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상 나까소네 가 등소평 에게 물었다. 파란만장한 역정 가운데 가장 고통 스러웠던 순간은 언제 였는냐고...
작은 거인은 문화 대혁명 기간 이라고 대답했다. 문화 대혁명은 아우슈비츠 에 비견할 만한 20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유소기 와 등소평 의 권력 기반을 무너 뜨리기 위하여 모택동이 인민 해방군의 비호 아래 일반 대중을 동원하고 홍위병을
선동하여 일으킨 쿠데타 다. 등소평은 일체의 직위를 박탈 당한채 시골의 트랙터 공장으로 유배 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죄목 또한 희한 했다. 1969년 국경에서 소련과의 무장 충돌이 발생 하자, 최고 지도자 들중에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는 인물들을 색출 한다는 명목 이었다. 건국 유공자 요 재상 이 하루 아침에 역적 이 된 몰골 이다.
65세 노인은 트랙터 바퀴의 살을 끼우고 짐 싣는 화물칸을 용접으로 때우는 노동자 가 되었다.
본인의 몰락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가족들의 고통 이었다. 아들과 딸 들은 자본주위에 물든 독재자의 자녀
라는 낙인이 찍힌 채 이곳 저곳 변두리에 버려졌다. 특히 장남 박방 은 홍위병에 의해 방사능에 오염된 실험실에 갇히게 되자,
탈출 하려고 4층 에서 뛰어 내려 척추를 다치면서 평생 불구가 되었다. 등소평은 공장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 해야 했다.
늙은 유모, 병약한 아내가 처리 하지 못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장남을 목욕 시키고, 척추 마사지를 해 주는 일 역시 그의 차지 였다.
장남은 그 시절의 아버지를 회고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아버지가 오로지 정치에만 관심을 갖는 다른 지도자 들과는 달리 진실한 인간이며 실재하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버려진 인생들의 가족애가 눈물 겹다. 등소평의 딸 등용 은 아버지에 관한 전기를 쓰기 위해 인터뷰한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했던 점을 소개 한다. 그것은 낙천적인 성격과 유머 였다. 밑바닥에 내 던져 져서도 등소평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격의 없는 소탈한 태도와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그는 동료 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 솔즈베리의 책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는 결코 위대한 국가 지도자 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우리 가운데 한 사람과 같았다."
훈훈한 인정이 흐르는 달동네가 미소를 짓게 하듯, 등소평의 귀양살이 에는 인간미가 풍겨난다.
하지만 그가 정작 만들어 낸 것은 미담 이 아니라 미래 였다. 등소평은 매일 마당을 40바퀴씩 돌면서 체력을 단련 했다.
동시에 밤 늦게 까지 독서에 몰두 했다. 그때 읽은 대표적 저작이 중국 역사 칠천년의 공식 기록인 '24 사' 였다.
'사기' 로 부터 시작해서 '청사' 에 이르기까지, '24 사' 는 역사와 인간의 광대하고 심오한 파노라마 다.
대륙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고급 지식 이기도 하다. 밑바닥에 내 던져져서 그는 최고의 통치술을 연마한 것 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유배 생활은 3년 4개월에 끝이 났다.
정계에 복귀하는 그의 가슴은 새로운 중국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이탈리아 기자 율리아나 팔라치 와의 인터뷰 에서 등소평은 말했다.
"내가 여러 차례의 치명타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낙관 주의자 이므로 실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란 대해 속의 파도와 같아서 사람들은 파도 위에 있을때도 있으나 때로는 파도 밑에 깔리기도 한다."
어디 정치만 그와 같으랴. 인생이 파도 위로 두둥실 띄어 가기도 하고, 파도 아래 휩쓸려 떠내려 가기도 한다.
위에 있다고 교만할 까닭도 없고 아래 있다고 절망 할 이유도 없다.
역설적 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가 사실은 가장 배울점이 많을 때이다.
가장 낮아 질때가 가장 높아질 미래를 준비할 때이다.
몸은 비록 바닥에 있어도 입 으로는 웃고, 눈 으로는 하늘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