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모처럼 만에 3일간의 여행을 했다.
해마다 경남 함안에서 모시는 조상님 時祭에 갔다.
작년엔 다섯 형제들이 오순도순 友愛를 다지면서 시제에 참석을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큰 형님은 故人이 되셨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가 바쁜
몸이라, 나 혼자서 만사 제쳐놓고 참석을 한 것이다.
예년엔 토요일에 출발해서 중간 지점에서 숙박을 하면서 형제들 우애를 다지면서
낯선 곳의 낭만을 마음껏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제지간의 따뜻한 정은 언제나 푸근하고 든든해서 좋았다.
그러나 이번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자동차로 밤길을 달렸다. 음악을 틀어놓고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주변의 밤의 운치를 마음껏 감상한다.
아침 9시쯤에
함안에 도착했다.
함안 법수면 선영 묘역에서 각지에서 오신 친족들이 모여 아침 10시에 제사를 모신다. 일가친척 나란히 층층이 줄을
만들어 절을 200번도 더 하고나면 오후 2시쯤에 끝이 난다.
올 때는 합천 고향에 들리거나, 대구 친구들한테 들러서 모처럼
만의 고향사람들과 친분을 다지기도 했으나, 올해는 부산으로 가서 산천경개를 한 바퀴 돌면서 가을 여행을 하기로 작정했다.
잘 만든
진주-부산의 고속도로는 시원스럽고 주위 경치는 볼만했다. 만덕 고개를 넘어서 옛날 우리 형제들이 살았던 범일동 동내를 먼저 찾았다. 약 40년
전에 살았던 곳이지만 아무리 훠이훠이 둘러보아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뿐이다. 동네 곳곳에 어려있는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두 바퀴나 돌았지만 그때 동내사람을 한 명도 만날 수가 없다. 그때 사람들이 온통 딴 곳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곳곳에 묻어 있는
사춘기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웃 아가씨와의 아스라한 풋사랑을 되살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 때의 이웃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그리운 상념에 잠긴다.
광안리를 지나 해운대로 갔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라도 변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부산은 너무나 많이
변하고 있었다. 광안리 바다 위에 펼쳐 놓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해상 교량은 수많은 자동차의 율동으로 넘친다. 대단했다. 해운대 글로리 콘도
회원권이 있는지라, 문의 했어나 미리 예약을 안 했다면서 입실을 할 수가 없단다.
인근 모텔에서 여장을 풀고 혼자서 해변을
거닐었다. 수많은 외국인들과 내국인 아베크족들이 아름다운 해운대 밤의 해변을 걷고 있었다. 해운대 해수욕 백사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으로 널리
알려 져 있다. 유명하다고 소문이 난 하와이 와이키키 해수욕장을 보았지만 이곳 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쯤 찬 달은 바다
물결을 은빛으로 출렁이고 있었고,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휘황찬란한 불빛을 몸에 감고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해변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갔다.
어스름 해운대 어느 횟집
수족관에서 우럭 몇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입을
벙긋벙긋
물을 마시고 있다
바닥엔 해삼과 멍게도 있다
험상궂은 우럭 한 마리가
수족유리 너머 나를
노려본다.
검은 반점이 숭숭 솟아있고
날카로운 지느러미
삐꿈 나온 아가리가 고약하다.
험한 생김새
보다
흑진주 새카만 눈망울이 착하다.
덩치 큰 우럭 한 마리가
성질 난 아이처럼 부릅뜬 얼굴로
느긋하게 두리번
거린다다
네놈 동료의 말랑하고 쫄깃한 살을 안주로 삼고
거나하게 한잔하고 있는 나를 노려본다.
야
임마!
너네 들의 말캉한 살로 기분은 좋지만
미안하다. 미안하다.
무표정한 주인아주머니가
수족관에 그물을
넣는다.
순식간에 그놈을 낚아 채우고 간다.
10분쯤 후
옆 테이블 젊은 연인 앞에
칼자국 난 그놈이
차려진다.
우럭의 육덕보시(肉德布施)가
나그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다. 동해안 입구
송정과 기장을 거쳐서 울산으로 올라왔다. 울산은 공업도시로 많은 발전을 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원통 기계장치로 즐비한 공장지대를 지나
시내로 들어왔다. 현대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점심을 먹고 색깔 고운 샤쓰 하나를 사고, 근처 시내를 빙빙 돌았다. 부근에 있는 롯데
광장은 화려했고 대단했다.
경주로 차를 몰았다. 만추의 아름다운 계절은 온 山野를 울긋불긋 색칠을 하고 있다. 거리마다 가로수의
색깔이 달랐다. 어느 거리는 색동옷으로 단장했고, 어느 거리는 노란 은행잎으로 장관을 보여준다. 불국사 근처 어느 콘도를 지나다 유황 온천이
유명하다는 말에 들어가서 온천욕을 즐겼다. 두어 시간쯤 목욕과 휴식을 마친 후 불국사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니 감포로 가는
방향이 보인다. 처음 생각엔 경주 근처로 알았는데 아무리 달려도 끝이 없다. 멀고도 상당한 거리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감포
바닷가는 추억어린 곳이다. 20 여 년 전이던가. 동내 친목회원들이 그곳을 간 적이 있다. 단짝친구 셋이서 버스 안에서 갖고 온 양주를 홀짝
거리다가 그만 과음을 하고 곤드레만드레가 된다. 세 사람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닷가 백사장에서 벌렁 뒹굴었던 기억이 새롭다. 달콤하고도 쓰디쓴
추억이 빙그레 미소 짓게 한다.
경주로 차를 몰았다. 자주 가는 곳이지만, 언제 보아도 아늑하고 포근한 古都다. 보문단지를
지나 이리저리 시내를 한참이나 돌아다닌다. 어느 변두리 찜질방을 하루 숙소로 잡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찜질방을 나와 경산,
대구를 지나서 내륙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길은 상주까지 시원하게 잘 되어 있었고, 문경을 지나서 수안보 온천으로 갔다. 가을이 한창인데 관광지는
썰렁했다. 손님하나 없는 어느 식당에서 올갱이 국밥을 먹고 있는데, 얌전하게 생긴 식당 아주머니는 요즘 경기가 너무 한산해서 큰일 났다는
것이다. 온천장에 있는 호텔과 모텔이 빚에 못 견뎌 경매에 넘어 갈 집이 수두룩하다고 한숨을 쉰다. 온천 손님이 뜨음하고, 돈을 안 썬다는
것이다. 한 말로 불경기를 심하게 탄다고 한탄이다.
딱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 진다.
느긋하게 낭만을 즐기면서 하룻밤을
온천장에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마을이 한적하고 쓸쓸해서 바로 귀가 길에 올랐다.
먼 山을 바라보니, 사방 천지에 만추(晩秋)의 단풍이
벌겋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2003년 11월 석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