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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대란
아내와 나는 2026년 1월 중순부터 월말에 이르기까지 입원 대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대란은 지난해 12월 마지막 토요일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날은 오래전에 은퇴한 동료 두 사람과 월례 행사처럼 만나던 날이었다. 그들은 내가 사는 계룡으로 언제나처럼 점심 모임으로 왔었는데 그날은 몹시 추웠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몸이 불편한 아내와 함께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실내 온도를 높여 놓고 아내가 눈부시다고 햇볕이 드는 창 커튼까지 치고 지내고 있었다. 그래 거의 얇은 내복을 입고 있다가 외출한답시고 두꺼운 오리털 코트를 걸치고 마중 나갔다. 의래 점심을 먹고 차 마신 뒤 헤어지는 행사여서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나간 것이다. 점심은 연산에 있는 ‘황제 장어나라’로 정했다. 장어를 무제한 리필해 주는 곳이었다. 단번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홀이었는데 그때도 대 여섯 식구 밖에 앉아 있지 않아 홀은 휑하고 추웠다. 그 넓은 홀을 난방하려면 수지가 맞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료들은 추운 날씨에 중무장하고 왔다가 장어가 구워질 때는 다 윗옷을 벗어 걸고, 싼값에 무한 리필을 해주는 장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엉거주춤 오리털 코트를 안 벗을 채 식사를 시작했지만 어울리지 않아 벗어 등 뒤 의자에 두고 맛있게 식사를 했다. 추워서 재채기를 해선지, 계룡으로 나와 차를 마시면서도 재채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감기에 걸린 모양이라 생각하고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재채기와 함께 새빨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멈출 줄 알고 휴지로 닦아 봤으나 계속 피는 쏟아져 작은 종이컵으로 하나는 될 정도 재채기와 함께 피는 쏟아졌다. 놀란 것은 나뿐 아니라 함께 온 친구들이었다. 당장 응급실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은 토요일 오후여서 우리가 가는 것보다 119를 불러 구급차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먼저 내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내가 119를 부르겠다면서.
집에 가서 3시쯤 119를 불렀더니 바로 달려왔다. 그들은 피를 그렇게 토했다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한다며 혼자 걸을 수 있느냐면서 독촉했다. 보호자가 없느냐고 물어서 나는 나보다 하나 위인 93살의 아내와 단둘이 동거하고 있는데 아내는 워커 아니면 걸을 수도 없어 그녀는 내가 보호자지 다른 사람 보호자로 따라갈 처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며 독촉했다. 나는 아내를 그냥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우선 집을 나섰다.
구급차는 나를 태우고 30분 이상을 달리며 내가 알만한 건양대 병원, 을지대 병원, 선병원, 충대병원, 성모병원 등 출혈 환자를 받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만, 담당 의사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만 당했다. 나는 지금은 출혈이 없으며 정신이 말짱하니 그냥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1차 응급병원 소동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입원 대란의 시초였다.
이튿날 경기도 용인에 사는 딸이 아침 일찍 달려왔다. 그리고 내가 반대하는데도 다음 날 가까운 건양대 병원에 외래 진료를 예약해서 12월 30일 호흡기 내과의 손 교수와 면담하기로 했다. 혈액 검사를 하고 영상실에서 일반 촬영을 한 뒤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손 교수는 다음 달 1월 2일에 예약을 잡아주면서 이번에는 당뇨약을 중단하고 금식한 뒤 오후 1시 30분까지 와서 Chest Routine CT를 하고 귀가한 뒤 다시 1월 8일 그 결과를 두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 복잡한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국외의 자녀들은 이틀 후인 1월 1일은 2026년을 시작하는 새해기 때문에 Zoom Meeting을 하자고 법석이었다. 다음날은 내가 건양대 병원에 금식하고 들어가 각종 촬영을 하는 날이었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딸이 나를 도와주고 상경했다. 그런데 딸이 떠난 그다음 날 3일은 아내가 너무 어지럽다고 호소해 와서 우선 동내 내과 병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과 병원에서 1시간여를 대기했는데 의사는 심근경색 환자가 패에 물이 차 있는 줄도 모르고 동네 병원을 찾았느냐며 당장 종합병원으로 입원하라고 하며 자기의 ‘진단의견서’를 써주었다. 너무 서둘러서 나는 먼저 소개한 개인 병원으로는 큰 ‘대청병원’에 갔으나 거절당했다. 3년 전 심근경색으로 치료를 받아온 ‘충대병원’으로 가 보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충대 응급실에 들어가자 옷을 갈아입고 금식하며 검사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점심도 못 먹고 금식 상태였지만, 아내는 손에 주삿바늘을 꽂고 여러 가지 수액을 주입하고 있어 그것도 잊고 정신이 나간 듯 누워 있었다. X-ray, CD등 여러 가지 사진을 찍고 응급실 담당 의사의 검진을 받았는데 처방전과 함께 퇴원하라든가 입원을 권유하는 일도 없이 오후 5시 넘게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결론은 1월 9일 충대에서 심근경색을 다루었던 심장내과 진 교수와의 면담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부랴부랴 퇴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수액 주입을 끝내자 아내는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배고프면 못 견디는 성미였다. 간식거리를 사 오고 물을 사 오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병원을 떠난 것은 6시가 넘어서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 밤 운전을 하지 않기로 한 때였다. 그러나 환자를 데리고 귀가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와 나는 내 차로 충대 길을 너무 많이 달렸기 때문에 아내도 길을 알아 나를 안내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충대를 내 집처럼 2, 3개월 동안 아내 입원 때 다녀서 문제없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며 밤 운전을 했지만, 그때 어렵지 않게 귀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2월 8일은 참 바쁜 날이었다. 오전 11:50분 나는 건양대의 손 교수 면담을 해야 했고 오후에는 아내를 위해 4시 10분에는 충대의 진 교수를 면담하러 데리고 가야 했다. 그래서 용인의 딸이 오후 4시 10분 아내 면담을 위해 집에 오겠다는 것을 나는 반대했다. 상당히 시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진 교수를 만나자 그는 다음 주 화요일(1월 13일)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내가 입원하면 아내는 누가 돌볼 것인가? 그러나 진 교수는 이번에 입원하지 않으면 다음엔 예약을 새로 잡아야 하므로 패에 붙어 있는 이물질 일부를 떼어내 조직검사를 하려면 입원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살겠다고 했다.
그런 뒤 오후에는 아내를 데리고 충대에 갔다. 예약이 4:10이었지만 3시였는데도 벌써 면담자가 가뜩 차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우리 순서는 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은 모두 일찍 와서 대기 명단에 등록했고 우리 순서는 끝에서부터 3번째였다. 그것도 6시가 가까워서였다. 그동안 딸이 어머니 걱정이 되어 집에 와 있다고 전화했었다. 병원을 떠나면서 전화하겠다고 했지만, 또 밤 운전이어서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면담 차례가 되어 의사가 우리에게 들려준 한 마디는 13일 충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가기 전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고 귀가하라는 것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약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또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나니 귀가는 6시 반이 넘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시력이 약해 밤 운전을 싫어했는데 계백로에 대청병원 근처 도시철도 2호선 공사 구간 중 완전히 끝나지 않은 공사장이 있어 계룡으로 갈 때는 4차선 중 좌측 2차선이 없어진 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 막힌 길을 가다가 우측 2차선으로 들어가기 전 콘크리트로 된 철벽을 부딪친 후 본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쾅 소리가 났는데 나는 차를 멈추어 세울 수가 없었다. 왼쪽 문짝이 부서진 건 분명했는데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집에까지 데리고 빨리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가자 딸이 나와 있었다. 딸은 사고 차를 보고 놀랐지만, 먼저 휠체어를 내려 아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나는 지상으로 나와 빈 곳에 주차했다. 이렇게 크게 망가진 차를 어느 수리공장에 맡길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중고차를 나에게 사준 사장이 자기가 아는 공장에 맡길 테니 거기까지 보험 회사에 견인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보험회사를 불러 그때야 사고 신고를 했다. 사고 지점이 어디냐? 어디로 견인하러 가야 하느냐고 물어서, 차는 내 아파트 앞에 세워 놓았으니 내일 아침 와서 견인해 달라고 했더니 보험회사 직원은 또 놀랬다. 무슨 사곤데 집에까지 운전해 오고, 다음날 견인해 달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다.
‘입원 대란’에 이렇게 긴 에피소드를 붙인 건 미안한 일인데 이처럼 큰 사고를 낸 것이 내 90 평생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원 대란 중 큰 사건이고 그때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던 사고여서 서곡으로 말해 두고 싶은 것이다.
드디어 입원 대란은 시작되었다. 문 권사가 1월 13일부터 심근경색의 정확한 진단을 위해 충대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해외 자녀들은 아버지건 어머니건 무조건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13일부터 3일간 딸은 상담사로서의 일을 제치고 어머니의 보호자로 근무했다. 내 차를 수리공장에 보내버린 나는 딸 차로 병원에 와서 입원한 것을 보고 그 차로 늦지 않게 귀가했다. 딸이 그래도 한국에 사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다음날 딸 차로 와 봤더니 아내는 주렁주렁 수액을 넣는 호스들을 매달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패에 차 있는 물도 많이 빠지고 부어 있는 다리도 홀쭉해져서 그런대로 행복한 것 같았다. 나는 딸이 병원에 와서 함께 지내는 동안 딸 차로 집에 와서 쉬고 딸이 상담 시간이 잡혀 있으면 내가 가서 대리 근무하고 그동안 딸은 차 안에서 원격상담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해외에 있는 가족들이 부모의 입원을 동의한 뒤 둘째는 2주간의 휴가를 얻어 나를 돕기 위해 1월 21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내는 15일 퇴원하고 집에 와 있었다. 나는 자녀들의 강권으로 1월 22일부터 3일간 건양대에 입원하기로 했다. 그동안 아들이 내 충실한 보호자였다. 병원에서 한 일은 내가 자는 동안 패에서 이물질을 약간 떼 내어 조직검사하고 그것에 맞은 약물로 표적 치료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퇴원하자 또 다른 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뇌나 다른 임파선에 전이 되어 있는지 알아야 정확한 약물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1월 29일에는 금식하고 들어가 PET-CT 촬영을 2시간 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2월 9일 면담에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아들은 휴가가 8일에 끝나는데 좀 당길 수 없느냐고 사정해서 임시로 5일 10시로 면담 시간을 변경하고 귀가했다.
2월 5일 우리는 손 교수를 만났다. 그는 그동안 내가 촬영했던 사진을 여러 번 돌려 보고 말했다.
“위 속의 이물질은 암이 아니고 그냥 염증이네요.”
아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내 병은 단순한 위염이었다. 암일 때 다른 데로 전이될지 몰라 이 결과까지 합해 치료하려 한 것은 허사였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데 이성을 초월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인간은 문명의 이기로 인간의 생명까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세상은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바벨탑을 쌓은 인간 중심의 문명사회가 되어버렸다. Physical AI를 이용한 로봇이 자율주행, 물류창고 배달이나 의료 수술 등을 하며 위험 작업이나 단순 노동을 하며, 서비스산업을 자동화하기도 한다. 스마트 농업으로 대형농장을 기계화한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은 무속신앙인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더 넓고 깊은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고자 하신다. 비록 그들이 죄를 지어 지상으로 쫓겨났지만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그들을 대속하고 다시 부르신다. 다만 인간이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포도원 품꾼에게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씩 주겠다고 약속하고 들여보내며 나올 때는 약속한 대로 다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이 세상 어떤 농장 주인이 이런 빚진 장사를 하겠는가? 하늘나라의 백성과 이 세상의 백성은 가치관이 다르다. 양 100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었는데 99마리를 그냥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이상한 사랑을 이성의 한계에 막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믿는 자를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바울을 회심케 한 것은 누가 한 것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수명을 다했을 때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도 ‘하나님의 집(오이코스)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는 곳’에서 우리와 공동체를 이루며 주의 은혜를 누리며 섬기며 천국의 삶을 이 지상에서 살다 주님 곁에 가게 하신다. (히 10:21 참조).
손 교수는 한 번 더 나에게 권고한다. 9일 동안 지은 약을 먹고 기다리다 3월 12일 금식하고 CT와 X-ray 촬영을 한 뒤 3월 19일 면담을 다시 하자는 것이었다. 자기의 영상물 판독이 잘못이 아니었는지 다시 시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더 시험대에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아들이 강권해서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기적이다. 이 기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신령한 세계를 한순간 나에게 보게 하신 것이다. 나의 힘과 노력이 아니다. 주께서 문을 열라고 하셔서 그 음성을 듣고 그분 곁으로 간 것뿐이다.
일단 입원 대란은 이렇게 끝났다. 다만 죄를 짓고 지상으로 쫓겨난 우릴 아지도 사랑하시고 다시 불러 주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맡아주기를 원하는 하나님과 지상에서 만능이 된 인간이 바벨탑을 쌓고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두 세력의 갈등을 보는 것뿐이다.

첫댓글 교수님, 기도합니다.
문권사님,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서 마음이 많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시간에 대한 신뢰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맡기는
교수님의 깊고, 조용한 믿음을
멀리서나마 응원하며 존경과 사랑을 전합니다.
30년동안 저와의 인연을 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남대 캠퍼스 사역과 CCC 본부사역, 캄보디아 선교에 이르기까지
저를 따라 함께 해주셨고,
기도와 사랑을 보여주셨고,
동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대부터 교수님과 함께 하면서
저의 60대 70대 80대 90대를 그려보았습니다.
노년의 스케치를 그려보았습니다.
좋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면 되겠구나! 꿈꾸어 보았습니다.
이제 저에게도 그 시간이 다가옵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교수님과의 만남으로 친구개념의 나이영역대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위, 아래로!
육신은 쇠해지고,
목소리도 약해지지만,
본향에 계시는 주님을 사모하는 그 마음은 더 선명하고
강렬한 열망으로 자라나게 됨을 느낍니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오승재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