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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九月) 離宮散螢天似水(이궁산형천사수)-이궁에는 반딧불이 흩어지고 하늘색은 물과 같네. 竹黃池冷芙蓉死(죽황지냉부용사)-누런 댓잎에 연못 쌀쌀해질 때 부용꽃도 죽어가네 月綴金鋪光脈脈(월철금포광맥맥)-문고리에선 달빛이 끊임없이 빛나고 涼苑虛庭空澹白(량원허정공담백)-서늘하고 쓸쓸한 정원 위로 하늘빛 깨끗하네. 露花飛飛風草草(로화비비풍초초)-이슬꽃 날리고 바람 쓸쓸한데 翠錦斕斑滿層道(취금란반만층도)-울긋불긋 비단이 계단 같은 길 가득 채웠네. 鷄人罷唱曉瓏璁(계인파창효롱총)-계인의 노랫소리 어스레한 새벽을 울리면 鴉啼金井下疎桐(아제금정하소동)-우물가 오동나무엔 갈가마귀 울며 내려앉네 작자미상(作者未詳) 위의 한시는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정서를 노래한 글이다. 오늘이 양력(陽曆)으로 9월 시작의 첫날이기에 이시를 소개 하지만 이시의 내용은 음력 9월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중국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이궁(離宮)인 경화궁(景華宮)에서 많은 가을 반딧불을 잡아서 밤에 산으로 놀러 갈 때 등불을 대신했다는데 바위와 계곡이 온통 불이 난 듯이 환했다고 한다. 가을 추수가 거의 끝나는 9월이 되면 대나무 잎은 짙은 녹색이 퇴색되고 연못 주위도 쓸쓸한 가을 분위기가 된다고 이 시는 말한다. 3행(行)에서 금포(金鋪)라는 말은 “문고리”를 말한다. 참 오래되고 잊혀졌던 이름을 듣게 되는데 나이 60세 이상 되는 사람은 방문의 “문고리”를 기억할 것이다. 무쇠로 만든 동그란 링(ring)에다 연결 못이 달려 문에다 박아서 손잡이로 사용하는 것이다. 미닫지 문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전부 이 문고리가 달린 문을 사용하였다. 이 문고리는 그냥 문을 열고 닫는 손잡이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고리에는 특히 조선 여인의 한(恨)이 서려 있었다.
그리운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셨다. 혹은 가정에 슬픈 일이 생기면 이 문고리를 부여잡고 흙벽과 마루를 치며 통곡도 하고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남정네들도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갈 때는 문을 콱 닫고 문고리를 소리 나게 홱 비틀며 나간다. 방안에서 안전장치도 간단하다. 문고리를 잠그고 숟가락을 꽂으면 된다.
살기 힘들어 수심에 잠겨 잠이 안올 때 가을 달빛은 휘영청 하게 밝은데 마룻바닥에 무릎을 곧추세워 턱을 고이고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방문을 향하면 손때가 반질반질한 문고리에 가을 달빛이 비쳐 빛나고 있는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도 가을 새벽에는 매우 간결하게 들리는 정취(情趣)다. 위의 시 7행에서 계인(鷄人)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계인(鷄人)이란 중국 궁중에서는 닭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성문을 지키는 경호무사가 주작문(朱雀門)이라는 성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 밖 민가에서 새벽닭이 울면 궁중에 닭 울음소리를 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대학자이며 문인인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춘정집(春亭集)에 동지일조조(冬至日早朝)라는 시에 鷄人報曉開天闕(계인보효개천궐)-계인(鷄人)이 새벽을 알리니 대궐문 열리고 鸞鷺盈庭拜冕旒(란로영정배면류)-뜨락 가득 만조백관 임금께 절 올린다. 라는 시를 보면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은 풍속이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 절에 “오동나무에 갈가마귀 울며 내려앉는다” 라고 하였는데 갈가마귀를 한자로 아조(鴉鳥)라 한다. 겨울에 나타나는 까만색의 겨울철새로서 요즘은 보기 힘들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가을과 겨울철에 쉽게 볼수 있었는데 수백 수천마리가 하늘에 무리지어 군비(群飛)를 하다가 논바닥에 내려앉으면 논이 새까맣게 덮일 정도였다. 오동나무에 갈가마귀가 내려앉으면 가을이 시작되고 곧 겨울이 온다는 뜻이다. 1행에 있는 이궁(離宮)이란 왕의 별궁(別宮)으로 예를 들어 경복궁(景福宮)의 이궁(離宮)이 창덕궁(昌德宮)이다.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경희궁(慶熙宮)도 이궁(離宮)이다. 지금의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靑南臺)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흥선대원군이 한창 득세할 때 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에 궁궐에 버금가는 운현궁(雲峴宮)을 지어 놓고, 다시 구리시 마석리에 별궁(別宮)인 운현궁(雲峴宮)을 건축하여 심기가 불편하면 그곳에 내려 가곤하였다 한다. 마석리 운현궁(雲峴宮) 위쪽에 대원군 묘가 있다. 대원왕(大院王)의 묘소에도 가을 햇살이 들고 있겠구나. 이 모든 서술(敍述)들이 9월의 문턱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인간과 자연의 감정이다. 작년 9월1일 아침에도 비가 왔는데 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마 여름을 보낸 아픔에 가을을 재촉하는 늙은이의 눈물일 것이다. -농월-
추야우중(秋夜雨中) 비오는 가을밤 秋夜惟苦吟(추야유고음)-쓸쓸한 가을밤에 애써 시(詩)를 지으니 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이곳 세상 외국이라 알아줄 이 거의 없구나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창밖은 삼경(三更)인데 외로운 빗소리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등불 앞에 마음만 앉아 만리고향 달리네! 최치원(崔致遠) 위의 시는 가을시 중에서 으뜸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최치원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조선 역사 속에 한문학의 비조(鼻祖)라고 이름 지어지는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은 약 1100전의 신라(新羅)시대 사람이다. 필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친구끼리 나누는 ≪한시(漢詩) 읽기≫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나라, 중국의 시문학(詩文學)의 대가(大家)들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끼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중국의 두보(杜甫) 이백(李白)이 약 1200년전 사람이요, 가까이로는 추사(秋史) 다산(茶山)에 이르기 까지 일일이 이름을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선인(先人) 대가(大家)들의 주옥(珠玉)같은 한시(漢詩)를 대할 때 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설레인다. 최치원(崔致遠)의 한시를 소개하면서 시속에 담겨 있는 감정들이 천년전 사람의 정서라고는 전혀 생각이 안 들고 마치 우리 시대의 박목월이나 이육사 만해의 시를 읽는 기분이다.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은 해동(海東)의 대문장가로 지칭되며, 대자연을 벗 삼아 풍류(風流)를 즐겼던 분이다. 그가 남긴 문유(文遊)의 발자취는 여러 곳에 많지만 필자의 기억에 남는 유적지(遺蹟地)만도 아래와 같다 학사대(學士臺)-합천군 가야면 고운동(孤雲洞)-산청군 시천면 국보 제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 해운대(海雲臺)-부산 고운정(孤雲亭)-거창군 가북면 임경대(臨鏡臺-孤雲臺)-양산시 원동면 우리에게 가을 정서(情緖)을 공급(供給)하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쓴 최치원도 그의 초년(初年)은 순탄치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 귀족이면서도 진골(眞骨)이 아니기 때문에 출세의 한계가 지워져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현위(縣尉)라는 벼슬로 출발한다. 그 후 당(唐)의 세력가인 절도사(節度使) 고변(高騈)의 막하로 들어가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된다. 그 시기에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항복을 받은 명문장(名文章)은 천하에 유명 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唐)의 종사관(從事官) 벼슬도 이민족(異民族)이었던 최치원의 출셋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외로움과 좌절감 속에서 그는 모국 신라로의 귀환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가 가을이라 위의 시는 아마도 당시 신라로 돌아올 무렵 그의 착잡한 심정을 말하는 듯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쓸쓸하게 담겨 있다. 천 년 전이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이나 가을비는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향수(鄕愁)에 젖게 한다. -농월-
소상야우(瀟湘夜雨)소상강의 가을 밤비 소리를 들으며 一帶蒼波兩岸秋(일대창파양안추)-푸른 물결 가득한 양 언덕에 가을은 짙어가고 風吹細雨灑歸舟(풍취세우쇄귀주)-바람은 보슬비를 몰아가는 배에 뿌린다. 夜來泊近江邊竹(야래박근강변죽)-밤들어 강가의 대 숲에 배를 대이니 葉葉寒聲摠是愁(엽엽한성총시수)-차가운 댓잎 소리는 모두가 시름이라. 이인로(李仁老) 이 시는 고려 명종(明宗) 때의 대표적인 문신(文臣)인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파한집(破閑集)이란 이름 그대로 문인의 심심풀이(파한破閑)의 문장이나 문학에 관한 이야기책으로 시(詩)나 신라의 옛 풍속 및 서경(西京)과 개경(開京)의 풍물(風物) 궁궐 사찰 등이 재치 있게 소개되어 있어 고대소설의 태동기(胎動期)와 고려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문집(文集)이다. 소상야우(瀟湘夜雨)란 소상강에 내리는 가을 밤비라는 말이다. 소상강(瀟湘江)이란 중국 여행을 한사람은 잘 알겠지만 양자강(揚子江) 중류(中流) 부근에 있는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있는 두개의 물줄기로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을 말하는 것이다. 동정호(洞庭湖)는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그유명한 등악양루(登岳陽樓-악양루에 오르다)에 나오는 호수(湖水)이다. 이 호수는 크기가 마치 바다와 같이 넓어서 두보는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동정호의 넓은 소감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昔聞洞庭湖(석문동정호)동정호 아름다운 이야기야 예전부터 들어온바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오늘 비로소 악양루를 오르게 되었도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오나라 초나라가 동남으로 갈라지고------ 라고 표현을 하였다. 호수가 얼마나 컸으면 오나라 초나라 국경이 보일정도 였을까 ! 시인이 말한 소상강에서 내리는 밤비는 우리가 오늘 가을을 맞으면서 상상(想像)하는 조용히 낭만적으로 내리는 가을 밤비가 아니고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동정호 강줄기에서 내리는 밤비를 말한다. 이 시에서 배에 몰아 뿌리는 보슬비는 인생이 살아가는 도중에서 만날 수 있는 뜻밖의 시련과 구비 구비 감겨 있는 한(恨)의 정서도 암시(暗示)하고 있다. 이시를 쓰는 이인로 자신의 심경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무신(武臣)이 정권을 잡은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소상(瀟湘)이란 강이름에는 떼어놓을 수 없이 뒤따라 다니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있다. 마치 우리나라 동해안(東海岸)이라 하면 관동팔경(關東八景)이라는 말과 같다. 소상팔경은 특히 한국화(韓國畵)나 중국화(中國畵)의 화제(畵題그림제목)에도 자주 등장한다. 조선의 화가를 대표하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본 천리대학에 있음)를 그린 안견(安堅)과 겸재정선(謙齋鄭敾) 심사정 이정 등이 즐겨 그리는 보편적인 장르(genre그림양식) 이다. 소상팔경은 우리나라의 고전이나 문학 속에서 많이 만나게 되는 말이다. 어려운 한시(漢詩)는 차치하더라도 고전소설 구운몽 춘향전 심청전등의 판소리 민요등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기 때문에 외람(猥濫)된 말 같지만 이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기억해 두시면 이 이름이 들어가는 고전문학이나 동양화를 감상할 때 그 맛을 한결 깊이 알 수 있고 생소하지 않고 한층 더 친근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권해드리는 바이다. 가을을 맞이하여 앞에 소개한 신라 최치운의 가을 밤비(秋夜雨中) 고려 이인로의 소상야우(瀟湘夜雨) 이제현의 소상야우(瀟湘夜雨)는 꼭 읽어 보고 싶고 친구와 같이 나누고 싶은 한시였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와 같이 삼각산(三角山) 산자락 아늑한 한옥(韓屋) 찻집에서 따끈한 차 한 잔 나누면서 가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心情)이다. -농월-
투구행(鬪狗行) 싸우는 개떼들 衆狗若相親(중구약상친)-개떼들은 친하게 지낼 때에는 搖尾共行止(요미공행지)-꼬리 흔들며 서로 어울려 다니지만 誰將朽骨投(수장후골투)-누군가가 썩은 뼈다귀 하나 던져주면 一狗起衆狗起(일구기중구기)-한 마리 두 마리 일어나 우르르 달려가 其聲狺狺狋吽牙(기성은은의우아)-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 먹이 다투어 大傷小死何紛紛(대상소사하분분)-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물려 죽지 所以貴騶虞(소이귀추우)-그래서 추우를 참 고귀하다고 한다. 高臥天上雲(고와천상운)-구름 위에 높이 누워 유유자적하니깐 조지겸(趙持謙)
조지겸(趙持謙) 조선 후기 인조와 효종때의 문신이며 사간(司諫검사)을 지냈으며 서인(西人)의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큰 대립각(對立角)을 세운 소론의 중심인물이었다. 위의 글은 그의 문집 우재집(迂齋集)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서 “싸우는 개떼들(鬪狗行)”은 뼈다귀 하나를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는 개떼 들이나 이익 앞에서 서로 다투는 인간이나 꼭 같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사실 인간들은 윤리와 도덕이란 너울로 앞가림을 하고 있지만 그 너울은 언제든지 벗어 던 질수 있는 수건조각에 불과하다. 나에게 손해가 안 되고 별 문제없을 때는 교양을 앞세우고 점잔도 빼고 서로 듣기 좋은 말(교언영색巧言令色))을 하고 친한 척 한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수반되는 문제가 눈앞에 벌어지면 양보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이 서로 치달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기 좋은 말로 선의(善意)의 경쟁이라고 한다. 이익과 목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인륜을 저버리는 수단도 주저 없이 동원한다. 먹이를 사이에 두고 이빨을 갈며 싸우는 개떼와 별로 다름이 없다. 결국 승자만이 정의(正義)로운 진실(眞實)로 귀착(歸着)된다. 사자와 원숭이 개들은 승자 앞에서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승자 앞에는 영광과 복종만 있을 뿐이다. 결국 인간사회의 온갖 행위도 뼈다귀를 차지하기 위한 개들의 아귀다툼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옆에 먹이가 있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다. 인간의 욕심이 끝나려면 죽어야 끝이 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위해서 문명과 종교를 만들고 교육을 시행하여 왔지만 이런 일련의 수단들은 인간의 생활을 일시적으로 편리하게는 하였지만 끝없는 욕망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이익 앞에서는 종교도 무력하고 수단(手段)과 방편(方便)에 불과하다. 추우(騶虞)는 신령(神靈)스러운 상상의 짐승으로. 흰 바탕에 검은 무늬와 긴 꼬리가 있으며, 생물을 먹지 않고 제 명에 죽은 짐승만 먹는 어진 동물이며 살아 있는 풀을 밟지 않으며 성인(聖人)의 덕에 감응(感應)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나라에 덕이 있는 군주(君主)가 나타나면 함께 나타난다는 전설상의 추우(騶虞)는 꼬리가 몸통보다 긴 얼룩무늬 흰 호랑이같이 생긴 동물이다. 환율상승이다. 외환위기다. 9월 위기다. 국민은 미친 개떼를 만난 것 보다 더 불안하다. 국민의 한결같은 마음은 긴 꼬리의 흰 얼룩 호랑이가 보고 싶은 심정이다. -농월-
부부싸움 여자의 설음 謂君似羅海(위군사나해)-당신을 사나이라고 일컫기에 女子是托身(녀자시탁신)-여자인 이 몸을 맡겼는데 縱不可憐我(종부가련아)-방자하여 저를 가엾게 여기지 아니하니 如何虐我頻(여하학아빈)-어쩌자고 나를 자주 학대하는 건가요? 亂提羹與飯(난제갱여반)-밥상의 국과 밥을 어지럽게 끌어당겨 照我面門擲(조아면문척)-내 얼굴에 보이고는 문간으로 던졌지요 自是郎變味(자시낭변미)-스스로 서방님의 입맛이 달라졌지 妾手豈異昔(첩수기이석)-첩의 솜씨가 어찌 옛날과 다르나요. 早恨無子久(조한무자구)-일찍이 자식 없어 오래도록 한(恨)이었는데 無子反喜事(무자반희사)-자식 없는 것이 도리어 기쁜 일이로다 子若渠父肖(자약거부초)-자식이 만약 애비를 닮았다고 한다면 殘年又此淚(잔년우차루)-남은 인생 또 이처럼 눈물 흘렸겠지요. 嫁時服紅裙(가시복홍군)-시집 올 때 입었던 예쁜 붉은 치마는 留欲作壽衣(류욕작수의)-남겨두었다 수의(壽衣)를 만들려고 했지만 爲郞鬪箋請(위랑투전청)-투전판에 사용할 남편 노름돈 위해서 今朝淚賣歸(금조루매귀)-오늘 아침에는 눈물 흘리며 팔고 왔지요 이옥(李鈺) 위의 한시는 제목을 부부싸움이라고 붙였지만 시의 내용은 남편과 아내사이의 다툼이 아니고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학대(虐待)하는 내용이다. “남편”이라는 이름 하나 믿고 혼인을 했는데, 사랑하고 가련하게 생각 하기는커녕 학대만 하는 남편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남편이 감싸주지 않으면 모두가 낯선 시가집에서 누굴 믿고 살란 말인가. 이 부부의 모습에서는 신혼시절 굳게 다짐했던 맹서(盟誓)는 흔적도 없고 망가지고 질곡(桎梏)된 처참한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내가 차려다 준 밥상을 입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것도 밥상이라고 차린 거냐“는 식으로 집어던지는 매정한 남편의 모습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 밥상을 집어 던지는 것은 우리 어렸을 때 주위에서 종종 보아 왔고 지금도 아마 덜되고 머저리 같은 남편은 이런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만일에 있다면 그것은 “홀아비”를 예약한 행동이다. 남편의 이런 짓은 부부간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자식이 없어 늘 한(恨)서러웠는데, 이 제와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남편을 닮은 자식을 낳았더라면 그동안 남편 때문에 흘린 눈물이 한강수인데 남은 인생 동안, 아비 닮은 자식 때문에 또 다시 흘릴 눈물 생각하면 차라리 자식 없는 것이 도리어 기쁘다고 말하고 있는 아내가 안스럽다.
부인은 자신이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색 치마를 잘 보관하였다가, 자신이 죽으면 그 옷으로 수의(壽衣)를 만드는 것이 한 가지 소망이었는데, 남편이 놀음밑천을 내 놓으라는 욱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치마를 팔아버리는 가엾은 부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모름지기 부부는 서로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특히 한쪽이 병이라도 들면 불쌍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종속물(從屬物)이 아니다. 부부는 동등한 위치에서 인격적으로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귀하게 여기는 가정은 비록 가난해도 질서가 있고 대체적으로 행복하다. 여자는 남자에 비하여 이성(理性)적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매우 침착하고 번뜩이는 재치를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남자보다 훨씬 뛰어나다. 힘은 약하지만(장미란 제외) 지혜는 지구를 능히 짊어 질수 있다. 남자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선 담배부터 피우고 마음대로 안 되면 술을 마신다. 그리고 고민을 하고 화를 낸다. 감성(感性)적이고 무디고 세련미가 없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서양(西洋)역사와는 다르게 동양(東洋) 특히 우리나라는 원래 여성을 귀하게 여기고 우대하였는데 16~7세기 이후에 학대를 받았다. 서양역사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역사 지중해 중동 히브리등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완전히 다산(多産)을 위한 성(性)의 노예에 불과한 존재였다. 서양 여성을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라고 하여 마치 여성상위(女性上位)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속된말로 웃기는 말이다. 1877년 미국 제19대 대통령 헤이스의 취임식에서 한 기자가 대통령의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고 부른 것이 시작이 된 것을 마치 옛날부터 여성이 대우를 받는 줄로 알고 있다. 성경에도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여자는 남자를 바로 보지 말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보라” 고 하였다. 이야기가 좀 길지만 아내의 지혜 이야기를 하나 소개 한다. 안자(晏子)는 중국 춘추 시대 제나라 재상(宰相국무총리) 이던 사람이다. 안자가 하루는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딸려 있는 마부(馬夫)가 한사람 있어 말을 몰게 되었다.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행동을 엿보았다 남편은 국무총리(재상)의 마부이므로 큰 일산(日傘햇빛가리개)을 받쳐 들고 말 네 마리가 끄는 사두마(四頭馬)에 채찍질을 하면서 의기양양하며 매우 흐뭇한 얼굴이었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그 아내는 남편에게 갑자기 이혼(離婚)하기를 청했다. 남편은 깜작 놀라 그 이유를 묻자 아내가 말하기를 “안자는 키가 6척이 못돼도 그 몸으로 제나라 총리로 이름을 천하에 날리고 있소. 그러나 아까 외출하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 낮추고 남에게 겸손한 태도였소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으로 겨우 남의 마부가 되어서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장한 듯이 만족한 빛이었소. 내가 당신과 이혼하는 이유는 그때문이요” 그 뒤로부터 남편은 스스로 마음을 누르고 몸을 낮춰 남의 앞에서 겸손하였다. 안자(晏子)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자 마부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에 안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부(馬夫)를 천거(薦擧)하여 대부(大夫)벼슬에 올려 주었다. -농월-
아호(雅號) 옹기 人之而有名相互而稱呼(인지이유명상호이칭호) 사람에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서로를 부르기 위함이라 敬稱而啣諱平交而親號(경칭이함휘평교이친호) 성함과 휘(諱)라 함은 경칭이요 호(號)는 친한 사이의 호칭이다
幼時冠前字修學而生號(유시관전자수학이생호) 어릴 때는 자(字)라했으며 공부하면서부터 호(號)를 쓰는데 文士詩有號書畵歌必號(문사시유호서화가필호) 글 잘하는 선비와 시인들. 예술가에는 반드시 호가 있다 自然山水得鄕里貫地作(자연산수득향리관지작) 호는 자연산수에서도 얻고 고향마을에서도 따 왔으며 性品嗜好作先後從而作(성품기호작선후종이작) 사람의 성품과 좋아하는 특징을 보고 선.후배가 지어준다 작자미상(作者未詳) 어제 신문기사에 참 귀한 글을 읽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호(號)가 옹기(甕器)라는 내용의 기사다. 기사내용을 요약하여 소개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호(號)가 ‘옹기’라는 사실이 처음 공개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옹기장학회” 행사서 밝혀진 것이다. 옹기라는 호(號)는 김 추기경의 부모가 옹기 장사를 한 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가 1868년 순교한 뒤 추기경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옹기장수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독실한 신앙을 이어갔다. 추기경의 어머니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옹기를 팔거나 포목 행상을 하며 자식을 키웠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름 있는 사람과 서민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호(號)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황희(黃喜) 호(號) 방촌(尨村) 조선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멋있는 호(號)는 지금 KBS의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열연중인 <김갑수 역>의 황희 정승의 아호인 방촌(尨村)이다. 방촌은 “삽살개 짖는 마을”이 란 뜻으로 가장 뛰어난 자연미와 인간미가 있다는 평을 듯고 있다. ☆이승만(李承晩) 호(號) 우남(雩南) 지금의 서울역 근처 우수현(雩守峴)밑 남쪽의 오막살이집에서 공부를 하면서 우수현의 “우(雩)”자와 남쪽인 “남(南)”자를 따서 우남(雩南)이란 아호를 지은 것이다. 이승만의 호(號)를 더욱 멋있게 보이는 이유는 글씨를 쓴 후에 한번도 “대통령”이라고 쓴 적이 없고 꼭 우남(雩南)이라고 하였다. ☆박정희 호(號) 중수(中樹)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지었다. 끝없는 광야(廣野)에 한그루 우뚝 서있는 나무다. 천하를 호령하는 글자 같기도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보면 참 외롭게 보이는 호(號)같다. 재미있는 것은 한 번도 이 호(號)를 사용 안 했다고 한다. ☆이황(李滉) 호(號) 퇴계(退溪) 이황은 46세때 낙향(落鄕)하여 고향인 경북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어 자신의 학문연구 처소로 삼고 이를 계기로 동네 이름도 퇴계(退溪)로 바꾸고 스스로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토계(兎溪)란 뜻은 토끼가 뛰노는 골짜기라는 듯인데 퇴계(退溪)란 “물러나는 골짜기”란 뜻이다. ☆이이(李珥) 호(號) 율곡(栗谷) 하루는 어떤 스님이 파주 율곡의 집에 찾아와 아이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수명을 연장할려면 밤나무를 500그루 심어야 된다는 말을 듯고 아버지 이원수공이 파주의 노추산에 500그루의 밤나무를 심은 후 〈원효대사가 태어난 밤나무계곡인 율곡(栗谷)〉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號)이다. ☆신인선(申仁善) 호(號) 사임당(師任堂)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훌륭히 키운 어머니다. 신사임당은 성은 평산 신씨이며 이름은 인선(仁善)이다. 사임당은 자기 스스로 지은 호(號)인데 이는 중국의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泰任)을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날 여자의 이름에 태(泰)자 임(任)자가 들어가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이원록(李源祿) 호(號) 이육사(李陸史) 청포도 시인 이원록(李源祿)의 호(號)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독립운동당시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수감시 수인(囚人)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 ”라고 지었다. ☆김정희 호(號) 추사(秋史) 완당(阮堂)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호를 많이 가졌던 조선시대 서예가 문인, 예술가였던 김정희(金正喜)이다. 그는 완당(玩堂)ㆍ추사(秋史)ㆍ예당(禮堂)ㆍ과파(果坡) 등 무려 5백여 개의 호를 사용했다. 이 호의 대부분은 본인이 지은 것이다. 그 중에서 완당(阮堂)을 제일 오래 사용한 호이고 72세 돌아가실 때 지금의 과천(果川)에 살았기 때문에 노과(老果)라 지어 불렀는데 이호는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板殿)” 이라는 마지막 글씨에 있다. 이 외도 수많은 명사들의 호(號)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지면이 허락되지 않아서 소개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호를 소개 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씁쓸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정치인들의 이름을 매스컴에서 영문(英文) 이니셜(initial)로 JP · HR · DJ · YS · MJ · KT. MB 식(式)으로 사용하는데, 그 표현이 여유와 멋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영어(英語) 쪼가리들 뿐이어서 마치 요즘 정치상황을 상징하는 듯싶어 서글프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기억나는 것은 심지어는 생각이 얕은 언론 기자들이 한 정치인을 창(昌) 또는 창(槍)으로 약칭(略稱)을 사용한 것은 그 어감상 매우 잘못된 표현이고 본인에게 큰 실례의 기사라 생각한다. 옹기(甕器) ! 얼마나 소박하고 우리의 삶의 숨결이 함께 하는 이름인가! 필자의 개인적으로 지금 이시대 우리나라에 가장 유일하게 존경 받는 분은 김수환 추기경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전직 대통령, 원로 정치인, 학자, 종교 지도자도 많지만 우리 국민에게 옷깃을 여미도록 “어른 스러움”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분은 이 어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스러운 부모 밑에 자란 자식이라야 제대로 행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행세” 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 일등국민으로서 문화인으로서의 선비 대접을 받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선비란 무엇이냐? 교육받은 사람이다. 옹기(甕器) 어른님! 부디 건강을 보존하셔서 오래도록 저희들을 훈계(訓戒)하여 주옵소서. -농월-
백로(白露) 明月皎夜光(명월교야광)-밝은 달빛 맑게 빛나는 밤 促織鳴東壁(촉직명동벽)-귀뚜라미는 동쪽 벽에서 운다. 玉衡指孟冬(옥형지맹동)-옥형성(玉衡星)은 서북쪽을 가리키고 眾星何歷歷(중성하력력)-별들은 어찌 그렇게 또렷한지 白露霑野草(백로점야초)-흰 이슬은 풀밭을 적시니 時節忽復易(시절홀부역)-시절은 홀연히 다시 바뀐다. 秋蟬鳴樹間(추선명수간)-가을매미는 나무에서 울지만 玄鳥逝安適(현조서안적)-제비는 어디로 떠났는가! 昔我同門友(석아동문우)-지난날 나의 동창생들은 高舉振六翮(고거진륙핵)-높이 날아 이름을 떨치지만 不念攜手好(불념휴수호)-서로 손잡던 우정은 생각지도 않고 棄我如遺跡(기아여유적)-헌신짝 버리듯 나를 저버린다. 南箕北有斗(남기북유두)-남기성(南箕星)도 북두성(北斗星)도 牽牛不負軛(견우불부액)-견우성(牽牛星)도 멍에를 매지 않는다 良無盤石固(량무반석고)-진실로 반석 같은 견고함 없으니 虛名復何益(허명부하익)-헛된 이름 다시 얻어 무슨 소용이랴 작자미상(作者未詳) 고시(古詩)19수 중에서 오늘이 9월 7일 (음력 8월 8일) 백로(白露)다. 백로(白露)란 찬 이슬을 아름답게 문학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무렵은 일조량이 많아서 곡식이 여무는데 적기이고 특히 제철 식품으로 포도가 잘 익어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고도 한다. 옛날 웃어른께 안부 편지를 쓸 때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은 바로 백로 무렵에 포도가 잘 익은 것을 비유해 멋을 내는 표현이다.
백로(白露)에는 밤기온이 몸에 느끼게 내려가고, 아침에 아파트 정원 길을 걸으면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전히 나타난다. 올해는 백로(白露)일로부터 추분(秋分)까지가 17일 간이다. 옛 중국 문헌에 보면 백로 날로부터 추분 날까지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그 특징을 말하였는데,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엊그제 얼핏 비 몇 번 내리자 가을이 바로 발치에 다가왔다. 여름 한시(漢詩)를 소개 할 때 ㅇ자의 타자 치든 손가락이 지금은 ㄱ자 쪽으로 자주 간다. 이를 두고 염량세태(炎凉世態)라 하든가! 입추(立秋)를 지나 처서(處暑)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백로(白露)가 오고 추석이 코앞에 오고 있다. 도시 생활에서 절기(節氣)가 무슨 감각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달력에 눈길이 자주 가는 것을 보면 태생이 농촌시골 촌놈이고 내 몸 어딘가에 아직도 쇠똥냄새가 배여 있고 삼배적삼의 숨결이 통하고 있는 때문일 것 같다. 사는 곳이 18층이라 달 밝은 밤이면 그래도 아파트 회색벽 사이로 추월색(秋月色)을 감상 할 수 있으니 그나마 감사할 일이다. 사실 맹수 우리 같은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계절의 변화에 둔감한 짐승(?)으로 변한지 오래된 터라 절기를 말할 정서도 감정도 마른지 오래다. 안양천변(安養川邊)에 칼날같이 기세를 치켜세우던 갈대잎도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구국(救國?)을 외치던 손에든 촛불도 가을 바람 앞에는 머리를 숙인다. 가을은 결실(結實)과 수확(收穫)의 계절이면서 한편으로는 잎을 떨구고 체중을 줄이고 대신 내공(內功)으로 기(氣)를 최대한으로 비축하여 다음세대를 이어갈 열매 맺을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풍성한 열매를 마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결실이 없는 외로운 사람도 많다. 어느 쪽이든 텅 빈 가을 들판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보면 가을은 금(金)에 속한다. 가을의 속성(屬性)은 색(色)은 흰색이고, 방위(方位)는 서쪽이고, 마음의 감정(感情)은 우울하고 슬프다. 신체부위는 폐(肺)와 대장(大腸)에 해당한다. 가을에는 폐(肺)가 약한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하고 반대로 폐를 잘 다스리면 폐질환(肺疾患)이 잘 치료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옷을 입을 때는 상의(上衣)는 백색(白色), 하의(下衣)는 검은색이 좋다. 차(茶)는 생강(生薑)과 계피(桂皮)가 좋다. 가을은 모든 기운(氣運)을 죽이는 숙살지기(肅殺之氣)를 근간(根幹)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적 기관으로 연결 할 때는 냉엄(冷嚴)한 사법부(司法府)에 해당한다. 겉으로는 수많은 관계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냉정(冷情)하게 가지치기를 해서 스스로의 근본(根本)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는 계절이 가을이다. 그래서 가을은 정리정돈(整理整頓)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이면 스스로도 모르게 엄숙해지고 또한 무겁게 가라앉기도 하는 것은 이런 가을의 본성(本性) 탓 때문이라 생각된다. -농월-
자오야제(慈烏夜啼) 밤에 우는 까마귀 慈烏失其母(자오실기모)-까마귀는 그 어미 잃고서 啞啞吐哀音(아아토애음)-깍깍 슬프게 소리 내며 晝夜不飛去(주야불비거)-밤낮으로 둥지를 떠나지 않고 經年守故林(경년수고림)-해가 바뀌도록 옛 숲을 지키네! 夜夜夜半啼(야야야반제)-밤마다 밤중에 울어대니 聞者爲沾襟(문자위첨금)-듣는 이의 옷깃을 적시네. 聲中如告訴(성중여고소)-그 울음소리 마치 하소연 하는 듯 未盡反哺心(미진반포심)-반포의 효심 다 하지 못하였든가 百烏豈無母(백오기무모)-모든 새들 어찌 어미가 없으리 만 爾獨哀怨深(이독애원심)-너만이 홀로 애원하는 정이 깊으니 應是母慈重(응시모자중)-아마 네 어미의 사랑이 두터워서 使爾無不任(사이무불임)-너로서 슬픔을 견디지 못 하였으리 昔有吳起去(석유오기거)-옛날 오기(吳起)는 집을 떠난 후 母歿喪不臨(모몰상불임)-돌아간 어미 상사에도 오지 않았으니 哀哉若此輩(애재약차배)-슬프다! 그 같은 무리들 其心不如禽(기심불여금)-그 맘 새만도 못하니 慈烏復慈烏(자오복자오)-까마귀야! 까마귀야! 烏中之曾參(오중지증삼)-넌 새들 가운데 증삼(曾參)이로다. 백낙천(白樂天) 까마귀보다 못한 인간! 미물(微物)인 새 조차도 효심(孝心)을 지니고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어찌 불효(不孝)를 저질러서야 되겠느냐 ! 아래 이야기는 2004년 5월 8일 어버이날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기독교 방송에서 설교하는 내용 중에 가슴을 울리는 사연이라 내용을 요약하여 메모한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조용기 목사가 경영하는 양노원에서 실제 일어난 이야기다. 치매 걸린 할머니 한분이 아들에게 버림을 받고 양노원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보퉁이 하나를 항상 갖고 있었는데 절대로 남에 보이지를 않고 화장실에 갈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잠잘 때도 베고 끼고 자고 있었다. 같은 친구 할머니가 무슨 보퉁인지 물어도 대답도 안한다. 아들의 주소를 물어도 대답을 않는다. 그런데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죽고난후에 보퉁이를 풀어보니 500만원 지폐가 보퉁이 속에 차곡차곡 들어있고 아들의 주소가 있었다. 그리고 유언장이 있었는데 유언 내용은 내가 죽고 나면 아들에게 이 500만원을 주라고 쓰여 있었다. 아들을 찾으니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아들이 치매의 어머니를 버린 것이다. 아들은 치매의 어머니를 버렸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지 않고 그동안 모아둔 돈을 아들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에 아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어머니고 이것이 자식 이다.!! 설교 끝에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목사면서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하도 괘씸한 불효자식이라서 차라리 그 돈을 자식에게 주지 말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쓸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참고 *오기(吳起)-춘추전국시대 손오병법(孫吳兵法)에 나오는 오자(吳子)를 말한다.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집에 오지를 못했다. *증삼(曾參)-증자(曾子)를 말하며 공자의 수제자(首弟子)로서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여 자사(子思)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상(儒敎思想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동양(東洋) 5대 성인(聖人)의 한사람이다. 효경(孝經)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농월-
소심난(素心蘭) 昔嘗客于餘杭(석상객우여항)-일찍이 여항이란 곳에 있을 때에 人有種蘭盆中人相惠者(인유종난분중인상혜자)-난을 서물로 주는 이가 있어 置之几案之上(치지궤안지상)-그것을 책상위에 받아 놓고 方其應對賓客酬酢事物(방기응대빈객수초사물)-찾아온 손님과 한참 대화에 취하여 未覺其有香焉(미각기유향언)-난화의 향기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夜久靜坐明月在牖(야구정좌명월재유)-손님이 간 뒤 창에 비친 달빛이 고요한데 國香觸乎鼻觀(국향촉호비관)-난화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淸遠可愛(청원가애)-맑고 아름다운 그 향기는 마음으로 사랑 할 뿐이요 而不可形於言也(이불가형어언야)-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제현(李齊賢)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선생은 고려시대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조맹부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킨 학자이다. 위의 난(蘭)의 사진은 필자가 6년 전에 종로 5가를 지나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소심난(素心蘭) 세촉을 산것이다. 좀 고급스런 난을 사고 싶었지만 마음에 드는 종류는 가격이 10만원을 훌쩍 넘었다. 사실 우리 같은 초보자들은 향기가 좋고 번식이 잘되는 소심난(素心蘭)이 제격이다. 소심은 꽃 바탕에 점이 없고 취록색(翠綠色)을 우선으로 치며 꽃줄기도 가늘고 맑은 것이 좋다. 소심(素心)이란 본디 지니고 있는 고운 마음씨를 뜻하는데 물 만주고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도 5년 동안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워 주었다. 인정머리 없는 주인에 비하여 착한 이름대로 과분한 향기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난(蘭)을 키워보면 다른 화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작은 꽃에서 어쩌면 그런 은은하면서 짙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향기가 나올 수 있을까! 꽃의 향기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라일락도 있고 기생 같은 농염한 자태를 자랑하는 장미향도 있다. 곡선(曲線)의 아름다운 난(蘭)의 잎이나 작지만 야무지고 소박한 꽃을 보면 문인(文人) 선비들이 왜 난을 군자(君子)로 일컬으며 사랑한지를 알 수 있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난을 제대로 감상 하려면 “한 개의 화분”이면 족하다. 이유는 난(蘭)이라기보다는 귀한 친구요 사랑하는 연인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는 마치 장사처럼 수십 종을 키우기도 한다. 많으면 정(情)이 얕아지는 것 아닌가? 『조선 명현(名賢)중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 매화(梅花)를 항상 애완(愛玩)하였으므로 매화에 대하여 읊은 시가 무려 4500수가 있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같은 분은 난(蘭)을 이처럼 사랑하였으니 만일 꽃에 나타난 사랑으로서 그 인품을 짐작 할 수 있다면 매화를 사랑하던 퇴계(退溪)선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난(蘭)을 사랑하던 익재(益齋) 선생에 대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그 풍류를 기릴 것이다.(이상은 문일평의 화하만필(花下漫筆)의 글이다)』 위의 소심난도 며칠 전부터 꽃대가 올라오고 몽우리가 꿈틀대더니 꽃물을 터뜨리고 있다. 깊은 산속에서 유향(幽香)을 풍기며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은자(隱者)의 고고함이 소심의 본연인데 속세에 찌든 중생의 마음을 달래려 이 복잡한 회색 콘크리트 속에서 다소곳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소심난(素心蘭)을 사랑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시한수를 소개한다. 山中覓覓復尋尋(산중멱멱부심심)-산중에서 찿고찿고 또 찿아 覓覓紅心與素心(멱멱홍심여소심)-소심난과 더불어 홍심난 찾았구나 慾奇一枝嗟遠道(욕기일지차원도)-한 가지 보내려 하나 아 길이 멀어 露寒香冷到如今(로한향냉도여금)-이슬차고 향기 싸늘한 오늘에 이르렀도다. -농월-
부용(芙蓉) 흙탕물 속에핀 연꽃 人愛衆卉茂(인애중훼무)-사람들 화려한 꽃을 좋아하나 我憐芙蓉淸(아련부용청)-나는 연꽃의 맑음을 좋아하노라. 亭亭出深沼(정정출심소)-우뚝하게 깊은 못 속에서 나와 濯濯當回楹(탁탁당회영)-깨끗하여라, 당당히 난간을 둘렀구나. 纖莖立更直(섬경립갱직)-가냘픈 줄기 곧추 서 있고 危朶高不傾(위타고부경)-뾰족이 높은 가지 기울지도 않는구나. 馨香匪外襲(형향비외습)-그윽한 그 향기 속에서 이어고 穠艷眞天成(농염진천성)-농염한 자태가 자연스럽구나. 後凋惜無華(후조석무화)-늦게 시드는 소나무 꽃이 없어 아쉽고 碧鮮徒自貞(벽선도자정)-대나무는 다만 스스로 곧기만 하도다. 亮比君子德(량비군자덕)-참으로 이 연꽃은 군자와 같아서 宜寄美人情(의기미인정)-미인의 정 여기에 붙음이 마땅하도다. 장유(張維) 지금 연꽃(蓮花연화)이 약간 늦었지만 매우 아름답게 피고 있습니다. 연꽃을 부용(芙蓉)이라고도 하는데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입니다. 연꽃은 비록 흙탕물에 뿌리와 몸통이 잠기고 있지만 물 위로는 맑고 고운 빛깔의 꽃을 피우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연꽃잎에는 한 방울의 흙물도 묻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꽃말이 붙게 되었답니다. 연꽃의 모양도 연꽃잎이 위쪽을 향해 핀 것을 앙련(仰蓮)이라하고 아래쪽을 향해 핀 꽃은 복련(覆蓮)이라 합니다. 불교에서 연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생(生)과 사(死)를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異)로 설명합니다. 즉 생겨남(꽃이피고-태여나고)과 없어짐(씨앗-죽음)이 별도의 둘이 아니라 깨닫고 보면 생(生)과 (死)는 하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연꽃에 비유한 까닭으로 다른 식물의 꽃들은 꽃이 피고서 꽃이 진후 열매가 영글어 씨앗을 맺는데 반(反)하여 연꽃만은 유일하게 꽃이 피는 동시에 씨앗이 같이 생겨난다는 것이 연꽃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꽃과 씨앗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찰을 들어가면 반드시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처음 만나는데 이 문을 지나면 불이문(不二門)문이 나옵니다. 이 두문의 의미가 연꽃이 꽃과 열매가 같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부처님이 생(生)과 사(死) 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같은 뜻을 상징하는 문입니다. 일주문(一柱門)의 뜻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성한 가람(伽藍절)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煩惱)를 불법(佛法)의 청량수(淸涼水)로 말끔히 씻으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문입니다. 불이문(不二門)이란 불교의 대명사로 불리며 모든 사물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오, 선(善)과 악(惡)이 둘이 아니오, 부처와 중생이, 깨끗함과 더러움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불이(不二)사상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유마경(維摩經)에 있습니다. 한때 유행하던 신토불이(身土不二)란말도 여기서 연유(緣由)한 것입니다. 부처는 대부분 연꽃 위에 앉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相법회장소)에서 일만이천명의 사부대중(四部大衆스님과 재가 불자) 이 부처님의 설법하시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설법은 안하시고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조용히 미소 짓고 앉자 계셨습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부처님께서 왜 저렇게 아무말씀을 안하시고 연꽃 한 송이만 들고 계실까? 모두들 궁금하고 있는데 일만 이천 대중가운데 제자인 가섭존자만이 부처님의 말없이 미소 짓고 계신 뜻을 알았다 합니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고 미소 짓는 것은 깨달음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꽃은 불교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부처님의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기에 연꽃하면 곧 부처님의 정신을 담고 있는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꽃이 불교의뜻을 내포하고 있는 열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離諸染汚(이제염오)-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不與惡俱(부여악구)-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戒香充滿(계향충만)-연꽃이 피면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만 가득하다. 本體淸淨(본체청정)-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잎을 유지한다. 面相喜怡(면상희이)-연꽃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면 마음이 절로 온화하고 즐거워진다. 柔軟不澁(유연부삽)-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여 충격에 잘 부러지지 않는다. 見者皆吉(견자개길)-연꽃을 꿈에 보면 길(吉)하다고 한다. 開구具足(개구구족)-연꽃은 피는 동시에 필히 열매를 맺는다. 成熟淸淨(성숙청정)-연꽃은 만개했을 때의 색갈이 곱기로 유명하다. 生己有想(생기유상)-연꽃은 날 때부터 다르다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농월-
샤론의 백합화(百合花) 開满花瓣的(개만화판적)-가득 핀 꽃잎 조각들 你那一个眼神(니나일개안신)-너의 그 눈빛이 让我相信你就是我(양아상신니취시아)-네가 또 다른 나 라는걸 믿게 하는구나 等的那个人(등적나개인)-기다리던 그 사람 零点三公分(령점삼공분)-12시 擦肩的一瞬(찰견적일순)-어깨를 스친 그 순간 心里感觉一种暗示(심리감각일충암시)-내 마음속에서 어떤 암시를 느끼네! 会不会就是缘份(회불회취시연빈)-인연인지 아닌지.. 百合花盛開(백합화성개)-백합꽃이 활짝 피네 在我的心海(재아적심해)-내 마음의 바다가 追随我而来(추수아이래)-나를 뒤쫓아 따라오네 是不是你的爱(시불시니적애)-네 사랑인 것이니? 当微风吹动我長發(당미풍취동아장발)-산들바람이 불어와 내 긴 머리카락을 날리고 你回头刹那(니회두찰나)-니가 돌아보던 그 순간 一朵盛开的百合花(일타성개적백합화)-한 송이 활짝 핀 백합꽃 你爱我吗真的爱我吗(니애아마진적애아마)-날 사랑하니 정말 날 사랑하니 给我温柔的回答(급아온유적회답)-내게 따뜻하게 대답을 해주렴. 중국(中國) 백합화가(百合花歌) 기독교 구약 신약 성경을 읽으면 신앙적인 의미 이전에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 수 있고 매우 흥미 있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므로 해서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시비(是非)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속에는 여러 가지 식물이 많이 등장 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상수리나무 감람나무 백합화등 필자가 정리한 자료만 해도 40여 종류가 됩니다. 그중에 합환채(合歡菜)라는 식물(약초종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간 시조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 때에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창세기 25장 5절) 이삭과 아내 리브가 사이에 쌍둥이 형제를 낳는데 장자는 에서이고 차자는 야곱입니다(창세기 25장23절)
이스라엘 전통에는 장자에게 모든 상속을 주는 원칙이 있는데 아버지 이삭이 병들어 눈을 감고 누워 있을 때 둘째아들 야곱이 엉큼한 마음을 먹고 어머니와 짜고 사냥 갔다 와서 배고픈 형 에서를 죽 한 그릇으로 매수하여 따돌린 후 장자 상속의 축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25장 29절) 그 후 야곱은 형을 속인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14년을 머슴살이를 하다가 독립하여 외삼촌의 큰딸 레아와 작은딸 라헬 두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창세기 29장 22절) 야곱은 형제인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 두여자를 아내로 두었는데 동생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언니 레아는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은 애기를 낳지 못합니다. 어느날 레아의 아들 루벤이 합환채(合歡菜)채라는 정력제 약초를 가져와 어머니 레아에게 줄려고 합니다. 이때 애기 없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임신을 할 목적으로 그 약초를 자기에게 주면 그 대신에 오늘밤에는 남편을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합환채의 효과 있었는지는 몰라도 라헬은 기독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요셉을 낳아서 이집트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고 대 장정의 이스라엘 역사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가장 대우를 받는 것은 단연 백합화(白合花)입니다. 백합화는 샤론의 대표적인 꽃입니다. 샤론은 텔아비브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연안의 대표적인 해안평야지대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아무도 돌보지 않아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아 옷도 주지 않은 들판에 혼자 자라고 있는 백합화(白合花)지만 그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영광을 누린 솔로몬왕도 이 백합화 보다 못하다. 비록 이 백합화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보잘 것 없는 들풀이지만 하나님이 영광을 입혔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8-30절) 그리스 신화에는 아담과 이브가 뱀의 꾀임에 빠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이브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백합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 신화에 옛날 아리스라는 예쁜 소녀가 있었는데 소녀를 탐내는 못된 성주가 있었습니다. 아리스는 갖은 방법으로 성주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힘이 모자랐습니다. 아리스는 성모마리아 앞에 꿇어 기도를 올렸습니다. 마리아는 어여쁜 아리스를 한송이 아름다운 향기 높은 백합꽃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합은 기독교의 의식에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백합화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에서 전해오는 백합에 대한 이야기가 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을 산책을 할 때 동산의 모든 꽃들이 다 슬픔에 잠겨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백합은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예수님을 위로하려고 자만하였습니다. -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롭고 가장 고결한 꽃이다- 예수님은 오만한 백합을 측은히 생각하면서 그 곁에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화가 난 달이 구름 속에서 뛰어나와 건방진 백합을 야단 쳤습니다. 백합은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머리를 숙여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머리를 들지 못하고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듯 한 다소곳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농월-
고시(古詩) 홰나무 구멍의 뱀 燕子初來時(연자초래시)-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 語不休(어부휴)-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 語意雖未明(어의수미명)-말하는 뜻 분명히 알 수 없지만 似訴無家愁(사소무가수)-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 楡槐老多冗(유괴로다용)-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멍 많은데 何不此淹留(하부차엄유)-어찌하여 그 곳에 깃들지 않니? 燕子復(연자부)-제비 다시 지저귀며 似與人語酬(사여인어수)-사람에게 말하듯 楡冗款來啄(유용관래탁)-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 槐冗蛇來搜(괴용사래수)-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다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이 시는 다산의 고시(古詩) 27수중의 하나로서, 지배층의 횡포와 백성들의 서러움을 우화(寓話)적으로 노래한 한시이다. 뱀과 제비, 황새와 제비를 대립시킴으로, 황새나 뱀의 횡포에 시달리는 민중의 서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계속되는 제비의 울음소리, 제비의 가난과 서러움을 호소하는 것으로, 제비가 느릅나무, 홰나무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 사람에게 말하는 듯 한 제비의 소리, 느릅나무 홰나무 구멍을 뱀이 뒤진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뱀을 대하는 감정은 나라마다 다르게 보인다. TV화면을 통해 보면 뱀을 가족같이 여기는 동남아 여러 나라도 있고 뱀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예사로 뱀을 만진다. 우리나라도 뱀을 애완동물(愛玩動物)이라 하여 자연스럽게 만지는 사람을 간혹 보지만 대부분은 징그러운 동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뱀은 왜 징그럽게 보이고 느껴질까? 뱀장어, 가물치, 개불, 갈치, 숭어등 물고기는 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도 이들은 식품으로 식탁에 올라 사람과 가까이 있는데 왜 뱀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혐오스럽고 무서울까? 뱀은 1억 3천만년의 진화(進化)를 거쳐 왔다지만 “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몸, 미끈미끈하고 축축해 보이는 피부와 찬 촉감, 입을 쩍 벌리면 날카로운 이빨과 허공을 날름거리는 긴 혀와 독(毒)은 공포와 혐오(嫌惡)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첨단 과학으로 뱀독을 의약(醫藥)으로 사용하고 있다지만 아무튼 인간 생활에서 뱀의 존재는 음흉하고 신비스럽게 경계되는 파충류다. 종교적인 면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뱀에 대하여 정반대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동물은 익투스(ΙΧΘΥΣ헬라어)라는 물고기다. 이 물고기는 로마의 종교 박해 때 기독교인들은 친구와 적(敵)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의 은신(隱身)하는 곳에 물고기 그림을 새겼다. 지금도 간혹 기독교 신자의 자동차 뒷부분에는 이 물고기의 그림을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의 개인 생각으로는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부근에서 유월절 가까운 날에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五餠二魚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게 한 사실과(요한복음 6장 9~13절),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먼저 걸린 물고기 입에 돈 한세겔얻을 것이니(마태복음 17장 27절)등의 증거에 의하여 상징어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뱀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든 후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기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고 경고 하였는데(창세기 3장 3절) 뱀이 간교(奸巧)하게 여자인 하와를 꼬이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4절)하였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말하고(창세기 3장 1절) 뱀과 여자는 대대로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여자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창세기 3장 15절)고 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와 뱀은 서로 상극(相剋)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뱀은 동물로서의 뱀이 아니고 영적(靈的)의 사탄을 의미하며 하와는 인간 여자가 아니고 세상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뱀은 특별한 믿음의 존재다. 카빌라성의 왕자인 싯다르타(석가모니)는 룸비니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 태어났다고 한다. 전등록(傳燈錄)의 기록에서 석가세존은 태어나자마자 사방 일곱걸음을 내딛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말의 뜻은 석가가 태어났을 때 외쳤다고 하는 탄생의 제 1성(誕生偈탄생계)으로. 즉 “이 우주만물 중에서는 내가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뜻으로 이것은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實存性)을 상징하는 말이며, 석가의 탄생이 속세로부터 성스러운 세계로 벗어남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스러운 말도 요즘 세간(世間)에서 잘못이 용하여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그런 아집(我執)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전등록(傳燈錄)이란 중국 송나라때 도언(道彦)이란 고승(高僧)이 쓴 불서(佛書)로서. 석가모니 이래의 역대의 법맥(法脈)과 그 법어(法語)를 수록한 책으로서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절 이름이나 불교에서 자주 쓰는 전등(傳燈)이란 말은 이 책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마야부인은 석가세존이 태어난 후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아쇼다라 공주와 결혼하고 라훌라(羅聳羅장애아)라는 이름의 아들을 둔다. 후에 라훌라는 석가의 10대 제자 중의 하나가 된다. 싯다르타 태자는 사문출유(四門出遊-동서남북 문에서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후 29세 때 출가(出家)하여 설장산(히말라야산)으로 들어가 6년간의 고행(苦行)을 한다. 그러나 고행으로도 깨달음 얻지못하고 고행이 부질없음을 깨닫고는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 계절에 맞지 않게 거대한 먹구름의 폭풍우가 모여들고 있었다. 이때 한 마리의 커다란 코브라 뱀 무찰린다(Muchalinda)가 나무뿌리 사이의 구멍 속에서 살고 있었다. 코브라 뱀은 먹구름이 부처님을 해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기의 몸을 꼬아 부처님의 성체(聖體)를 7번 감쌌으며, 코브라 뱀의 일곱개 머리의 커다란 두건(코브라의 목 부위가 풍선처럼 부풀은 곳)을 우산처럼 활짝 펴서 폭풍우로부터 부처님의 머리를 보호했다. 7일째 되던 날 폭우가 가라앉자 무찰린다는 유순한 젊음이로 변하여 양손을 합장한 채 부처님께 몸을 구부려 경배하였다 한다. 이상으로 기독교의 뱀이나 불교의 뱀도 종교라는 특수성에서 신비주의속 동물의 의미를 담는다. 엄격하게 말해서 원시종교(原始宗敎)에서 동물을 대상으로 삼는 토테미즘(totemism) 이라 볼 수도 있다.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이 남자와 교접하지 않은 마리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고, 고대 중국의 탕왕(湯王)을 도와 은왕조(殷王朝)를 일으킨 이윤(伊尹)이 뽕나무 속에서 태어나고. 신라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곰이 웅녀(熊女)로 변하여 환웅과 결혼하여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는다. 로마의 건국 신화에 로물루스도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란다. 이처럼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유(固有)한 신화(神話)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 종교의 이야기는 진짜고 남의 것은 가짜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하여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 간곡히 드리고 싶은 말은 다른 종교의 경전(經典)을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타 종교의 경전을 읽어보면 “막무가내로 내가 믿는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부정”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꽉 막힌 신앙관(信仰觀)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성경, 불교 화엄경 금강경, 천도교의 동경대전, 이슬람의 코란, 역경(주역), 논어, 노자, 중용, 맹자등을 읽어보면 내가 믿는 종교와 비교가 되고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가 믿는 신앙은 다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앙이란 믿지 않은 사람의 객관적인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하다. 좋게 보이고 선하게 보이는 신앙을 택하게 마련이다. 남을 미워하고 남의 종교를 미워하는 신앙을 좋게 볼 리가 만무하다. 결국 세월이 흐르면 그런 신앙은 외톨이가 되고 왕따 당하기 마련이다. 이런 경전들을 읽어보지 않고 목사나 스님의 말만 믿고 타종교를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의 분별없는 맹신(盲信)을 자인(自認)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부처님등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의 개창자(開創者)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신앙의 풍조가 우리사회에 만연(漫然)되어 신앙의 참된 모습을 잃고 사회 분열과 갈등을 초래 하고있다. -농월-
원월(圓月) 추석 전날 둥근달 未圓常恨就圓遲(미원상한취원지)-둥글어지기 더디어 안타까이 여겼는데 圓後如何易就虧(원후여하이취휴)-둥글어진 뒤에는 어찌 쉽게 이지러지는가. 三十夜中圓一夜(삼십야중원일야)-서른 밤중에 하룻밤만 둥그나니, 百年心事摠如斯(백년심사총여사)-한평생 사는 심사도 온통 이와 같구나. 신천(辛蕆) 추석을 하루 앞둔 둥근달은 추석날 보름달보다 더 밝게 보인다. 내일 추석이 기다려져 달을 자주 보기 때문일까. 추석은 당일 보다 추석 준비를 하는 하루 전날이 더 마음을 설레인다. 추석 옷이나 신발은 며칠 전 오일장날에 다 사 두었다. 어머니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음식 만들 준비에 바쁘다. 추석 음식은 주로 밤중에 둥근달 아래서 만든다. 추석이 가을이래도 날씨가 아직 더워서 그때는 냉장고도 없었기 때문에 일찍 만들어 놓으면 쉬기 때문에 되도록 내일 추석날 가까이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설은 질어야 좋고 추석은 맑아야 좋다.”는 말이 있다. 음력설에 눈이 자주 오면 보리농사에 좋고 추석 때는 맑은 날이 많아야 일조시간이 많아 결실이 좋아 풍년이 든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같다. 올해는 맑은 날이 많아서 과일도 달고 벼농사도 풍년으로 생각된다. 맑아야 둥근달도 볼 것 아닌가 또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도 있다.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잘 입고, 음식은 한가위날처럼 잘 먹고 살고 싶다는 말이다. 추수철이니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뜻일 게다. 이런 속담을 보아도 옛날부터 우리는 넉넉하지 못한 나라인 것같다. 음식 만들기를 거의 마치고 추석날 입을 빨래한 옷을 울타리나 평상에 늘어 이슬을 마친다. 아침에 숯불다리미질에 눅눅함을 위해 서다. 밤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추석 준비를 하다가 허리를 펴고 문득 고개를 들면 둥근달이 남산위에 휘영청 하게 떠 있다. 초가집 지붕위에는 하얀 박꽃이 둥근 달빛에 더욱 희게 보인다. 헛간 앞에 세워둔 지게가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워 마치 헛것(도깨비)같이 보인다. 끼~드르르 벌레 소리만 드린다. 순간 한적(閑寂)함을 느낀다. 저 달은 한 달 내내 지고 뜨는 달인데, 휘황한 보름달은 한 달 중에 하룻밤에 불과하고 다시 이지러지기 시작한다. 인생의 삶이 영광과 번성함은 순간이고 힘들고 고쇠(枯衰)한 나날임을 저 둥근달이 보여 주고 있다. 둥근 달은 추석 보름을 전후한 달이다. 가을의 둥근달을 얼음처럼 차고 맑게 보이는 달이라 하여 빙륜(氷輪)이라 한다. 또 옥(玉)으로 만든 고리 같다고 해서 옥환(玉環)이라고도 한다. 황진이의 유명한 “반달”이란 시에서도 옥으로 만든 반달을 노래하고 있다. 수단곤륜옥(誰斷崑崙玉)누가 곤륜산의 옥(玉)을 잘라와서 재성직녀소(裁成織女梳)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는가! 수척벽공허(愁擲碧空虛) 수심 겨워 던진 빗이 반달이 되었네---- 가을달이 휘영청 하게 밝게 비춘다는 뜻으로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이란 글구도 있다.
둥근 가을 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과 같다고 하여 오심사추월(吾心似秋月)이라는 글구도 있다 이런 모든 정서(情緖)들은 추석 둥근달 아래서 느끼는 일들이다. -또 누가 울었는지 풀잎마다 눈물 같은 이슬방울에 둥근달이 비친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病)같이 보여서 그 사연을 둥근달만 알겠지- 『달달무슨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어디떳나 (남산/동산)위에 떳지』 -농월-
추석(秋夕) 秋夕來思欲昆陽(추석래사욕곤양)-추석날 내 고향 곤양 생각 더욱 간절해도 鴻雁南飛不可書(홍안남비불가서)-남쪽 가는 기러기 편에 편지 한 장 전할 수 없네! 欲登高處望故鄕(욕등고처망고향)-높은 곳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보고 싶어도 新林近邊高山無(신림근변고산무)-신림동 부근에는 높은 산이 없구나. 농월(弄月) 추석인사 드립니다. 풍성한 한가위 행복하게 보내 십시요. 그리고 더욱 건강하십시오. 그동안 더 자주 만나서 정을 나누지 못한 빈곳은 사랑하는 가족의 웃음과 추석이 주는 결실의 축복으로 메워주옵소서. 지난여름 뜨거운 태양의 열정을 가슴속 소중히 간직 하셔서 단풍 보다 더 붉은 정열의 에너지로 가을을 맞이 하소서. 높고 맑은 하늘과 함께 항상 좋은 일만 생각하시고 언제나 웃음으로 마음과 육체을 건강케 하는 은혜를 받으소서. 김종곤 올림
성묘(省墓) 추석 성묘 省楸卅載又今留(성추삽재우금유)-성묘한지 삼십 년만에 다시 찾는 추석날 依舊森松秀一邱(의구삼송수일구)-무성한 소나무는 옛 모습 그대로네 十世兒孫無限意(십세아손무한의)-십세손은 끝없는 생각을 하며 離亭步步故回頭(이정보보고회두)-묘소를 떠나면서 뒤돌아본다. 강흡(姜恰) 추석을 맞이할 때마다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성묘(省墓)입니다. 성묘(省墓)의 뜻은 성(省)자는 살핀다는 뜻이고 묘(墓)자는 해가 저문다는 저물모(暮)에서 연유하여 날일(日)자를 빼고 흙토(土)자를 넣어 무덤묘(墓)자를 만든 것입니다. 무덤묘(墓)자는 해가 저문 “어두운 땅”이라는 뜻입니다. 즉 명지(冥地)를 말합니다. 명지(冥地)란 “땅아래 세계의 밑바닥의 어두운곳을 말하며 사람이 죽은 후에 백(魄)이 머무르는 곳(地下界的最底 冥地,是人死后其 魄的居所)”입니다. 성묘(省墓)는 글자그대로 조상의 산소를 살핀다는 뜻으로 시간나는대로 찾아가서 흙이 무너진 것은 없는지 나무는 제대로 자라는지 등을 살피고 손보는 우리나라의 풍속입니다. 생활이 바빠서 평일에는 자주 갈수 없으니 설, 추석, 한식(寒食)등의 명절을 택해서 성묘를 합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명절에 고향을 찾는 발길은 여전하고 산소를 찾아 배묘(拜墓)도 하지만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시골이 도시화되고 인륜(人倫)과 조상묘에 대한 전통(傳統)이 많이 변질되어 성묘의 풍속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특히 추석 전에 벌초(伐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요즘에는 낫을 사용하지 않고 제초기를 사용하여 많이 편리하여졌지만 일손이 부족하거나 자손이 찾지않아서 산(山)인지 무덤인지 분간할수 없는 분묘도 많습니다. 특히 옛날에 명색이 명당(明堂)이라고 자리 잡은 곳은 높은 산에 많이 위치하여 차도 못 들어가는 험한 산길이라 벌초한번 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이런 곳일수록 풀을 베지 않은 묘가 많습니다. 사실 벌초 성묘는 순전히 자손의 효(孝)와 성경(誠敬)의 행위입니다. 도시 근교에 있는 사람들은 가까워서 날을 정하여 쉽게 벌초를 할 수 있지만 아직도 고향에 조상의 무덤을 둔 사람들은 일 년에 한번이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조상에 대한 정성(精誠)의 문제로서 효경(孝敬)사상이 엷어진 이유도 있지만 급급하게 살아가는 사회 현실이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골에 돈을 주고 벌초를 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성의(誠意)가 되겠습니까. 형식에 불과 하지요. “내 살아생전까지는 힘들더라도 조부모님 벌초를 직접 하자” 고 하면서 강행(?)을 하고 있지만 내가 죽고 나면 끝날 것 같습니다. 요즘 제 할아버지 함자(銜字) 모르는 손자가 대부분인 세상에 진주까지 내려가서 또 몇십리를 등산을 하는데 조부 증조부 묘소는 고사하고 제부모 묘인들 벌초하겠습니까. 지금도 한번 내려갈 때는 큰 계획을 세우는데--- 필자의 분묘에 대한 평소의 생각입니다. 신문 에도 보도되었지만 우리나라 화장(火葬)율이 60%를 넘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이 90%를 넘는다고 합니다. 요즘 특히 불교 방송광고에서 화장(火葬)후 납골당(納骨堂)선전을 많이 하는데 납골당도 집을 지어야 되고 보관하는 석축(石築)물 등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도 세월이 흘러 시설이 증가하면 보기 흉하게 되고 또 관리를 잘못하면 벌레가 생기고 새로운 공해와 혐오(嫌惡)시설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고 자연을 훼손(毁損)합니다. 화장한 골분(骨粉)을 산에 뿌리거나 강에 흘려보내는 것이 제일 깨끗하고 생(生)과 사(死)의 결말이 분명한 것인데 자손들이 너무 서운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수목장(樹木葬)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사용자의 편리한 방법으로 법을 정하여 “선택된 나무” 밑에 골분(骨粉)을 안장(安葬)하고 위에는 평평하게 잔디를 깔고 꽃을 심고 나무를 관리하면 산경(山景)도 깨끗하고 자연도 보존하고 자손들의 정성도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님의 묘를 수목장(樹木葬)으로 이장(移葬)할 계획을 하고 저의 내외(內外)도 죽고 나면 서울 가까운 곳에 수목장을 자식들에게 의논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전통이 중요하지만 마지못해 하고 계속이어 내려가지 못하는 전통은 고쳐서 전승(傳承)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월-
덩쿨속 외로운 무덤 路傍一孤塚(노방일고총)-길가에 외로운 무덤하나 子孫今何處(자손금하처)-그 자손은 지금 어디에 있을꼬? 惟有雙石人(유유쌍석인)-오직 한 쌍의 석상(石像)만이 長年守不去(장년수불거)-오랜 세월 지키며 떠나지 않네. 김상헌(金尙憲) 가을 수풀 산길에 외로운 무덤 하나가 맹감덩쿨 잡초에 쌓여있다. 아카시아나무도 꽤 큰 것이 두 그루나 서있다. 사람들의 발길이라곤 나처럼 지나가는 사람뿐인 것 같다. 그것도 1년에 한두 번-- 자손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무덤 봉분(封墳)은 허물어져 잡초에 덮여있다. 무덤 앞에 세운 이끼낀 돌사람은 아직도 서있다. 석상(石像)을 세울 땐 집안의 영화가 영원 할 줄 알았겠지. 자손들은 그새 어찌되었는지 제 조상의 묘마저 돌볼 여력이 없고 길 가던 필자 같은 나그네가 공연한 탄식을 흘릴 뿐이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서의 부귀(富貴)가 죽은 뒤엔 무슨 소용이 있으랴.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래서 수의(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이 이름 없는 무덤을 보니 2002년 3월 22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 최영(崔瑩)장군의 묘를 답사한 기억이 난다. 문산가는 국도 필리핀 참전 기념비에서 우회전해서 조금가면 된다. 너무도 잘 아는 최영장군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본관은 동주(東州) 최 씨다. 동주(東州)는 고려 때 지금의 철원(鐵原)의 옛 이름이다. 요동 정벌의 대망을 꿈꾸던 우국(憂國) 노장은 뜻하지 않게 이성계의 정권찬탈의 희생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였다. 너무나 유명한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여견금여석汝見金如石)” 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최영장군의 말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는 최영장군의 말이 아니고 장군의 부친이 장군에게 교훈으로 한 말이다. 이 묘지를 어렵게 물어물어 찾을 때 마침 산 밑 동네에 70을 넘어 보이는 노인을 만났다. 다행이 이 노인이 좋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노인이 이 동네에 태어나서 지금가지 사는 동안에 풀 속에 방치되어 있어 한 번도 찾는 사람이 없어 이묘가 최영장군의 묘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1975년에 고양시에서 문화재로 복원할 때에야 알았다는 것이다. 자손들이 당시 역적으로 몰려 절손(絶孫)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찾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든 이름 없이 살아가는 시정(市井)의 촌부(村夫)든 죽고 나면 황량한 무덤만이 남는 것이다. 그 무덤에 대리석으로 제단을 쌓고 거창한 석상(石像)을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손들의 발길이 끊겨 잡초에 싸인들 무슨 슬픔이 있으랴. 다 산사람의 부질없는 허세며 몸부림일 뿐이다. 덧없는 인간의 욕망의 뒤끝은 한줌의 흙인 것을---- 이것도 가을이 시작되는 작은 상념(傷念)인가. -농월-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연산군 雨中風色政和寬(우중풍색정화관)-비속의 바람결이 화하고 훈훈하여 爛香桃李媚春山(난향도리미춘산)-향긋한 복숭아와 오얏꽃은 봄산에서 아양 떠네 銀臺必有慈親老(은대필유자친노)-은대에는 반드시 늙은 부모 모신이 있으리니 진取花時可奉歡(진취화시가봉환)-꽃 핀 때 이 시절에 즐거움 드리게 하라 연산군(燕山君)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KBS 가요무대에서 추석 특집으로 “고향의 노래”를 주제로 부른 노래 중에서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읜 탤런트 권은아가 어머니께 바치는 <불효자는 웁니다>와 김부자의 <일장상서>가 오늘따라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아득한 시간 저 멀리의 어머님을 그리워지게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추석 탓일까 아니면 가을 탓일까 어머니는 어떤 존재 이길래 이 몸은 아버지가 되었고 할아비가 되어 내가 죽어 묻힐 묏자리 찾는 나이에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또 어쩐 일인가요. 나이 들어서 청승을 떠는지 몰라도 힘들고 슬플 때는 정말 어머니가 그립다. 때로는 어머니를 붙잡고 한없이 울고 싶기도 하고 떼를 쓰고 싶기도 하고 힘든 일은 전부 어머니에게 매끼고 그냥 대문 밖으로 힝 달아나고 싶다. 어머니 ! 권은아가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면서 눈에 고인 눈물이 조명에 반사되어 금방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이 보인다. 어찌 권은아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아버지 어머니면서, 또 어머니 당신의 철부지 아들과 딸일 뿐이다. 위의 한시는 1506년 조선의 제 10대임금 연산군이 임금 된지 12년이 되는 3월 14일에 쓴 시다. 이 시에는 없지만 이 시를 쓰고 밑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어찌 위아래가 다르랴. 만약 이 때 한 번 어머니의 은혜를 갚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자신이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시에서 “꽃 핀때”는 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행복한 때를 말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못한 효도를 신하들이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시이다. “인생여초로(人生如草露) 회합부다시( 會合不多時)란 말은 “인생은 초로와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며 1506년(연산12) 9월 23일에 연산군이 후궁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잔치를 열고, 직접 가야금을 곡조를 탄 다음 위의 시를 짓고 탄식하였다 한다. 이때 가장 아끼던 후궁 장녹수가 눈물을 보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잔치가 있은 뒤 불과 열흘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연산군이 축출되고 장녹수 등이 처형된 것이다. “초로와 같은 인생”이라고 노래한 것은 연산군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으로 생각이 든다. 연산군 광해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임금은 항상 “폭군(暴君)”이라는 글자가 따라 다닌다. 역사는 너무 잔인하여 정치적으로 희생된 두임금을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죄인으로 두고 있다. 이 두임금의 왕릉 개방에 대하여 문화재청(042-481-4650)에 질문을 하여보니 도봉산 밑에 있는 연산군의 묘는 2007년에 개방이 되고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묘는 아직도 행정적인 절차와 예산문제로 정화가 안 되어 개방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역사 속에서 이 두 임금을 대할 때는 왕(王)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두 사람을 조명할 때가 많다. 특히 연산군은 3살 때 어머니 폐비 윤씨와 이별하고 6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당한다. 연산군도 한나라의 지존(至尊)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어른이 되고 어머니가 된 권은아도 백발이된 나도 어머니가 그리운데 6살된 연산군이 어머니를 잃은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물론 군주(君主)시절의 왕이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사정(私情)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이면에는 한 인간이 격은 아픔을 이해하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번 드라마에 나온 “내시 김처선”이 어린 연산군을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처럼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 정치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금의 정치도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속에서 36년 동안 나라를 잃었고 6.25를 당했고 지금은 김정일의 건강문제로 한반도에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국론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유사시에 철저히 대비하고 또다시 주변 열강들의 잔칫상이 되는 모스크바삼상회의(Moskva三相會議)의 신탁통치 재연이 없어야 할 것이다.
연산은 처음부터 폭군이 아니었다. 동궁(東宮) 시절 공부를 많이해 특히 시(詩)를 좋아했다. 재위 12년 동안 많은 시를 썼지만 폐위(廢位)된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워졌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된 시는 삭제할 수 없어 120여 편의 시가 보존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위에 소개되는 한시다. 그리운 어머니 ! -농월-
녹우당 가훈(綠雨堂 家訓) 1. 儉約(검약) 어려서부터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함을 즐기고 모든 것을 아껴서 생활하도록 해라. 2. 勤行(근행) 지금 해야 할 일을 바로 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마라. 3. 誠心(성심) 나에게 불행이 왔다고 그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4. 人義(인의) 이유 없는 우월감을 갖지 말고 상대보다 내가 무조건 낫다는 생각을 버려 라. 그 렇다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도 갖지 마라. 5. 仁情(인정) 집안 일가 친족 형제간에 우애를 갖고 어려운 이를 돌보며 부리는 아랫사람에 게는 언제나 따뜻한 미덕을 지녀 박대히 부 리지 말고 (노비와 종에게도) 일한 만큼 반드시 품삮을 계산해서 주어라. 6. 禮義(예의) 단정한 몸가짐과 단정한 말씨 바른 예의로서 상대를 대해라. 7. 廉恥(염치) 어떤 상황이든지 화는 늦게 낼수록 좋은 것이다. 먼저 화를 내 기보다는 상황을 먼저 인식하고, (절제絶制) 남의 성공을 일부 러 폄하하여 깎으려 하지 마라. 8. 信實(신실) 언제나 조급한 마음을 같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말로 평온함을 유지하며 생활해라. 9. 羞惡(수오) 어떤 상황이던지 이익을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진심과 정의 로서 말하고 행동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해라. 10. 崇慕(숭모)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 지고 항상 조상을 공경해라. 녹우당(綠雨堂) 『장사 하시는 분이 당시(唐詩)를 읽고 계시네요』 『네 그냥 시간 나면 간혹--』 『전라도가 예향(藝鄕)이긴 한디, 참 쉬운 책이 아닌디, 보아하니 젊은 분이 장사 하면서 그 어려운 당시(唐詩)를 손에 들고 있으니 보기 드문 일이요, 그리고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디』 『아니오, 뭘 알아서가 아니고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만 보는 겁니다. 예 저는 고향은 진주고 서울에 본사를 두고 광주에 회사 지점이 설립되어 제가 책임자로 와 있습니다.』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이야기가 계속된다. 『저 혹시 녹우당(綠雨堂)을 아시는 지요?』 『??-- 저 수원(水原)에 있는 효종대왕이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말입까?』 『아니, 녹우당을 제대로 아시네요. 그러면 그 녹우당이 해남에 있는 것도 아시는지--』 『모릅니다. 그냥 역사 속에서 집 이름정도만 알뿐입니다.』 『내가 해남 연동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의 주인이고 고산(孤山)선생님의 14대손(이름은 밝히지 않겠음)입니다.』 위의 대화는 약 25년전 필자가 전남 광주 금남로에 회사 지점에 근무할 때 전시매장(展示賣場)을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이며. 이를 계기로 해남 연동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과 주인도 알게 되었고 녹우당과 고산의 귀한 유품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4대손인 윤선생은 지식과 단아한 인품을 갖춘 인텔리로서 대기업의 경영자로 있다가 고산(孤山)의 녹우당(綠雨堂)의 대를 있기 위하여 낙향(落鄕)하게 된 것도 들어서 알았다. 녹우당(綠雨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가(外家)이기도 하다. 필자는 광주에 6년간을 근무하면서 호남의 역사 유적지를 틈틈이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답사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강진 다산초당, 해남 녹우당, 고경명장군 사당, 강진 도요지, 의제 허백련의 춘설헌, 진도 운림산방, 목포 남농 허건의 기념관, 강진 영랑 김윤식 옛집, 여수 진남관,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 광주 충효동 환벽당, 월출산 도갑사, 녹동 소륵도, 순천 연자루 팔마비, 순천 낙안면 낙안읍성, 송광사, 해남 대흥사,----- 담양 소쇄원, 전주 경기전, 고창읍성 공복루, 부안 이매창묘, 담양 식영정, 담양 고서면 송강정, 창평 초등학교(창평의숙) 남원 광한루와 춘향허묘, 순창 귀래정, 정읍 정봉준 고택, 황토현 전적지, 고창 죽림리 고인돌군, 고창 선운사 미당 시비, 등---- 이 지면에서 다 열거 할 수 없이 많은 곳을 찾을 기회가 되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지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영업개척지에 어려움도 많았는데 그때 호남의 지인(知人)들이 부족한 필자를 이끌어주고 도와주셔서 대가 없이 임기를 마치게 되어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해남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은 사적 제167호로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고택(古宅)으로 조선조 17대 효종(孝宗)이 사부(師傅)인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던 것을 일부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서, 현재는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 한다. 녹우당은 형식과 규모에 있어 호남의 대표적인 고건축물로 인정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해남윤씨(海南尹氏) 녹우당(綠雨堂)을 가장 선비 집안이요 양반이요 명문가로 꼽고 있다. 그것은 고산 윤선도라는 걸출(傑出) 인물을 때문이 아니다. 고산(孤山)선생의 사후(死後) 약 3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란(戰亂)과 일본 강점 36년, 6.25 여순반란사건 등의 사회 혼란이 있을 때마다. 후손들이 목숨을 걸고 고산의 유품을 피신시킨 것이다. 고산의 유품을 한 점도 훼손 없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우리 국민에게 문화재로 전달된 공로는 해남윤씨(海南尹氏) 후손들의 선조(先祖)의 유품을 지키고자 하는 높은 정신의 결과라 생각한다. 어떤 가문에는 조상의 유품을 팔아서 재산으로 사용하는 못난 후손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내일 녹우당이 계속됩니다) -농월-
녹우당의 정관(靜觀) 閑來無事不從容(한래무사불종용) 한가로워진 뒤 어떤 일이나 마음이 차분 해지고 睡覺東窓日已紅(수각동창일이홍) 눈을 뜨면 동창에는 이미 해가 붉다 萬物靜觀皆自得 (만물정관개자득) 우주만물을 고요히 살펴보면 모두 제 분수대로 편안 하고 四時佳興與人同 (사시가흥여인동) 네 계절은 인간과 하나 되어 돌아간다 道通天地有形外 (도통천지유형외) 우리가 믿는 도는 천지간 형체 없는 것에 까지 이르고 思入風雲變態中 (사입풍운변태중) 모든 것 자연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 때 내 마음 달관 된다 富貴不淫貧賤樂 (부귀불음번천락) 부귀에 흐트러지지 않고 빈천해도 굴하지 않으면 男兒到此是豪雄 (남아도차시호웅) 사나이 이 경지에 이르면 영웅호걸이 아니겠는가 정호(程顥) 정호(程顥1032~1085)는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로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송 성리학)의 중핵(中核)을 이루었다. 녹우당 사랑채에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가 중심에 자리하고 좌측에는 정관(靜觀)이라는 글씨가 있다 정관(靜觀)의 뜻은 무상(無常)한 현상계(現象界) 속에 있는 불변(不變)의 근본(根本)을 마음의 눈(心眼심안)에 비추어 바라보는 깊은 수행(修行)의 정신세계를 말하며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측에는 운업(芸業)이라는 글씨가 있다. 운업(芸業)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운(芸)과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技藝)의 뜻을 지니고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업(業)으로 이루어져, 녹우당 선대(先代) 당주(堂主)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관(靜觀)과 운업(芸業)에 대한 글을 나누기에는 너무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다음기회에 별도로 지면을 정리할 생각이다. 해남읍(海南邑) 연동(蓮洞) 덕음산(德陰山)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배열된 ㅁ자형 건물로 담장 너머에는 추원당(제각)이 있고 고택(古宅)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이곳 백련동에 터를 잡은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의 사당이 있으며 그 옆에는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집안에는 잘 가꾸어진 작은 연못과 정원이 있다. 녹우당 입구에는 약 5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있으며, 뒤편 덕음산에는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숲(수령 약 500년 400여본)이 있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蓮洞)은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본래 백련동(白蓮洞)이라 불렀다. 녹우당 입구에는 백련동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백련지(白蓮池)가 녹우당 사랑채에서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잘 조성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백련지(白蓮池)는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 “유교적 철학 사고는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덕음산(德陰山)을 배경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는 은둔처(隱遁處)인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과 “세연정(洗然亭)”에 연꽃 연못을 조성하였고 이곳 녹우당에도 연지(蓮池)를 조성한 것으로 보아 백련(白蓮)은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취향(趣向)이라고 할 수 있다. 녹우당(綠雨堂)을 찾는 사람들은 사랑채에 걸린 현판을 보고 한번쯤 당호(堂號)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녹우당을 안내하는 사람들도 가장 먼저 이 당호(堂號)를 중심으로 녹우당을 설명한다. 녹우당(綠雨堂) 당호의 명칭과 글씨는 공재 윤두서와 절친한 친구인 옥동(玉洞) 이서(李曙)의 글씨로 녹우당의 뜻을 해석할 때 고택 앞에 서있는 고목의 은행나무와 비자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녹우당(綠雨堂)” 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옛 선비들의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에 녹우(綠雨)란 말을 쓴다고 하는 데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이서가 공재의 철학과 학문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이름으로 “녹우당”을 지어 준 것이다. 녹우(綠雨)는 계절적인 이치로 볼 때 가늘게 내리는 봄비인 세우(細雨)에 이어 초목의 새잎이 연한 초록빛을 띨 무렵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녹우는 대지의 모든 생물에게 생명의 양분을 뿌려주어 대지를 푸르게 해주는 비로 이곳이 “녹색의 장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얻게 하고 있다. 푸르다는 것은 선비의 절개나 지조를 의미한다. 고산이 오우가(五友歌)를 대상으로 삼은 소나무나 대나무가 그렇듯 자연 사상과 사대부가의 사유의식을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으로 녹우당은 이곳 고택에 대한 이미지와 상징성이 매우 잘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옥동(玉洞) 이서(李曙1662~1723)는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성호(星湖)이익(李瀷1681~1763)의 형으로 명필(名筆)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 이르기 까지 조선 고유의 서체(書體)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의 대가(大家)이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조 광해군과 인조 효종에 이르는 가장 정치적 격동이 심했던 시기의 사람이다. 윤선도는 8살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20세에 승보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난 뒤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의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정치적인 대립문제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음양 지리에 정통했다 함경도로 유배를 갔다 온 후로는 벼슬을 버리고 조상이 물려준 여유 있는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금쇄동에 여러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금쇄동집고』는 윤선도 선생이 금쇄동에서 지내면서 중국의 여러 시인들의 시와 고산이 손수 쓴 한시, 그리고 우리말로 된 단가를 모아 한 첩으로 묶은 책이다. 윤두서(尹斗緖1668~1715)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에도 뛰어났었다 한다. 윤두서는 정선,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화가이며 말 그림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위의 그림은 윤두서상(尹斗緖像)으로 국보 제240호로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이다.
동국여지지도(東國與地之圖)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 보다 약 150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직 미공개된 이 귀한 지도를 필자도 볼 기회가 있었다.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를 통하여 예술 학문적으로 가장 화려한 시기가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비중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공재 윤두서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윤덕희, 윤용에 이르는 기간에 예술 활동이 활발하여 이 집안의 고문서들이나 작품들이 이때를 중심으로 집대성 되었다고 한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인이라는 정치적 배경도 있었지만 외가인 해남윤씨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으며,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가 된다. 공재 윤두서(1668~1715)와 다산(1762.~1836)은 시대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외가를 오가며 받았을 영향과 강진에 유배시 해남의 녹우당과 교류를 가졌던 것을 본다면 공재의 다산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고산(孤山)선생의 유품에 대한 그 감동적인 순간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지금이야 기념관에 유품이 전시되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국립박물관의 유리창 속에서만 볼 수 있었다. 우리민족의 영원한 자존심인 고산선생의 문화유산 향기를 필자같이 식견이 부족한 시정잡인의 서툰 글로서 전하기는 너무 외람된 짓인 줄 안다. 그리고 둔한 머릿속에 남아있는 정리 안된 기억이지만 그것을 다 친구들과 나누자면 지면이 더 필요하고 또 잘못 전달되면 선인을 욕되게 할까 조심되어 이정도에서 타자를 그만친다. 자판에 손을떼면서도 녹우당 주인이 그때 한마디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 참, 아쉬운건 말이여, 일본 학자들은 고산선생을 연구 한답시고 뻔질나게 왔다가는디 우리나라 학자들은 잘 안와요” -농월- 토요일 일요일은 의료봉사활동 때문에 한시소개를 못할 것 같습니다.
수락잔조(水落殘照) 수락산 저녁노을 一點二點落霞外(일점이점낙하외)-차츰차츰 떨어지는 저녁노을 밖으로 三介四介孤鶩歸(삼개사개고목귀)-서너 마리 외로운 까마귀들 둥지를 향해 돌아가네. 峰高剩見半山影(봉고잉견반산영)-산봉우리가 높으니 산의 반쯤은 그늘이 지고 水落欲露靑苔磯(수락욕로청태기)-물이 잦아지니 푸른 이끼 낀 돌이 드러나는 구나 去雁低回不能度(거안저회부능도)-돌아가는 기러기는 낮게 날아 산을 넘지 못하고, 寒鴉欲棲還驚飛(한아욕서환경비)-가을 까마귀 둥지로 돌아오다가 놀라서 날아가네. 天外極目意何限(천외극목의하한)-하늘 밖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데 斂紅倒景搖晴暉(렴홍도경요청휘)-저녁노을 지는 저 하늘 높은 곳에 맑은 빛이 흔들리네. 김시습(金時習) 가을 수락산에 올랐다. 논어 옹야(論語 雍也)편에,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淨 知者樂 仁者壽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라는 글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고요한 것을 좋아하다. 지혜로운 자는 즐겁게 살고 어진 자는 오래 산다.- 이 말은,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롭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변화를 추구한다. 때문에 항상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물의 속성이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흐르는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진 사람은 항상 심지(心地)를 한곳에 굳히고 쉽게 움직이지 않는 우직함이 있다. 따라서 산이 천년을 가도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어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 우직한 사람은 친구 사귀기는 어려워도 한번 친해지면 잘 변하지 않는다. 오늘 가을 수락산에 오른 의미는 우직하지만 어진 친구의 정을 산처럼 흔들리지 않게 오래 지속하기 위한 약속을 위한 수행(修行)이다. 수락산은 서울 도성 밖의 여러 산에 비하여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산이다. 수락산이란 명칭은 산을 찾는 사람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산의 동쪽에 있는 금류동 계곡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두고 “물이 떨어지는 산” 수락산(水落山))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속설에는 한 사냥꾼이 “수락” 이라는 이름을 갖인 아들과 같이 사냥을 나왔다가 산중에서 깜박 잠이 든 사이 호랑이가 아들 수락이를 물고 가서 아들을 찾으려 산을 헤매면서 “수락아” 하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수락산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단종 때의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이며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서 다섯 살 때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하고 한시(漢詩)를 천재적으로 지어 사람들이 신동 김오세(神童 金五歲)라 불렀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다가 외숙모도 별세하고 아버지마저 중병을 앓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19세에 삼각산(북한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평생 동안 즐거움은 어디서나 얻느냐”고 말하면서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가 다시 수락산에 들어와서 동봉(東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짖고 10여년을 생활하였다 하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세조의 왕됨을 거부하고 입산(入山)한 곳이기 때문에 조정의 입장에서는 요즘의 반정부 인사를 숨겨준 산과 같기 때문에 반골산(反骨山)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런 역적은 참수(斬首)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땅에 덜어진다는 수락(首落)이라는 다른 글자의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충신의 입장에서 보면 수락산은 모든 것을 받아주는 부모 같은 편안한 산이며 정의지산(正義之山)이라 할 수 있고 수락산(受諾山)이라 할 수도 있다.(필자 주) 공자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어느 고을에 살인을 한 자식을 집안에 숨겨준 아버지를 범인 은익 죄로 처벌하기 위해 해당 관리가 공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 나는 살인 자식을 숨겨준 부모는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아무리 악한 살인죄를 저지른 자식이라도 다른 곳으로 달아날 곳이 많은데도 부모를 찾아온 것은 부모를 믿기 때문이다. 제부모가 제자식을 위하지 않으면 누가 위하겠는가? 이것은 법보다 앞선 인륜이다. 수락산은 부모와 같은 산이기 때문에 반정부 활동을한 김시습이 도움을 청한 것이고 수락산은 이를 받아준 것이다. 수락산은 반골산(反骨山)이 아니다. 또한 올해 들어 노원구에서는 수락산 곰바위 정상에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는 정자(亭子) 매월정(梅月亭)을 완공시켜 수락산내의 김시습 유적을 정비하였다. 수락산에는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는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 천상병(千祥炳) 시인 공원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한다. 천상병 시인은 1993년 간경변으로 타계할 때가지 아마 문 인중에서는 가장 가난한 시인으로 전한다. 이중섭보다 더 가난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아래의 시가 있다.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소릉조(小陵調)- 란 시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가을 등산, 아니 가을 수락산이 더욱 감상적인 것은 멀기는 500년 전의 충신(忠臣) 김시습이, 가깝게는 15년 전의 가난한 천상병 시인이 우리 곁에 숨 쉬고 있고, 그리고 지금 우리 옆에는 다정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청산의구재 인자요산(靑山依舊在 仁者樂山) -청산은 변하지 않고 옛 그대로 있기에 인자는 산을 즐기고 있다- -농월-
추분(秋分) 秋分忽已過(추분홀이과)-추분이 어느새 지나고 있으니 玆歲又將闌(자세우장란)-올해도 또 끝나는 구나 露下蟲音促(로하충음촉)-이슬 아래에선 벌레들 울고 雲邊雁影寒(운변안영한)-구름 가에는 기러기 그림자 차갑다 浮生南復北(부생남복북)-뜬 구름 같은 인생 남북을 떠돌고 明月缺仍團(명월결잉단)-밝은 달은 기울이다 차는 구나 萬事從眞宰(만사종진재)-모든 일은 조물주에 달린 것 吾心到處安(오심도처안)-내마음 어디서나 편안 하여라 최명길(崔鳴吉) 오늘이 벌써 추분(秋分)이다 ! 낮이 느낄 정도로 짧아졌다. 점심을 먹은 후 어정어정하다 보면 해는 어느덧 서산에서 4~5m 위에 있고 어둠이 금방 성큼 다가오고 있다. 추분은 밤낮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긴긴 여름날을 기억하는 뇌리(腦裏)에 추분은 낮이 짧아지는 느낌의 절기로 다가온다. 때로는 18층 아파트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삼각산(북한산)아래 6.3빌딩에 가을 분위기의 어둠이 감돌면 이제는 인생의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인라인 트랙에서 정신없이 레이스를 하다가 언 듯 핸드폰 시간을 보면 오후 네 시 무렵이다. “해가 벌써 이렇게 짧아 졌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은 우리의 감각적 판단일 뿐 사실은 밤과 낮의 길이를 가장 팽팽하게 균형지어 놓은 절기가 바로 추분 무렵이다. 신정동 안양천변(安養川邊)에서 멀리 관악산을 감싼 푸르스름한 저녁 안개도 한결 짙어지는 하루다. 조금 있으면 저 산봉으로 기러기 떼의 찬 그림자가 바쁘게 오갈 것이고 한강을 접한 안양천도 한층 차가운 수면위로 깊은 가을빛을 칠할 것이다. 가쁜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강둑에 앉아 가을빛 잔잔한 물위를 조용히 응시(凝視)한다. 잔물결에 일렁이는 얼굴을 자세히는 볼 수 없지만 분주한 삶 속에서 가을이 되어도 털갈이를 하지 못하는 하얀 중생의 일그러진 모습 하나가 연의(漣漪잔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버틴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인생의 어둠이 한발 성큼 다가와도 결코 한숨 쉬거나 조바심 내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정관(靜觀)의 노력이 세월을 바삐 재촉하는 시간과 대항하는 유일한 힘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참 세월이 더디도 간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해도 여전히 나는 20대였다. 이 젊은 시절은 언제나 내 옆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십대로 접어들자 시간은 바람난 아내처럼 서서히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적어졌다. 이게 어쩐 일인가 두 손으로 움켜쥔 물처럼 시간은 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빠져 나갔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서는 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누구누구 아빠라고 불리었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삼복의 더위가 어제인데 세월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정신없게 만든다. 실제로 입추(立秋) 처서(處暑) 다 지나고 추분(秋分)이 되니 정말 올 한해도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조그마한 아파트 정원 한 모퉁이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와 높게 떠 있는 엷은 구름이 더 사람의 심정을 스산하게 만든다. 최명길(崔鳴吉1586~1647)은 조선조 제16대 임금인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관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對明), 대청(對淸) 외교를 지혜롭게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한 사람이다. 위의 최명길(崔鳴吉)시인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시기를 알 수 없다. 최명길(崔鳴吉)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침략을 받을 때 청(淸)과 우호(友好)관계를 맺자는 대표적인 주화론(主和論)자다. 당시 조선은 명(明)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때라 청(淸)에 대하여 화해를 하자는 주화론(主和論)자와 적(敵)으로 돌리자는 척화론(斥和論)으로 정치적인 갈등이 심한 시기로 짐작된다.
병자호란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나라를 위해 청나라를 오가며 지식인으로서 혹은 관료로서 당면한 현실을 타개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최명길에게 추분이라는 절기는 남다른 감정 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청(淸)으로 명(明)으로 분주하게 살던 몸이 아니었던가. 언제 한번 차분히 자신을 돌아 볼 때가 있었겠는가. 추분에 이시를 쓰면서 한해의 끝자락이 저만치 모습을 슬며시 드리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처럼 흘러가는 한해를 사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 생각하면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삶이 흐르는 게 어찌 내 탓이고 인간의 탓이랴. 보이지 않은 우주의 질서에 의하여 우리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攝理)인 것이다. 그 힘의 주재자(主宰者)를 시인 최명길은 진재(眞宰)라고 하였다. 진재(眞宰)를 느끼는 순간 최명길의 마음은 편안함을 경험한다. 어떤 곳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마음 경계(境界)의 편안함은 그대로 유지된다.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경계, 최명길은 가을의 한 귀퉁이에서 그것을 느낀 것이다 진재(眞宰)란 노자와 장자에서, 도(道)의 본체인 하늘을 이르는 말이다. 진재(眞宰)를 불교에서는 불(佛)이라 하고 유교에서는 성(聖), 도교에서는 신(神), 기독교에서는 영(靈)이라고 표현한다. 최명길은 인간의 제반사를 조물주에 마낀 것이다. 추분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하늘의 이치다. -농월-
지창(紙窓) 한지(韓紙) 바른 창 偏宜醙壁稱閑情(편의수벽칭한정)-새하얀 종이창 마음 절로 한가로운데 白似溪雲薄似氷(백사계운박사빙)-희기는 시내 위의 뜬구름 얇기는 살얼음 不是野人嫌月色(불시야인혐월색)-내사 달빛 싫어서가 아니고 免敎風弄讀書燈(면교풍롱독서등)-바람이 독서등불에 불어대지 않기 위함이라네. 곽진(郭震) 추석이 지나고 추분도 지나 가을맞이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한지(韓紙)로 문 바르는 일이다. 일 년 내내 지나는 동안 작년에 발랐던 문은 색깔도 누렇게 퇴색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구멍난곳을 공책쪼가리로 떼운곳도 있고 아직 어린아이 손가락만한 구멍과 미쳐 때우지 못한곳은 창호지가 찢어진 채로 가을바람에 파르르 떠는 곳도 있다. 특히 문고리가 있는 부분은 문을 여닫는 동안에 구멍이 더 잘난다. 이곳을 헌겁쪼가리로 안에 심을 넣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른 문은 손때는 반질반질하게 묻어도 구멍은 나지 않고 있다.
문짝을 떼어 마당 구석에 세우고 입으로 물을 뿜어 적셔 놓고 조금 지나면 한지가 불어 손으로 떼면 잘 일어난다. 세 살 문살 사이에 차곡차곡 끼어 있는 먼지를 닦아낸다. 그 좁은 문살사이에 작은 거미집 같은 것이 있고 그 속에는 이름 모르는 벌레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빈대도 기어 나오고 때로는 냄새를 지독히 풍기는 노랭이도 기어 다닌다.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죽竹)를 약 5mm 정도 넓이로 쪼개어 문틀에 대각선으로 끼어 다이아몬드 구멍이 되게 만든 대살문도 있다. 먼지를 닦아내면 옅은 검은색의 문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인지 먼지 냄새인지 모를 문 특유의 냄새가 난다. 형용 할 수 없는 정감을 자아내는 냄새다. 걸레질한 문이 다 마른 후 하얀 한지에 풀칠을 하여 문살에 바른다. 이때 좀 멋을 내는 사람은 문고리 부분에 단풍잎이나 삼대잎(대마초) 혹은 달리아 잎을 넣어 바른다. 어떤 사람은 유리조각을 문 가운데 끼어 밖을 내다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중요한 것은 한지를 바른 위에 다시 입에 물을 머금어 문 위에 뿜어 흠뻑 적셔 둔다. 따스한 가을 햇볕아래 한두 시간 지나면 바른 한지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하게 펴진 문이 문풍지를 살랑이고 있다. 가을 고추잠자리가 하얀 창호지위에 날개를 펴고 앉아 있다. 빨래 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에 풀 먹여 널어놓은 서답(빨래 사투리)이 새로 바른 문처럼 하얗게 가을 햇살을 받고 있고, 옆집 남해댁 마당에 간짓대로 밀어 올린 빨래 줄에는 지난달에 며느리가 출산한 둘째 애기 기저귀가 한지보다 더 하얀 색으로 바람에 살랑이고, 돌담장위에는 노랑 벌이 숨바꼭질하는 박꽃이 소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당 한켠 둥근 방석에 늘어 말리고 있는 햇나락을 창호지 바른 문 뒤에서 살짝 나온 참새 두 마리가 머리를 빠르게 이쪽저쪽으로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벼알을 몇 번 쫒다가 제풀에 놀라 재빨리 문 뒤로 숨는다. 창호지가 얼마나 팽팽하게 말랐는지 손가락으로 퉁기면 마치 장구나 북치는 소리가 난다. 약간의 긴장감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흐뭇하고 따스함을 느낀다. 문을 들어 돌쩌귀에 달고 나면 가을 햇살에 방안이 환 하다. 목때묻은 목침(木枕)도 파리똥 투성인 천정도 벽지도 적당히 따듯한 감이 돈다. 그 아늑한 평화와 행복감 ! 한지는 한자로 저상(楮桑)이라고 하는 닥나무가 원료다. 한지를 자세히 보면 닥나무 껍질의 모세혈관 같은 섬유질들이 무수히 갈라져 있다. 어린 시절 닥나무 껍질을 벗겨 팽이치기 할 때 팽이채 재료로 사용하였다. 닥나무가 한지의 원료로 쓰이고 색이 희기 때문에 피부를 하얗게 만든다는 소문이 나돌아 달여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다. 흥미 있는 것은 조선시대 여성들도 피임에 많은 관심을 갖었지만 피임과 낙태에 대해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민간요법으로 비단 실이나 특수하게 가공한 창호지를 여성의 자궁에 넣어 피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대의 피임법인 자궁 내 장치인 “루프”와 비슷한 개념이라 생각 할 수 있다. 지금의 문들은 온통 베니어판으로 막아 바람 한 점 햇빛 한 살 안 들어온다. 그래서 요새 사람들은 여유가 없을까 ! 어머니 젖내 같은, 어머니의 하얀 오지랖 같은 한지로 문을 바르고 싶어도 사방은 온통 모노륨이고 베니어고 유리뿐이다. -농월
인정(人情) 酌酒與君君自寬(작주여군군자관)-친구여, 술이나 좀 들려무나. 人情飜覆沙波瀾(인정번복사파란)-인정은 물결같이 뒤집히는 것. 白首相知儒按劍(백수상지유안검)-흰 머리 되도록 사귄 벗도 칼을 겨누고, 朱門先達笑彈冠(주문선달소탄관)-성공한 이도 후배의 앞길을 막나니 草色全經細雨濕(초색전경세우습)-보라, 비에 젖어 잡풀은 우거져도, 花枝欲動春風寒(화지욕동춘풍한)-봄바람 차가워 꽃은 피지 못한다. 世事浮雲何足問(세사부운하족문)-뜬구름 같은 세상일 말해 무엇 하랴, 不如高臥且加餐(불여고와차가찬)-누워서 배나 쓸며 지냄이 좋으리. 왕유(王維) 정(情)이란 사람 사이에서 친근감과 사랑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정(情)이란 말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 주위에 매우 인지도 높은 종교 지도자 한분이 하신 말씀이다. 『정(情)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 정(情)은 부모간 형제간 친척간 남녀 간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 신앙속의 믿음 등은 결국 인간의 정(情)에서 나온다. 정(情)이란 감정(感情)이라 할 수 있다. 정에는 받는 정 주는 정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정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행동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남으로부터 정(情)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소극적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정(情)이란 상대방에게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이 없으면 정이 발생하지 않는다. 참된 정은 물리적인 행동이 자연히 뒤따른다. 정을 나눌 상대방에게 안부전화를 한다든지 문병을 하거나 만나서 술 한 잔을 사거나 밥을 같이 먹거나 별것 아닌 것이라도 상대방을 생각하여 선물을 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情)이 있어 나타나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이 점잔하고 마음이 순하고 어진사람이라고 정(情)이 많은 것은 아니다. 어질고 점잔해도 정(情)이 없는 사람이 많다. 얼굴이 잘생기고 미인이고 교양이 있어도 정(情)이 없는 사람이 많다. 친척간에 왕래를 하는 것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방문만하고 상대방이 답방을 안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내면적인 정(情)이 없기 때문인 찾아가지를 않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뇌물(賂物)로 인하여 선물(膳物)이 큰 오해를 받고 있지만 선물이란 마음속에 있는 정(情)을 밖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내말을 물질 위주라고 오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 사이에는 잔인정이 있어야 한다. 특 우리나라 남자들은 잔인정은 없고 큰 인정만 있다고 하는데 큰 인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흔한 것이 아니다. 큰 인정 뒤에는 “내가 남을 도왔다”는 생색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헛인사라는 말도 있다. 즉 마음에 없이 겉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건성 인사의 헛정이다 우리들은 상대방이 그것이 헛인사인줄을 대부분 안다. 정(情)에는 물질이 뒤따른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정(情)에 대한 성의(誠意)가 없으면 절대로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 행동이다. 친구간에 술을 한잔 산다던지 5천원짜리 선물을 하는 것은 돈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정이 없으면 절대로 아까워서 돈을 못 쓴다. 친인척보다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가까이 지내는 쪽이 정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인들이 헛인사를 많이 한다. 입에 발린 말로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부처님께 염불을 하겠습니다” 참 고마운 말이지만 남을 위하여 기도하고 염불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자기 가족을 위하여 기도 염불하기도 쉽지 않는데 항차 남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물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말만해놓고 정말 기도하고 염불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하는 정이 있다면 어떤 식이든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정(情)이 있는 것이다. 교회나 불자들 중에 돈 많은 부자들이 많으면 헌금이나 시주가 많이 들어 올줄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주로 중산층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이나 시주를 충실히 한다. 신앙도 믿는 대상에 대한 정(情)이 진실해야 헌금이 아까운줄 모른다. 주로 돈 많이 내는 사람은 어느 면이든지 꼭 생색을 내기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생색을 내면서 주는 정(情)은 인정(人情)이 아니다. 사회 봉사라던 지 친구간에 하찮은 일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내가 베푸는 정에 대하여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은 정(情)이 아니고 위선이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정(情)을 베푼 것이 아니고 대가를 바란 것이다. 꼭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 -보시(布施)중에서 무상보시가 가장 참되다- 하는 경전적인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정은 생색을 내지 말고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아름답고 진실이 나나 타는 것이다』 친목 모임이든 친구간이든 어떤 사이든 간에 정(情)을 나눌 상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는 정도 좋지만 그 정을 받아주는 상대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 라는 존재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가 성립될 수 있다. 손을 꼭 잡아주는 정(情)이 필요한 계절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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