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입문 - 4. 방편
이전에 봉팔이 이야기를 하였다.
만약 그 규칙이 효험이 있었다면... 봉팔이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 그것은 실제적이다 ! >>
이 때... 우리는 보통 무언가가 그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이제 봉팔이는 많건 적건 이전보단 진지하게 불교에 접근할 가능성이 많다. 즉 봉팔이는 불교라 이름하는 꿈 속으로 한발짝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바로 신심을 낸 것이다.
이제 봉팔이에게 무엇이 알려 져야 할까?
수 많은 유용한 지식과 기법이 있다.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까?
봉팔이가 뭔가 실제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뭘까?
마음을 다루는 기술... ?
그렇다.
봉팔이는 불교란 마음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실제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유용한 테크닉이라는 뜻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기법이다.
여기서 이전 글에서 봉팔이의 마지막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살펴 보자.
옮겨 오자면... < 그대가 이제껏 불교에 대해 말한 내용의 결론이 그거요? > 였다.
위의 말의 의미는 뭔가?
봉팔이는 의식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봉팔이의 최대 관심사는 소화불량을 일으킨 갈등을 소멸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마음은 결론을 추구한다.
애초에 봉팔이가 원한 것은 테크닉이었던 것이다.
봉팔이는 물론 우리는 흔히 자신이 원한 것 즉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엇의 가치 판단을 한다. 종교등에서 테크닉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런 점까지도 알고 계셨다.
불자다 보니 눈에 콩깍지가 씌여 일단 부처님은 무조건 높이고 보는 그러한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유명한 '뗏목의 비유'에서 선수를 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위의 비유 마지막 부분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 ... ...
내가 가르쳐 온 법(法)은 뗏목과 같으니... 법(法)조차 버려야 하거늘... 비법(非法)이라면 더더욱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
위에서 인용된 말이 의미에 대해... 열반을 성취했다면 더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식의 대답이 하나의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문제가 많은 견해이다.
만약 어떠한 이가 열반을 성취했다면... 도대체가 사성제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것 같은가?
만약 그러한 집착이 일어난다면 열반을 성취한 것도 아닐 뿐더러... 열반을 성취한 자가 사성제의 어떠한 내용에 집착이 일어날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 보라.
그런 일은 가능하지가 않다.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사실 < '일차적 의미의 열반이라도 성취한 자' (아라한) >정도만 되어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 '뗏목의 비유'를 설하셨겠는가?
그런 이유에서라면 뗏목의 비유가 설해질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한 것을... 고정관념만 되내이며 안다고만 하기에... 모르고 지나는 것이다.
고정관념이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불법은 바르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뗏목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실제 그 비유가 가지는 의미는 한량없지만... 이 글의 목적과 관계하여 아주 제한적으로 그 의미를 설명해 보자.
위에 인용된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법(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지만... 한 번 더 적어 보자.
법(法)은 보통 다르마를 번역한 것으로... 위에서의 법이 그러한 경우이다.
인도의 다르마는 참된 상태와 거짓된 상태등을 모두 총칭하는 단어이다.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그 무엇이든... 다르마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무엇은 있을 수가 없다. 원래 다르마가 무엇이든 다 포섭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법에서 법(法, 다르마)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위와 같은 경우에 법(法)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떠한 상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한가?
애초에 불교에선 가르침과 어떠한 상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가르침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마음과 함께 한다. 신심과 함께 하기에 꿈 즉 어떠한 상태를 자아 낸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법이라 함은... 가르침이자 가르침과 함께 하는 신심이 드러내는 상태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보다 더 사실과 부합한다.
그렇지 않은가?
더 나아가 불법에선...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하여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특정하게 일어나는 마음은 특정한 상태를 드러낸다. 법이란... 그 마음이 일어나는 특정한 방식이자 그 마음이 드러내는 상태이다.
여기서 <마음이 드러내는 상태>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그 마음까지 포함한 것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란 마음이 드러낸 상태를 떠나 있는 그 무엇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까지 포함하여 모두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예로... 만유인력에 따라 드러나는 질량을 가진 입자의 특정한 상태가 있다고 할 때... 입자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마음이라 이름하고 만유인력을 법이라 이름하며 그 입자의 상태도 법이라고 이름한다. 원래 만유인력과 그 입자 그리고 그 입자의 상태는 서로 따로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 불법에선 애초에 인식과 드러남이 따로인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이를 <연기는 인식론이자 존재론>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말에 대해...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아는 경우를 예로 들며 반박해선 곤란하다.
불법에선 미망된 법조차 법이라고 표현한다. 즉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아는 마음이 새끼줄을 뱀이라고 인식하는 순간에 분명 있으며...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아는 마음의 드러남 자체도 법이다.
게다가 불교는 대상이 무엇인가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아는 마음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새끼줄을 뱀인 줄 아는 마음 상태는... 실제 뱀을 보았을 때의 마음 상태와 다르지 않다. 즉 무엇을 보았든... 본 것이 뱀이라고 아는 순간... 실제 뱀을 본 것과 함께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드러낼 것이다.
새끼줄이 뱀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즉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지만... 대상이 실제 뱀이든 아니든 그것을 뱀으로 알고 놀란 그 마음의 상태는 거짓된 것이 아니다.
개인적 수행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된다. 자기 문제부터 보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안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지적하기만 해선 곤란하다. 그 어리석음이 드러낸 마음의 상태는... 뱀을 뱀이라고 하고 새끼줄을 새끼줄이라고 하는 만큼... 참되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 대상에 대한 거짓된 앎도... 대상에 대한 참된 앎만큼... 참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낸다. >>
이 사실을 놓쳐선 안된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마음이 드러내는 꿈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가슴에 와닿게 이해할 수 있다.
섣불리 진리를 선언하거나 말하려 하지 마라. 그것이 새끼줄인가 뱀인가를 아는 것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새끼줄이냐 뱀이냐만 따지려 들다 보면 중요한 다른 무엇을 항상 놓치게 된다. 참된 것은 대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본다...
마음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게다가 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아주 어렵다.
불법의 마음이란 보통 마음이란 단어에서 생각하는 그러한 무엇만이 아니다. 불법의 마음은 입자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아주 광범위한 개념으로... 차라리 오늘날의 물질이라는 개념이 마음이라는 개념보다 불법의 마음에 더 가깝다.
< 드러남은 물론 드러나지 않음조차 마음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다. >고 말해도 틀리지 않은 이유이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쳐온 법조차 버려야 한다 함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드러난 어떠한 상태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 드러난 일차적 의미의 열반이라는 법조차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행자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행자의 마음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그 마음이 드러내는 상태를 떠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단순히 지식에의 탐착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아라한 정도만 되어도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의미에서의 지식에 대한 탐착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뗏목과 같기 때문이다.
바로 도구 즉 테크닉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신심과 함께 하는 수행을 통해 드러난 삶 자체가 도구 즉 테크닉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는 누차 말해 온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업이다. 그러므로 수행으로 형성한 것은 업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였다. 그 결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러 가지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로 < 사심(捨心 : 버릴 사, 마음 심) >을 말하는 것이다.
뗏목의 비유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즉 법조차 버려야 한다는 말의 의미 중 하나가 바로 < 사심 >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선불교에서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 < 사심선(捨心禪) >이다.
방편의 의미를 바로 알고 수행으로 드러나는 삶이 방편임을 아는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의 주요 테마의 하나인 신심의 자각 즉 반야의 출발이다.
이러한 사심은 발견되는 것이자 형성되는 것이며 형성하는 것이다.
불법이 방편임을 아는 것이기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방편임을 아는 것은 수행이기에 형성되는 것이며... 수행을 통해 신심으로 드러난 다음에는 그에 따라 꿈을 꾸기에 형성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그리고 사심을 발견하여 법에의 집착을 떨친다.
이것은 뭔가?
바로 < 머무르지 않음 >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선수를 치는 것...
방편...
바로 방편이라는 말의 의미 중 하나이다.
이리하여... 불자가 수행을 함에... 수행에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으로 나아가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여 드러난 것은 봉팔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그 자체로 유용하다. 하지만 그것은 유용한 것이지 불자의 꿈이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가섭존자에게 연꽃을 건네주는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건네준 연꽃은 단순히 연꽃이 아니라 부처님 그 자신이기도 한 불법이었을 것이다.
불법은 고액을 건네 주는 뗏목이기도 하지만... 고액을 건내 주는 것은 불법의 기능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불법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지고한 앎이다.
원래 지고한 앎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고액을 넘어 넘어 가는 일이다.
첫댓글 잊지않기님 약속대로 두편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줄리님, 이런 약속은 엄청 잘 지킬 자신 있어요.
고마버요
"...방편의 의미를 바로 알고 수행으로 드러나는 삶이 방편임을 아는 것..." ------------> 이말이 계속 마음에 남네요. 뜻이 와닿지 않아서....
???
[방편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수행으로 드러나는 삶이 방편임을 아는 것...]
그냥 본글 내용인데요... 본글이 방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해당 문장 위를 보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업이다. 그러므로 수행으로 형성한 것은 업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업과 과보가, 드러남이구요... 그게 삶이잖아요... 불자로서 불법에 의지한 삶 그 자체가, 방편이라는 거예요... 어려울게 없어 보이는데요...
방문객님 ...어려워져요 정말이지 내가 불자로서 불법에 의지하고 있는지 아리송해져요 점점...
줄리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해서, 다른분들도 한번 얘기해봐 주세요.
꼭이요.
수행(업)의 과보로 드러난 삶이... 또다른 속박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하신 말씀 같은데요...불법도 버려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 같습니다...방편으로... 부처님의 지혜인 불법을 드러내는 거라고 보는데요...마음을 버려라 하는 말도 같은 이치겠죠... 그리고 어떤 상에 속박된다는 것은... 마음이 시간과 연기하여 일어날 때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그래서 일상의 삶 속에서도 '사심'하기 위해서 애쓰기 보다... 이 순간에 깨어있음으로... 사심이 된다고 봅니다.
속박이 된다고 하는데,
무엇이 속박되는 것인지 .. .. 기양 제가 생각해보려고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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