고 갔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시인이 겪은 사실이다.
이 한 편의 시 <헌화가처럼>은 검은 비닐과 옹벽, 낡은 트럭이라는 소품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고전성과 현대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 시의 풍경은 험난하고 분잡스런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청량한 물줄기를 흘려준다. 벚꽃을 즐기려는 여인의 마음과 그 청을 들어준 늙은 인부의 마음은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작으나마 소박한 인정이요 세련된 미학이다.
시인에게도 일상이 있고 작은 서정이 있다. 많은 인물을 등장시켜 날좀보소 호소하는 무거운 주제와 사상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사도 있다.
잎이 넓은 화초 몇 분 내려져
푸른 기상으로 서 있다
얼른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붉고 노란 꽃들을 마구 피워
창틀이 벌어지고 타일이 깨진 베란다를
궁궐의 회랑처럼 만들겠다는 듯
- 이사 – 중에서
소한 무렵 낡은 공동주택으로 들어서는 이삿짐 용달차. 낡은 운동화 플라스틱 대야 바구니 헹거 빗자루를 보면 영락없는 서민 살림살이다. 춥고 배고픈 이삿짐이다. 그러나 이 집 안 주인은 잎이 넓고 푸른 화분 몇 분을 기르며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다. 깨진 베란다를 궁궐의 회랑으로 만드는 화분의 마술처럼 이 집 살림살이도 이사 복을 받아 피어날 것이다. 너나없이 가난한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보며 잔잔한 행복을 빌어주는 시인의 시선이 따스하다.
가족이 둘러앉아
냉냉 양양 노래 부르며
싱싱한 생선을 먹는 꿈을 꾸는가
얼굴 가득 미소가 흐르기도 하네
- 유리문 너머 – 중에서
어린 고양이도 가난하고 사진첩 속 가족들도 가난하다. 고양이도 어린 것이 가족과 헤어져 독립생활을 하고, 아버지는 막노동자 어머니는 보따리 장수, 형아는 지하도 노숙자 아우는 맨발로 오두막에서 혼자 운다. 이 풍경이 구시대의 것인가? 아니다 현대 문명이 휘황찬란한 현재도 이 땅 구석진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티비에서는 먹방이 시청률이 높고, 곳곳에 연예인 따라 우우 와와 몰려다니는 군중들이 넘치고, 이태원에서 할로원데이 밤을 즐기려다가 많은 사람이 압사하는 대한민국이지만 혼자 살기에도 버거운 사람들이 음지에 수두룩하다.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 흩어진 가족들이 곳곳 음지에 실재하고 있다. 언제일까 이 가족 넷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을 때가.
시인은 왜 부자보다는 빈자의 편을 드는가. 부자들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보다는 빈자들의 고통을 노래하는 시가 훨씬 많은가. 그것은 시인의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부자의 편을 들면 마음이 거북하지만 빈자의 편을 들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빈자의 편을 들어 노래한 한 편의 시가 부자들의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에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빈자는 무기력한 패배자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빈자들의 패배가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임을 알기 때문에 운동장을 똑바로 하기 위해서 빈자들을 위한 시를 쓴다.
또 그전에 그 집 주인은
내 어머니의 당고모
당고모 집 늙은 할머니의 잔심부름을 하며
내 어머니도 살던 집이라네
왕골자리는 문간방에도
깔끔하게 깔려있었다네
- 그 기와집의 내력과 어머니 – 중에서
해와 달은
사람의 육신을 소진시켜 어디로 가져가지만
인연이란 거, 서로 끌리는 마음은 두고 가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이 고향인 지체 높은 선생이 어찌 노곡까지 와서
병성산을 노래하셨겠는가
나는 어찌 그 산 아래 나서 숙이와 친구가 되고
또 어찌 시를 알아서
식산 선생을 이렇게 흠모하게 되었을까
삼백 년 전에 사라진 이만부 선생을
- 식산정사에 가다 – 중에서
당고모네가 살다가 스르르 사라지고, 사주와 풍수를 보는 아저씨가 살다가 떠난 기와집은 비록 퇴락한 안채만 남았지만 아름드리 기둥은 여전히 광채를 내뿜으며 두 집의 가사를 증언하고 있다. 또 식산 이만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소요한 식산정사 역시 삼백 년 묵는 고가의 정취를 내뿜으며 한 사람의 학자가 살다 갔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람은 살다 가도 흔적이 없지만 집은 남는다.
기와집과 식산정사를 통해 시인은 전통과 역사를 본다. 일상에서는 부화한 현대문명이 요란하지만 시인은 낡은 기와집과 식산정사를 보며 현대든 근대든 문명을 관통하는 한 줄기의 흐름을 생각한다. 이 흐름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바탕이다. 바탕이 허랑하면 삶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전통과 역사는 사람을 붙들어 지탱하게 해주는 근간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을 발 딛게 하는 공간으로서의 기와집과 식산정사의 존재는 인간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한에는 여전히 당당할 것이다.
에그, 봉긋봉긋 발그레한 꽃망울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 같아
사내아이들과 뒤섞인 뽀얀 딸아이 같아
넉넉한 옹기 분에 갈라 심는다
- 화분을 갈아주다 – 중에서
내 몸을 풀어내어
느티나무 속으로
매미 소리 속으로
이슬비처럼 번지고 싶네
- 느티나무 아래서 – 중에서
당신과 나는
활짝 꽃 핀 복숭아 나뭇가지에
보름달이 걸릴 때 만난 인연이라서
이번 생에서는 맺지 못하는 운명이랍니다
당신은 이 약을 드시고 천 년을 사시고
나는 윤회를 거치고 거쳐
이생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천 년을 산 당신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나는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해서
우리 다시 심장이
쿵쿵거리겠지요
- 쑥물 한 잔 – 중에서
몇 포기 풀잎에 눈가루처럼 뿌려진 당신
햇귀에 녹을 당신
녹아서 흐를 것도 없는 당신
- 당신은 발바리만 못합니다 – 중에서
늙은 개
암컷 발바리와 함께 가는
이 허망한 즐거움
- 동행 – 중에서
한 백 년은 너무 멀고
한 십 년도 지루하고
처음에는 호기심에
한동안은 열정에, 그리고
서서히 식어가면서
나는 남아서
그리운 순간들을 참으며
시인 나무랭이로
그곳에 살고 싶네
- 그곳에 살고 싶네 – 중에서
시간이 다 되어 몇 편의 시에서 반짝이는 구절들을 나열해 보았다. 많은 사람과 동고동락 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대곡하는 시인이지만 돌아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가슴에 희로애락이 그득하다. 남의 슬픔과 눈물을 보지만 시인에게도 슬픔과 눈물이 있다. 단지 안으로 삼키는 게 많을 따름이다.
시인의 눈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은 세세한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좁은 베란다 켜켜로 쌓인 화분을 건성으로 보는 게 대부분의 눈이다. 그런데 그 틈에서 봉긋봉긋 발그레한 꽃망울을 발견한 시인은 탄성을 지른다. 그것은 연분홍 벽지와 꽃무늬 장판으로 창고 방을 단장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었다.
시인에게 ‘당신’은 짙은 회오와 함께하는 언어이다. <쑥물 한잔>에서는 천 년을 기다려야 할 인연이고, <당신은 발바리만 못합니다>에서는 미움이 지나쳐 발바리만도 못하며 햇귀에 녹아도 흐를 것도 없이 허술한 당신이다. 당신이 없기 때문에 늙은 암컷 발바리와 동행하며, 당신은 나를 시인 나부랭이라고 하찮게 말하지만 이 땅 어느 곳이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살아갈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인은 절대고독 속에서 그리운 순간들을 참으며 ‘시인 나부랭이’로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사적인 독백일 뿐이고, 이 시집 전편을 통하여 시인은 줄기차게 인간과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증언하고 고백하고 고발한다. 결코 과장하거나 사실성이 없는 상상으로 꾸미지 아니하고 순결한 영혼의 눈으로 조용히 디양한 인간상과 인생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상상도 보태지만 모든 시가 리얼리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부유하는 수많은 시들과 시집 중에서 이 시집 『그대 선잠이 좀 더 깊어지도록』은 인간과 인생의 진실을 증언하는데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선인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생 현장에는 악인들도 많다. 시인의 시에 악인이 없는 것은 그들을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애써 그들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생은 단면에 단층이 아니라 다면에 다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의 양면을 함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 시인이 스스로 넓혀야 할 부분일 것이다. 지상에는 복숭아 꽃밭만 있는 게 아니다. 양지가 있고 음지가 있으며 낙원이 있고 실낙원이 있다. 그렇다고 시인을 복숭아 꽃밭에서 불러내진 말자. 시인에겐 시인이 노래할 영역이 따로 정해져 있다. 천사는 천사의 영역에서 천사로서 존재한다. 그에게 악의 세계는 다른 세계이다. ’황사를 꽃이 되게 하는/ 저 산수유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언어, 치유의 시가 만개한 이 시집을 읽고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2022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