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2.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39)
사도행전 21장 17절-22장 29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어도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두 말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시간은 자연스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늙게 만들고, 내면적으로는 늙게도 하고 성숙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변한다는 것은 물리적 변화이지 본질의 변화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강산은 변하고, 장사의 힘이 빠지지만, 강산은 변하게 되어 있고, 힘은 빠지게 되어 있는 것이 본질입니다. 변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본질이고 상황입니다. 시대가 사람의 옷을 바꿔 입히고, 먹거리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적 우수성의 변화가 있어도 사람이라는 본질, 그리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곳에서의 예배는 ‘새로운 곳에서의 첫 예배’입니다. 분명 장소가 바뀌었고, 조건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웃도 새로운 이웃이고, 동네 분위기도 새롭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예배드리던 그 식구들이 오늘도 같은 식구들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새롭게 만날 이웃이지만 그 이웃도 비전신앙공동체의 잠재적 멤버입니다. 여전히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이웃들이 변함없이 있습니다.
분명 달라진 것은 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씀해 줄 것입니다.
■ 바울은 모두가 만류함에도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포박 당하고, 죄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을 이들이 바울을 사랑하기에 그곳에 가지 말 것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의 만류를 거절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과제인 ‘땅 끝까지 증인됨의 사명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수가 되어야 세계정치의 심장부인 로마에 들어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길을 기꺼이 선택했던 것입니다. 죽음이 기다려도 이 길을 가야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단단한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형제들이 반갑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루의 환영에 불과했습니다. 도착 다음 날, 야고보 사도와 교회 장로들을 만났는데, 이 자리부터 각오를 더 단단히 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간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주님의 일들을 신나게 보고하였고, 듣는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염려하는 발언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염려인즉,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율법적 관습을 지키지 말게 한다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바울에 대해 벼르고 있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책(責)잡히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례(할례)를 행하고 관습을 지키는 것을 보여주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의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을 눈치 채야 합니다. 일전에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벌어진 격론(激論)으로 예루살렘교회에 질의하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할례 문제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어느 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등장으로 교회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격론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이 문제에 대한 질의를 하였습니다.
이 질의를 받은 예루살렘교회도 격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구원과 할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오늘 본문 21장 25절에 있는 내용을 도덕적으로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미 할례와 구원의 무관계성을 정해놓은 교회가 오늘 다시 바울에게 할례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모순이지 않습니까? 모순입니다. 본질적으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이 제안을 수용한 것입니다.(21:26) 이전의 바울 같으면 왜 정해진 대로, 원칙대로 하지 않느냐고 따졌을 텐데 오늘 본문의 바울을 장로들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그에게서 융통성을 봅니다.
■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변하지 않은 또 다른 상황을 보게 됩니다. 바울에 대해 단단히 불만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이 여기 예루살렘에도 등장한 것이고, 이들이 바울을 붙잡고 바울에 대해 과대 왜곡된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왜곡된 고발에 백성들이 동요되어 소요를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들은 이전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늘 보던 상황입니다. 바울에 대해 왜곡된 정보가 생산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일들이 이전에도 끊임없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바울의 정면 대응이나 측면 대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바울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순순히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에 넘겨질 때도 순순히 붙들려갔습니다. 이 태도는 안 잡히기 위해서 노력했던 이전의 태도들과는 달라진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달라진 태도는 그가 증언하는 내용의 변화였습니다. 이전에도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지만, 자신의 구원 과정에 따른 자기 간증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22장 1~21절에서 보다시피, 바울의 증언의 내용은 자기 간증을 빌린 증언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체험과 경험에 의한 증언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에게서 볼 수 없던 태도였습니다. 달라진 것입니다. 특히 이 달라진 태도에는 대범(大汎)함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만난 예수를 증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된 태도, 즉 순순히 붙잡히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이런 변화보다 충격적이라 할 만한 변화는 22장 22~2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공개했고, 이를 십분 이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로마군대가 바울을 잡고는 채찍질하며 심문을 하려고 하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나타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과 연관된 각종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 사람을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 합니까?”라는 말에서 당장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권력의 혜택인 로마시민권을 적극 활용하는 바울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 변화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태도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상황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태도를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바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바뀌면 좋지만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바뀌면 되지.’라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바뀌기도 하고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를 와서 첫 번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바뀐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대로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길 원한다면 우리가 바뀌면 됩니다. 상황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바뀌면 됩니다. 그러면 상황은 자연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비전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태도의 변화’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을 나눈 것처럼 우리의 구태의연함을 바꾸라고 이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상황을 좌우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비전교회가 이사하는 전체 과정에 개입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우리 인생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하지 않고 거룩한 개입을 하시는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자, 바뀝시다. 그래서 바꿉시다. 동네 이웃, 지역 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꿉시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