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모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늙은이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느낀다.
해가 바뀌며 이런 감회에 젖는 것은 인생의 도리다.
그런데 1997년을 맞으며 우리 생각은 예년과 달랐다.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갔다 온 지 바로 20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0주년 때도 우리는 다시 한번 옛날 걸었던 길을 가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또 10년이 지났다.
이제 30대 젊은이들이 40대를 보내고 어느새 50대 초로 인생을 맞는다.
우리는 올해야말로 그 스무 돌의 뜻을 담아,
그동안 판권 문제로 미뤄오던 등반기를 출간하고
고상돈이 정상에 섰던 9월 15일에 표고 5400미터 쿰부빙하 베이스캠프까지 가기로 했다.
그러던 새해가 밝고 얼마 안 되어 한정수(韓楨洙)가 갔다는 소식이 왔다.
지난 1월 12일, 우리 모임의 총무격인 이상윤이 "회장님, 정수가..." 하고 말이 없다.
"정수가 갔는가?" 고 내가 다그쳐 물었다.
그 고약한 불치병으로 투병하던 한정수를 우리는 알고 있었으니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조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갔을 때 나는 50대, 대원들은 모두 30대 전후였으며 정수는 바로 서른살이었다.
사람은 세월을 따라 늙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서로 나이를 잊고 살았다.
당시의 젊었던 패기를 언제나 잃지 않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위 전변하는 법, 고상돈과 전명찬이 가더니 이제 한정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한편 도창호는 이국 만리로 이주하고 다시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며칠 전 한정수가 전화로 새해 인사를 했다.
그의 어조는 여전히 독특했으나 역시 기운이 없었다.
그 정도의 말도 간신히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순간 목이 메었다.
실은 내가 먼저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상대방의 괴로움을 생각하고 차일피일 하던 참인데,
이것이 우리 사이에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가 됐다.
한정수가 가고 그의 유해를 안치한 빈소는 조문객으로 붐볐는데,
그들은 거의 산사나이들이었다.
멀리 부산, 대구, 속초에서도 달려왔다.
모두가 생전에 고인과 오직 산으로 정을 맺은 이들이다.
그가 얼마나 폭넓고 진솔하게 살아왔는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특히 유명인의 경우 그 문상은 체면으로 얼굴을 잠시 내밀고 다녀가기 일쑤인데
한정수의 경우 일찍 오고 밤이 깊었으나 모두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리를 옮겨가며 정담에 여념이 없었다.
필경은 지난날 산에서 고생하던 이야기, 재미있던 이야기에 자기만 아는
에피소드들을 술잔을 돌려가며 털어놓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정다운 산친구들이 고인과의 정,
인간미 덕분으로 음산한 겨울밤을 훈훈하게 녹이고 있었다.
아마 한정수 본인도 자기를 중심으로 이토록 친지들이 모여서 떠들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한정수는 한때 쟁쟁했던 하켄클럽의 회원이었다.
요새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산악회와 달리 적어도
우리나라 등산계 초창기의 기초로 쌓았던 몇몇 산악회의 하나인 '하켄' 에 속한 것이 그에게는 내내 자랑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수를 알게 되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역시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던 무렵으로 기억된다.
원정훈련이 시작되던 1974년부터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젊은이들,
자천으로 타천으로 참가한 패기있는 그들 가운데서 정수는 언제나 돋보이는 존재였다.
한정수는 자그마한 키지만 그야말로 다부졌다.
그는 몸만이 아니라 유난히 큰 눈과 입,
넓은 얼굴로 언제나 정공법으로 상대와 대했는데 그 기염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그 표정과 어조가 실은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의 의욕과 정열에서 왔던 것을 그와 오래 사귄 사람들은 안다.
한정수의 자랑은 바로 암벽등반이었다.
바위를 타지 못하는 산악인은 산악인으로 어딘가 부족하다는 논리가 언제나 그에게 있었다.
나도 한때 그와 인수봉 취나드 루트를 오르기도 했지만 그의 몸매로 봐서는 바위에 붙을 것 같지 않았는데
사실 그의 등반 솜씨는 보통 수준을 넘었다.
그는 1975년 에베레스트 현지 정찰 때 이원영과 둘이서 푸모리 암벽을 올라가 보았다며
그 고도에서도 록클라이밍이 가능하더라고 자기 실력을 두고두고 자랑했다.
한정수의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대한 지식은 상당했다.
아직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생소하던 무렵, 정수는 벌써 크리스 보닝턴 책을 통해서 그 방면의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가 에베레스트 현지 정찰 요원이 되고 훗날 원정대의 장비를 맡게 된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러나 한정수의 에베레스트 원정 활동은 화려하지도 눈부시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대원들보다 몇 갑절이나 고생했다.
그것은 원정대가 그에게 믿는 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에베레스트 등반기' 에 두 편의 글을 남겼는데 '통관과 수송작전' , '후발대의 후발대로' 라는 글이다.
당시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한정수는 거의 혼자 맡다시피 하고 동분서주 하며 처리해 나갔다.
원정대 물자의 통관 수송 문제나 인부 사역 일은 원래 장비 담당이 할 일이 아니지만
그때의 상황에서는 한정수를 내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몹시 불만이었으나 대장의 지시 명령을 따라주고 모든 고역을 감수했다.
결국 정수는 부산에서 캘커타로 간 짐을 현지에서 통과시키고 그 짐들을 끌고 억지로 카트만두까지 왔다.
한편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380킬로미터의 캐라반 때
그는 후발대의 후발대로 끝까지 남아서 산적한 짐과 부족한 인부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며 따라왔다.
이런 일들은 심신이 다부진 한정수가 아니고서는 해내기 어려웠으리라.
이렇게 한정수는 베이스캠프에 진입할 때까지 원정대 후미에서 온갖 고생을 도맡았지만
등반이 시작되자 어느새 선봉에 나섰다.
마의 길목 아이스폴이 뚫리면서 표고 6500미터 지점까지 루트 공작이 시작된지 며칠 안 되어서
그는 드디어 C2 예정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때 대원과 셀파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는 급한 연락이 왔다.
현장에 도착한 셀파들이 막영 준비를 제쳐놓고
그곳에 흩어진 외국 원정대의 물건들에 대한 쟁탈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정수가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급히 셀파 우두머리 사다와 이야기해서 싸움을 조정하고 사태의 악화를 막았다.
드디어 사우스콜 진출이 끝나서 정상공격 작전에 들어가게 되어
나는 대원들을 ABC 전방 지휘소에 집합시키고 공격계획을 발표했다.
그 무렵 대원들은 표고 7500미터에 오르고 8000미터 고소까지 산소 없이 전진을 시도하며 저마다 의욕을 보였다.
물론 그 가운데 한정수도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가 가장 야심만만했던 대원 중의 하나였으리라.
나는 1차 공격에 박상열과 앙푸르바, 2차에 고상돈과 한정수로 결정했다.
이 발표에 대원들은 말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 한정수는 유난히 고개를 떨구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눈앞에 보는 듯하다.
그러나 1차 공격에 나섰던 박상열이 등정에 실패하자
2차 공격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나는 당초 계획을 바꾸었다.
결국 고상돈이 펨바 노루브와 짝이 되고 한정수가 여기서 빠졌다.
이 일은 나에게 영원한 의문이며 결코 잊지 못할 사건으로 남았다.
나는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때 당초의 계획대로 한정수 고상돈 조를 밀어부쳤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고상돈의 강약과 한정수의 강약이 서로 보완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니...
한정수는 50세 인생을 맞으며 타고난 정열과 패기를 더 이상 펴보지 못하고 갔지만,
내 가슴에서 끝내 풀리지 않는 것은 그때 고상돈과의 콤비를 그대로 밀고나가지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