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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3년 5월 10일(금)
장소 : 울진군 일원(봉평신라비전시관. 불영계곡. 불영사. 망향정. 월송정)
반월당(08:00출발) - (208.8km. 3시간30분) - 봉평신라비전시관(11:30 도착.관람1시간.12:30 출발. 점심 1시간) - (19.5km. 30분) - 불영사(2:00 도착. 관람 1시간. 3:00 출발) - (11.5km. 18분) - 망향정(3:18도착. 관람 40분. 3:58 출발) - (28.0km. 32분) - 월송정(4:30 도착. 관람 40분. 5:10 출발) - (171.km. 2시간30분) - 반월당(7:40 도착)
울진
울진은 경상북도 동쪽 최북단 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6만여 명이 사는 고장이다. 원래는 북쪽에는 울진군, 남쪽에는 평해군으로 다른 행정체제를 갖고 있던 지역이었으나, 1914년 두 군을 합쳐 지금의 울진군이 되었다. 또 그동안 강원도에 속해오던 것을 1963년부터 경상북도로 옮겨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 인해 경상북도에서 8번째로 넓은 영역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군세(郡勢)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에는 어느 지역보다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동팔경 중 2곳이 바로 이 울진군에 속해있는데,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이 바로 그것이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국보 제242호.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 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봉평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울진봉평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비는 1988년 3월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는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문화재청 자료)
불영계곡군립공원
불영계곡군립공원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 불영사에 이르는 계곡이며, 총 길이 15㎞에 이르는 장대한 계곡으로 1979년 12월 명승 제6호, 1983년 10월 불영계곡군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불영사가 있어 불영사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불영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매우 오래된 사찰이다. 현재까지 많은 스님이 수행 정진하고 있는 사찰이면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비구니가 수행하는 사찰이기 때문에 특히 정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사찰 경내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풍부한 계곡의 물은 사찰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변화하는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고 했던가. 불영사는 지금도 꾸준히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 제일의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눈 푸른 납자(納子)들이 '내가 부처가 되고 중생이 부처가 되게 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는, 그래서 역동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한 사찰, 항상 구도자와 탐방객에게 꿈속의 사찰과 같은 현실의 사찰인 것이다.
울진 불영사(蔚珍 佛影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천축산불영사기 天竺山佛影寺記〉에 의하면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동해로 향하고 있는데 계곡에 어린 오색의 서기(瑞氣)를 발견하고 가보니 연못 안에 9마리의 용이 있었다. 이에 도술로 가랑잎에 '火'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니 갑자기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친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뒤 의상대사가 다시 불영사를 방문할 때 한 노인이 '부처님이 돌아오시는구나.'라고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도 불렸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했는데, 1396년(태조 5)에 나한전만 빼고 모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소설(小雪)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다시 영산전만 남고 모두 전소된 것을 1609년에는 성원(性元)이, 1701년에는 진성(眞性)이, 1721년에는 천옥(天玉)이 중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응진전(보물 제730호)·대웅보전(보물 제1201호)·극락전·명부전·조사전·칠성각·응향각 등이 있다. 이밖에 3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양성당부도·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蔚珍 佛影寺 大雄寶殿.보물 제1201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 불영사 (하원리) )
대웅보전은 절에서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중심 법당을 가리키며 지금 있는 건물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11년(1735)에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씩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각 공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건물에 색을 칠한 단청 부분을 들 수 있는데 바깥쪽은 다시 칠하여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안쪽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천장부분을 비롯한 벽, 건물을 지탱하는 굵직한 재료들에 그림을 그린 기법들은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건축양식과 기법연구, 격조 높은 불교그림과 단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문화재청)
불영사 영산회상도(佛影寺靈山會上圖.보물 제1272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 불영사 (하원리))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대개 불상의 뒷벽에 위치한다.
이 영산회상도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의 옷을 걸쳤으며,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석가여래 주변으로 10대 보살, 사천왕상, 상단의 10대 제자 등이 배열되어 있다. 주로 영산회상도에서는 8대보살이 그려지는데, 이 그림에서는 10대보살을 표현한 점과 석가불 아래의 그 보살이 유난히 큰 점이 특징이다. 석가의 옷이 붉은색이고 석가 뒤의 광배가 이중으로 붉은 테를 두른 점등은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보다 약간 앞선 양식적 특징이다. 채색의 사용법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조선 영조 9년(1733)에 그려진 이 그림은 격조 있는 양식, 양호한 보존상태 등으로 18세기 초 조선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불패(蔚珍 佛影寺 佛牌.경북 유형문화재 제398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하원리 120))
불영사에는 불패 2기가 대웅보전 안에 있다. 불패 1은 좌대와 패신으로 나뉘어 지는데, 패신 앞면에는 ‘우순풍조 국태민안(雨順風調 國泰民安)’이라는 글자(원래 한글로)가 적혀 있으며, 액자 주위로는 황용과 운문 등 화려한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크기는 높이 71.8 × 폭 40.5cm이다. 불패 2는 좌대는 결실(현 복원됨)되고 앙련대와 패신만 남아있는데, 중앙의 액자에는 명문을 확인할 수 없으며, 주위로 봉황, 운문과 꽃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크기는 높이 34 × 폭 24.2cm이다. 불패 1의 패신 뒷면에는 불패를 조성하게 된 발원문이 묵서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불패(佛牌) 3위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 3위를 1678년(조선 숙종 4)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2점만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신중탱화(蔚珍 佛影寺 神衆幀畵.경북 유형문화재 제423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하원리 120))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신중탱화는 삼베(麻) 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전체 크기는 세로 230.5cm, 가로 236.2cm이며, 화면크기는 세로 214.5cm, 가로 223.1cm이다. 팔곡병풍을 배경으로 상단에는 제석과 범천을,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축으로 좌우에 무장의 天龍八部衆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가장 많이 애용되었던 것으로 신중도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제석천과 범천은 주위로는 일월천자와 보살, 주악 천중 등의 天部衆이 둘러 서 있다. 이 아래 갑옷을 입고 깃털장식 투구를 쓴 위태천은 두 손으로 양쪽에 가지가 달린 삼차극(三叉戟)을 세워 잡은 모습인데, 앞 열 좌우로 사천왕, 팔부중 등 천룡팔부를 각각 3위씩 배치하였다. 그 뒤쪽 열에는 투명 두건과 草衣 착용에 백우선(白羽扇)을 쥔 산신, 명왕과 사갈라용왕을 배열하였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반면 돋보이는 청색과 흰색의 남용으로 인해 화면이 밝아졌으나 차분한 느낌을 유지하고 있다.
화면 하단의 畵記를 통해, 1860년(철종 11)에 金魚인 意雲 慈友 등 5인의 畵員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意雲(堂) 慈友(1856~1873년 활동)는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강원도까지 활동한 金魚로서 최고의 지위인 도총섭의 직함까지 갖춘 화승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 보존되어 있다.
이 신중탱화는 하단에 촛농이 떨어진 자국 등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정밀한 형태 묘사, 조화로운 색채의 구성, 힘 있는 필선, 화사한 문양과 장식 등에서 완성도가 높은 19세기 불화 가운데 수작이라 판단되므로 有形文化財로 지정한다.(문화재청)
불영사 삼층석탑(佛影寺三層石塔.경북 유형문화재 제135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하원리 122))
불영사 내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올렸으며, 몸돌의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탑으로, 기단의 조각수법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응진전(蔚珍 佛影寺 應眞殿.보물 제730호. 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 불영사 (하원리))
조선 태조 5년(1396) 나한전만 남긴 채 화재로 모두 불에 타 버렸고 임진왜란 때에도 영산전만 남기고 모두 불 타 버렸던 것을 훗날 다시 짓고 많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가섭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1984년 수리 공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여러 번 고쳐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래는 영산전이었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4짝 여닫이문을, 양쪽 칸에는 작은 창을 달아 놓았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에 남아 있는 단청은 안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중기의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울진 불영사 불연(蔚珍 佛影寺 佛輦.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 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하원리 120))
불영사에는 2채의 불연이 있는데, 매년 석가탄신일 때 아기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이때 이 불연을 사용하고 있다.
불연 1의 받침대 하부에는 조련기가, 불연 2의 받침대 하부에는 시주질이 묵서되어 있는데, 이 명문들에 의해 불연의 제작시기와 제작동기, 공역에 참가한 시주자와 승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불연 1의 크기는 높이 125 × 난간폭 86 × 길이 311cm이며, 불연 2는 높이 125 × 난간폭 80 × 길이 303cm이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나간을 두른 집모양으로 받침대, 몸체, 지붕으로 분리되게 조립하였다. 받침대는 누각의 난간과 같은 형태이며, 앞뒤에 두개씩의 손잡이를 만들었고 난간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각각 장식하였다. 몸체는 창이 있는 벽체를 돌렸으며, 벽체에는 화려하게 여러 가지 꽃을 조각하였다. 지붕은 녹색비단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부에는 연봉을 세워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불연들은 1670년(조선 현종 11)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불영사 불연은 제작연대가 있어서 유물양식의 편년을 설정할 수 있고 시주질(施主秩)을 통하여 불영사의 알려지지 않은 승려의 계보 등을 알 수 있어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조각수법이 정교하며 현재까지 알려진 불연 가운데 연대가 알려진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문화재청)
불영사 부도(佛影寺 浮屠.경북 문화재자료 제162호.경북 울진군 서면 불영사길 48(하원리 산34))
불영사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조선 전기의 승려인 양성당 선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양성당 선사의 이름은 혜능(惠能)으로, 12세에 출가하여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숙종 22년(1696)에 돌아가셨는데 화장을 하고 나니 사리가 발견되어 이곳에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모셔두었다 한다.
탑은 사각 바닥돌 위로 납작하고 둥근 기단(基壇)을 두고,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의 옆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러 새겨 놓았고, 탑신의 어깨부분에도 연꽃무늬로 받침을 이루게 한 뒤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어 두었다.
선사가 돌아가신 해인 조선 숙종 22년(1696)에 부도를 세웠으며, 부도비는 조선 영조12년(1736)에 설치하였다.(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의상전
의상조사의 영정과 더불어 원효대사, 종봉대선사, 청허대선사, 인현왕후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의상전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로 원래는 인현왕후의 원당(願堂)이었다. 원당이란 왕실의 복을 비는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이러한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통도사·선암사·직지사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찾아 볼 수 있다. 단순히 왕실의 복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왕손의 태를 사찰 인근에 묻고 이를 축원하는 기능도 맡아 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숭유정책 속에서 불교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기능이기도 하였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인경왕후가 죽자 왕비가 되었으나 장희빈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희빈에게 밀려 났다가 다시 복위되는 비운의 왕비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영사의 스님과 가졌던 인연이 사찰 내에 있는 사적비에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 때문에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가 자결하려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데 내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궁희가 꾸민 사건이 발각되어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를 세워 부처님의 은혜에 사례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원당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의상전은 불영사가 갖는 왕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디지털울진문화대전 자료)
오누이의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의 전설
옛날 부모님이 호환을 당하여 고아가 된 오누이가 약초 캐는 일로 연명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서 병이나 이 곳 불영사 계곡에서 자생하는 삼지구엽초를 구하고자 하나 산양들이 뜯어먹어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아주 높은 절벽 위에만 있으니 구해 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노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사흘 동안 정성껏 기도를 하고, 계곡의 높은 절벽에 올라 이레 만에 천신만고 끝에 벼랑에 늘어진 삼지구엽초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팔을 뻗다가 오빠가 실수로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누이는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가 마침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 뒤 계곡에서 울리는 누이동생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아 신령님이 두 남녀를 바위로 변하게 하여 평생 떨어지지 않게 포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통곡 소리가 들리던 산을 통고산 또는 통곡산이라 이름 붙였고, 사랑하는 오누이가 떨어져 죽을 때 흘린 피가 묻은 소나무는 껍질과 속까지 붉은 울진소나무(황장목·적송·금강송)가 되었다고 한다.(울진군청 자료)
망양정
망양정은 울진군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왕피천 하구에 위치한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산 정상에 날을 듯 앉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이다. 망양정은 고려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조선 1471년(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기슭으로 옮겨 놓은 후부터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1517년(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 해에 안렴사 윤희인(尹希人)이 평해군수 김세우(金世瑀)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또 허물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방치될 때 1854년(철종 5)에 울진현령 신재원(申在元)이 망양정을 이축할 것을 향회(鄕會)에 발문해 지금의 위치인 둔산 해안봉에 장소를 정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60년(철종 11) 윤 3월 6일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옮기고 그 이름은 그대로 하였다
월송정
월송정은 울진군에서도 남쪽 평해에 위치한다. 월송정(越松亭, 月松亭)은 그 유래에서도 2가지 설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지은 다음의 ‘월송정기’에 잘 나와 있다.
"월송정은 군청 소재지의 동쪽 6·7리 거리에 있다. 그 이름은, 어떤 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소리(聲音)가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두 설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달월(月)자를 버리고 월나라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해군편에는 신라시대 술랑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고 하였다. 「관동지」·「관동읍지」등 에는 신라 때 화랑들이 달밤에 솔밭에서 달(月)을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달월(月)자를 쓰기도 하고, 중국 월(越)나라의 소나무를 옮겨와 이곳에 심었다 하여 월나라 월(越)자를 써서 월송정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기록들이 간략히 보이고 있지만, 사실 어느 하나라도 쉽게 믿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18세기 전반~20세기 전반까지 간행된 조선시대 「여도」·「팔도지도」·「여지도서」·「해동지도」등 20개의 고지도(古地圖)에서 ‘월송(정)’ 명칭에 대해 살펴보면, 월나라 월(越)자를 표시한 것이 17개이며, 달월(月)자를 사용한 것은 3개뿐이다. 또 일본에서 1873~1882년에 간행된 「조선국세견전도」·「오기팔도 조선국세견전도」·「동각 조선여지전도」·「원 조선팔도지도」·「조선전도」를 살펴보아도 모두 월나라 월(越)자를 사용하여 월송정을 표기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18세기 전반에는 ‘월(越)송정’ 이었으나, 19세기 전반부터 ‘월(月)송정’을 혼용하다가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곧 바로 사라진 것 같다. 이렇게 당시 고지도들을 통해서도 월송정의 명칭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월송정의 창건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존무사 박숙(朴淑)이 창건하였다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찰사 박원종(朴元宗)[1467~1510]이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축(安軸)[1287~1348]의 취운루 기문에 의하면, 고려 충성왕 4년(1312)에 벌써 월송정(越松亭)이 있었으며, 또 안축이 강릉도 존무사로 1330년에 임명되어 해당 지역을 둘러보고 남긴 「관동와주(關東瓦注)」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월송정이 이미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곡(李穀)[1298~1351]의 시에 정자가 기록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즉 늦어도 14세기 초에는 이미 월송정이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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