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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로에 선 미술(5세기~13세기)..
1)로마와 비잔티움~~
동서로마(395년)로 분열되는 시점에 정치적, 종교적 분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저도 지금까지의 미술사와 단절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미 알던 내용은 복습하고 또 모르던 지식은 습득하며 재미있게 적었는데 너무 교과서 같은 포멧을 취하는 것 같아 "찻잔속의 혁명"이라도 이루어 보려고~~
분리의 이유는 단순 명료~~
서로 황제를 하려고 아우성이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니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버리고 이스탄불(비잔티움)으로 천도라는 미명으로 토사이..
콘스탄티누스의 거대상중 두상
*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제국의 제44대 황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1명으로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함으로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남긴 인물. 사두정의 혼란을 종식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체제를 재정비하여 제국의 수명을 천 년 이상 연장한 업적 역시 중요하다.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서방과 동방의 통일된 형태로서 장기간 존속하지 못한 것은 내외부적 문제가 겹친 결과일 뿐이고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1~2세대 정도는 세계가 온전히 재건된 것으로 여겼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공인과 니케아 공의회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기존 사회체제와 이념을 신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으로는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생각했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 질서, 즉 기독교를 택해 이를 공인하고 기독교의 분열을 정리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국교화, 혹은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 및 다른 종교를 차별, 탄압,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고, 기독교식 세례도 일부러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받았으며, 종교에 관련된 공식적인 표현을 상당히 정제해서 씀으로써 사회 통합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미 쇠락해 가는 도시로 수도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비잔티움을 택해 개발, 노바 로마를 창건하게 된다. 다만 이 도시는 당대부터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욱 자주 불렸으며, 도시 구조는 로마 시를 복제해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7개의 언덕이 있다.
한편 또다른 얘기를 하자면, 동서로 긴 지중해 특성상 동서 분할통치는 충분히 자연스럽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했지만, 그저 사두정치 시기의 실험적인 시도로 끝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도 그의 자의로 동방을 동생 발렌스에게 맡겼고, 발렌스가 전사한 이후에도 서방의 그라티아누스는 동방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테오도시우스에게 맡겼다. 동로마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니코메디아나 세르디카, 시르미움, 트로이, 테살로니카 등의 후보 도시로 천도했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목록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존속기간과 화려한 전적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인간이다보니 감투에 대한 욕심은 당연 지사~~
종교적으로도 카톨릭(서방교회)와 오스독스(동방정교)로 분리 지팔 지흔들기로 돌입하며 남남으로!
수도도 토사이한 지이름을 본따서 콘스탄티노플로 정하는데 서로마는 서로 박터지며 싸우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476년 멸망~~
이번 목록의 화두인 "기로에 선 미술"의 초창기는 서로마의 언급은 거의 없이 비잔틴 미술로 표현되는
동로마를 중심으로 소개하다가 서로마 제국이 짱(황제)는 종국을 고했는데도 살아남아 서로마의 패권을 위해 다투는 쪼무라기(각 국가의 왕들)에게 사탕(종교)으로 구스려면서 군림하는 교황이 득세하는 시대부터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이번 단락의 스토리는 별 언급이 없는한 동로마(비잔틴) 미술이니
헷갈리기 있기 없기? 정답 없기..
지편 몇명 데리고 토사이하곤 정통을 자처합니다만 심판(역사학자)은 16세기이후 "서유럽 중심 주의"로 돌변..
동유럽을 깔보며 "비잔틴"으로 분류~~
비잔틴은 초록동색인 유럽인들이 만든 조어로 "서유럽 중심 시각"이라는 오만이 만든 표현~~
서유럽은 훈족을 피해 피난온 게르만족들은 터줏대감인 라틴족등 박힌돌을 뽑아내며 지역에 따라 고트, 프랑크, 반달, 앵글로 색슨으로 정착하며 왕국을 형성 새로운 터줏대감 행세를 합니다.
그중 이후 프랑스 왕국이 되는 프랑크족은 눈치를 보다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유럽의 주도권 선점이라는 숟가락을 얹기에 성공합니다!
로마에 남은 굴러들어온 돌 서로마 교황도 프랑크를 포섭 실속을 유지하며 권력유지를 위해 종교라는 포승줄을 만듭니다..
동서로마 공히 까부는 놈들의 준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선동의 도구가 되기쉬운 예술부터 성상제작과 구약을 제외한 일체의 활동을 금지시킵니다..
박통, 전통, 노통등 제왕적 대통령권 행사하신 분들도 역사 공부 많이하셨나?
까불기 금지 조항은 바로 "중세 암흑기"이고 종교지도자라는 칼자리 쥔넘(교황)의 횡포가 기세등등했던 시절입니다~~
서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집회소도 고전기에 "바실리카"로 알려진 집회소를 본뜨면서 소박한 초기 양식으로 회귀하여 종교를 빌미로 본격적인 우민정책을 시도합니다!
5세기부터 일반인의 자유를 속박하니 서민들은 "핫바지 저고리"로 전락~~
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교육등 근본 대책은 관심없이 문맹들을 위해 종교 그림책 장난감을 만들어 맹종하게 합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1세(라틴어: Gregorius PP. 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I)는 제64대 교황(재위: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이다.
기독교 역사상 교황 레오 1세와 더불어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연유로 대교황 그레고리오, 대(大)그레고리오(라틴어: Gregorius Magnus, 이탈리아어: Gregorio Magno) 등으로도 불린다. 그레고리오 1세는 최초로 수도 생활을 체험한 교황이자 라틴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전의 그 어느 교황보다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전례 분야에서는 로마 양식 미사 전례를 개혁하여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들고, 각 지방에서 제각기 불리던 성가들을 재정리해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는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전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사후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즉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상징물은 교황관, 비둘기 모습을 한 성령, 책 등이며, 음악가와 가수, 교사, 학생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화가들은 종교가 시키는대로 복종해야 빵으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교회가 최대권력 기관이 되면서 사회 전반이 종교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다행히도 교황이 회화를 옹호함으로 동로마 바실리카의 벽면은 단순화되기는 하였지만 성경 장면의 묘사와 기독교의 상징이 장엄하고 뽀시랍게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서로마의 교회에서 미술에 종사하는 예술인은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던 과거에서 종교만을 기록하고 찬양하는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강압에 백기(충성 서약)으로 연명할 해법은 찾았습니다..
*화가들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선택한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
관련자료 링크 하니 참조~~
https://naver.me/FdGYVTyN
왕과 더불어 절대권력으로 변한
종교 지도자에 화가들은 먹고 살기위해 충성서약을 하고 시키는대로 "만"
그립니다.
476년의 서로마 붕괴는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입니다!
유럽을 호령하던 짱이 사라지고 조무래기들이 도토리 키재기 돌입..
서로마 짱(황제)가 사라지자 기독교의 공인으로 생긴 듣보잡했던 교회짱(교황)은 무주공산에 중개자이자 권력자로 무혈 입성..
그레고리우스 1세는 주변지역 지배권의 허락을 미끼로 도토리(군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수준이 뚝 떨어진 이민족을 교인으로 만들 사탕발림으로 회화를 적극 활용합니다.
유일신 신앙을 강요하기 위해 신과 인간을 미화하면 우상 숭배를 야기시키는 것으로 판단된 그리스 로마의 양식은 폐기처분하고 초딩용 그림(이집트 수준)으로 회귀를 강요하니 산전수전 다겪은 어른(헬레니즘)에게 동화책 읽어라고 채찍으로 어르면서 건네는 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동로마의 비잔틴 미술은 고대 로마의 예술전통, 초기 기독교 미술, 헬레니즘 미술이 혼합되었는데 종교가 최고 권위의 사회규범이 되면서 이런 저런 제약이라는 양념으로 수준을 뚝 떨어뜨린 것으로 정의됩니다!
종교의 시각이라는 제약은 예술인들에게 표현을 달리하여 종교 권력자의 구미를 맞추는 것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강화하는 도구(아이콘, 모자이크)를 생산하는 장인으로 변모하게 합니다..
컴퓨터 오락(헬레니즘)을 즐기던 성인(예술인)에게 연필(평면화) 한자루 달랑~~
오직 살아남는 방법입니다..ㅠㅠ
바실리카의 오병이어의 기적(좌)
이집트 <사자의 서>
서기 520년에서 BC1275년으로
무려 2천년을 역주행하는 종교의 기적을 연출한 것이 중세 암흑기~~
동로마의 화가들은 죽을 쑤었지만
건축은 황제를 뽀시랍게 보이도록 장려되었으며, 폼 살리려고 유스티아누스 1세는 화재로 소실된 <성 소피아 성당>이라는 대형 건축을 완성합니다.
모자이크 형상의 ICON 재현 황제상~~
대부분 성인으로 추대되어 당당하게 광배까지.
황제와 종교가 다스리는 세상은 모두들 짜증내는 을사년 지금보다 암울할지도..
*유스티아누스 1세
로마 제국 제61대 황제이며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제2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마케도니아 빈농 가문 출신으로, 군인 출신 황제이자 자신의 외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를 돕다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이후 그의 양자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서로마를 상실한 이후 침체되어 가던 동로마 제국의 기틀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영토 팽창을 도모한 초기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명군이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로마법 대전 편찬, 사산 왕조와의 화평, 니카의 반란 진압을 통한 전제군주제 확립,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의 명장 등용 및 고토 수복, 하기아 소피아 재건 등이 있다. 이러한 업적들과 교회에 대한 헌신 등이 높이 평가 받아 정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성(聖) 유스티니아누스로도 불리며, 대제(Megas) 칭호도 받았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도 불린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동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재건당시의 성당 재현도입니다!
*아야 소피아
532년 니카의 반란때 전소되었으며 전소된 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야 소피아의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웅장한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Isidoros)와 수학자인 트랄리스의
안시미오스(Anthemios)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는 아야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동로마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였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때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대성당도 약탈당했다.
헌당식이 거행될 때만 해도 벽면에는 펜던티브(돔의 지붕을 지지하는 모서리의 삼각형 부분)를 덮고 있는 긴 날개부에서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 있는 4개의 거대한 세라핌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당의 측면 복도와 회랑들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었고, 그것은 둥근 테두리 속의 거대한 십자가로 장식된 돔에도 반영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자료 링크합니다.
https://naver.me/GaM6ZgIl
8세기 성상파괴운동으로 성당내의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는 모두 파손되었으며 현재의 그림들은 모두 843년 이후에 제작된 것이며, 콘스탄티노플 함락이후 오스만 제국의 모스크로 변모되면서 "미나레트"라는 4개의 첨탑이 건설되고 벽화와 모자이크는 또 회벽칠에 가려지는 수난을 겪습니다.(일부는 복원되고 일부는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복원이 추진되면서 여전히 회벽속에 숨어 있으나 첨단 장비로 재현한 모자이크 벽화들을 글의 말미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개봉박두..
비잔틴의 미술은 과거로 회귀하여 평면으로 변한 초딩 수준의 회화들만 양산되었으나 그조차 소개하지 않으면 더 암담할 것 같아서~~ㅠㅠ
유구한 역사동안 사건 사고가 잦을 날이 없는 2011년 아야 소피아의 모습..
비잔틴 미술의 주특징은 이콘(ICON)과 모자이크 미술~~
예술가들은 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콘은 성인, 예수그리스도, 마리아를 묘사한 그림으로 고대 전제 군주 시절보다 더 심각한 종교적 제약으로 거룩함의 재현이라는 뽕꾸라 논리가 설정되어 "오직" 정면으로 그려지며 전신 또는 머리 어깨만 보입니다..
수도 없는 제재사항이 있는데 여권 사진이나 MZ들이 보관하는 아이돌 포토카드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동유럽 그리스의 바실리카에 수두룩한
ICON..
대부분 정면상이며 거리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Icon
상(像), 초상, 형상 등을 뜻하며, 그리스도교의 성상(정확히는 이콘이라고 하는 성화)을 뜻하기도 한다. 성화는 철자는 같으나 '이콘'이라고 읽는다.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어떠한 분야에서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 어떠한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 등의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중세 시대 화가들 열불은 술로 달래셨나?
예나 지금이나 "목구멍은 포도청"..
그런데 절대 권력자인 종교지도자들은 바른 어른이 생활을 하기는 하셨는지~~
ICON은 이해하셨나요?
그러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ICON은?
사람의 호기심은 끝이 없으니 확인해야죠!
시내산(추정)과 카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동부 시나이 반도의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라고 뻥치는 등산로 입구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습니다.
목판 이콘인 <판토크라토르>..
만물의 통치자, 전능자라는 뜻~~
예수 그리스도 성상입니다..
*판토크라토르
만물의 지배자,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며 (『신약성서』「요한의 묵시록」 11장 17절, 『니카에아 신경(信經)』 등), 그리스도 교 미술에서는 일군(群)의 그리스도 상(像)의 형상을 가리킨다. 가장 기본적인 형상은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 상으로 흔히 메다이욘 내에 반신상(半身像)으로 그려지며, 바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안고 있다. 중기 이후 비잔틴 성당의 원개 꼭대기 모자이크 장식에서 많이 보이나(예 : 다프니 수도원 성당, 1100년경), 확실한 명문(銘文)이 있는 것은 11세기 이후이다. 최초기의 예(로마,코모딜라의 카타콤베 천정화, 4세기후반; 라벤나,성 비탈레 성당,아치의 모자이크, 6세기 전반 등)에는 손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콘에서는 시나이 산(山) 성 카테리나 수도원의 이콘(6세기)이 있고 유스티누스 2세(Justinus II, 재위 565~578)의 황금 십자가상의 부조(565~578, 바티칸 미술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도상(圓像)에 그 기원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카타리나의 이콘은 비대칭으로 그려져 한쪽은 온화, 한쪽은 엄숙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표현..
한손에는 성경 다른 한손은 축복을 내리는 모습으로 정교회의 표준적인 성상으로 지정되어 정교회의 돔이나 제단에 대부분 배치됩니다.
카타리나의 판토크라토르..
인성을 보이는 왼쪽과 신성을 보이는 오른쪽 이콘을 좌우대칭으로 CG 작업~~
보시는 분들의 선택은..
동방정교의 바실리카에는 카타리나의 ICON을 표준성상으로 한 수도 없는 판토크라토르가 있습니다.
비잔틴는 굴러들어온 돌이 종교짱(교황)으로 선출되는 것과 달리 황제가 다해 먹습니다!
교황까지 겸직~~
유스티아누스 1세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리 논쟁을 해결하는등
종교도 전권을 행사합니다..
카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서열이 확실하지만 동방정교(오소독스)는 종교 지도자는 있지만 황제겸 교황을 제외한 지도자들의 계급은 없습니다..
비잔틴의 바실리카에는 성경속의 인물과 함께 황제들의 이콘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신의 선택을 받았기에 짱이 될 정당성이 있다고 윽박지르는 형상~~
서유럽은 비잔틴과 달리 왕국의 재편과 힘의 순위에 따른 일진순서를 가르는 극심한 혼란속에 8세기경에야 줄세우기가 끝나는데 이때 교황은 종교를 앞세우며 줄세우기에 적극 로비를 펼침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서유럽 통합 짱의 위치에 오르면서
게르만족이 건립한 왕국 전반에 관여하며 중세 봉건 암흑기로 진입하게 됩니다..ㅠㅠ
말미에 소개하기로 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 그리고 프레스코 벽화들로 중세 봉건기 진입 스토리를 마감합니다~~
황제 전용 입구 모자이크
아야 소피아를 출입하는 입구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 박공벽(tympanum)을 장식하는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재위 886 ~912년)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재위 913 ~ 959년)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남서쪽 입구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야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하며,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2020년 모스크로 용도변경된 이후로 이 모자이크 바로 밑에 기도방향인 미흐랍이 자리잡고있기 때문에 모자이크 앞에 커튼이 설치되었으며, 평소에는 흰 커튼이 올려져있으나 이슬람 예배시간동안은 커튼을 내려 가리게 되었다. 다만 작고 긴 모양의 커튼 여러 개로 가리는거라 커튼으로 가려져있는 동안에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보이긴 한다.
알렉산드로스 2세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2세 (912 ~ 913년)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
조이 여제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그를 상징하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의 모노그램이다. 콘스탄티노스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콤니노스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재위 1118 ~ 1143년)와 이리니 황후(Ειρήνη, 1088~1134.8.13),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 마리아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데이시스('Δέησις)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세계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왼쪽)와 성 이그나티오스(오른쪽)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들에는 유독 회칠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나 기독교권에서는 "높은 곳에 못 올라서 회칠을 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튀르키예에서는 "높이로는 무시 못할 블루 모스크라든지 그런 건 누가 지었는가"라며 그냥 놔둔 거라고 주장한다. 다만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오스만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 많은 옛 동로마 건축물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아마도 성화 한 두개 정도는 남겨두어 이 건물이 원래 성당이었음을 밝히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