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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말 5 최하림
가을의 말 5
지금은 돌아와 발을 씻는다
누른 담장을 지나 황혼이 문전을 빠져나가는
인식의 바깥에서 인식의 바깥에서
가을이여 가을이여
천마리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나날은 물처럼 진행되어가고
떨어져야 할 것도 잔명(殘命)의 것들도
지금은 품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오랜만에 우리들은 귀착(歸着)을 본다
날이 끝으로 지고 그 뒤에서
오랜 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세상을 보는 아내 불어오른 배로
세상을 담고 있는 아내여
내일은 죽음으로 떨어져가고
우리도 역시 그 길로 갈 것이다
내일은 죽음이다 내일은 물이다
나의 발이 담겨진 물
나는 문전을 빠져나가는 노을 속에서
이렇게도 오늘은 무상하게 물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겨울 정치 최하림
겨울 정치(精緻)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향하여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사람들이
어이어이어이 울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겨울나무를 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 지령(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 온다 개들이 짖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삼한(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
기다리는 노변에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
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겨울 초상화 최하림
겨울 초상화(肖像畵)
□ 1
우리 어머니는 트럭을 타고 강진이네
해남이네 고훙이네로 다니며 쌀을 사다가
목포에다 팔았다. 과수댁인 어머니는
새벽 일찍 사립을 나서서 하룻밤 내지 이틀밤을
객지에서 밥먹고 잠자고 나무토막처럼 지쳐서
돌아왔는데, 그때는 그 밤들과 싸우고
쌀과 싸우고 남정네들과 무지무지 싸웠다고
한다. 싸우다 지치면 영산강으로 가
얼굴 씻으며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울음에 갈대들이 부드러이 부드러이
흔들리면서 화답해주고 달과 별도
얼굴을 쓸어주고 가슴과 엉덩이도 쓸어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어머니는 노상 우리에게
우리의 맹세라도 하듯 들려주었다.
그런 어머니도 이제 가고, 그녀가 걷던
어둠의 강을 나는 걸으며 본다.
천년을 흘러도 흐름으로 있을 강을 보면서,
어머니여, 당신도 물빛 풀이나 돌멩이나
깨진 항아리, 풍뎅이 같은 것으로 언제까지
남아 있으시렵니까. 오늘은 저와 같이
강을 끼고 강을 보면서 길을 걷지 않으시렵니까
□ 2
어머니가 장사가신 날은 키 작은
누이가 집안 살림을 했다 누이는
질그릇처럼 웅크리고, 쌀겨를 아궁이에
넣고, 풀무를 돌리고 숨을 죽였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누이의 침묵
들으며, 참을 수 없을 적엔 부엌문을
박차고 나갔다 항아리엔 가득가득
어둠이 차고, 독(毒)이 차고,
식구들은 독(毒) 마시며 감정
죽이고, 떨고 있었다
□ 3
그해도 다 간 날 놀라운 일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장삿길에서 돌아온 지 서너덧 날 뒤 눈에 불을 쓰고 웬 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문을 차고 들이닥쳤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는 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우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습니다 서방 내노랑께 서방 내노랑께 소리소리 지르던 여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직사 광선처럼 선명합니다 그로부터 우리집은 안방 부엌 마루 마당 할것없이 냉전이 벌어졌습니다 한편은 어머니였고 한편은 누이였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누이는 완강해서, 나는 누이를 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냉전은 겨울 내내 혹한처럼 계속되다가 봄과 함께 풀렸으나 예전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막내를 싸고돌았고 누이는 밖으로 나돌았습니다 그런지 몇 해째 누이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집을 떠났습니다 어둠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 5
적의와 연민으로 꽉찬 길을 오늘 나는 절뚝이며 갑니다
어머니가 내동댕이친 길을 갑니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일어나 갑니다
아아, 내 어머니! 어둠 속에 내가 있으면
모습을 보이는, 그리고 하던 일 멈추고
하나도 이상스럽지 않게,
사랑이 많이 남은 가슴으로
껴안아주는, 당신은
부서져도 부서져도
고통의 파편으로 살아, 고통의
웃음짓습니다 고통의 별바다 같습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겨울의 말 최하림
겨울의 말&
□ 1 눈의 그림자
조용히 맞아들여야지 숨소리 하나 없이 겨울이 가슴을 여미고 서울의 뒷산 도봉(道峯)에 내려 나에게 내 아내에게 물끄럼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겨울이 더러운 그리움을 쓸고 남루를 쓸고 검정 연탄과 구정물까지도 쓸고 살인과 방화까지도 모두 다 쓸어 버리고 속죄양인 양하고 있을 때
나는 맞아들여야지
문을 열고 마음으로 마음의 심연으로
달빛이 황홀한 바다를 건너서 그들이 오고가게 해야지
이삼 일 후면 헐리게 될 판자집 문을 지나
세상 모든 길을 떠나 세한을 걸어가게 해야지
□ 2 첫눈 내리는 아침
춥고 추운 세상, 지리산이라든가 설악산 우리나라 서울
가로수 많은 거리에서는 바람이 신명을 다해 달리고
떡갈나무 빛 피를 흘리며 새들이 가고 있다
남으로 북으로 또 다른 곳으로
11월 아침, 마당에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골목길에도 눈이 덮였다.
어떤 부정의 발자국도 나지 않았다
병아리같이 보드란 아이를 안고 아내가
커튼을 걷고 유리창 너머로 눈을 보고 있다
추운 날이에요 옷을 튼튼히 입고 가셔야겠어요
라고 하면서 그의 세계를 쓸쓸한 눈으로 보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겨울의 빛 1 최하림
겨울의 빛 1
일월달 내내 폭설이 내렸다는 중부 지방에서는 30층 건물이 꽁꽁 얼어 동장군이 되었는가 하면 소리도 빛도 사람도 얼어붙어 아침과 저녁으로 이상한 빛을 발했습니다. 하얀 아이나 그의 어머니가 걸어감직한 빛이었습니다. 꿈결 같은 빛이었습니다. 외국 손님 한 분이 그 빛을 받고 어제 아침 우리나라에 와, 우리들은 연변으로 나가 환영했습니다. 개들도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때마침 함박눈이 만국기처럼 펄펄 내려, 손님은 함빡 함빡 웃음을 웃고, 웃음만큼 쓸쓸하기도 했던 우리들은 그날밤 술을 마시고 서벌을 걸었습니다. 걸어가다가 돌아왔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겨울의 빛 2 최하림
겨울의 빛 2
지난 겨울, 남행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마침 창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의자에 앉은 아이들이 좋아라 눈길을 밖으로 보내고, 외국인 부부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씨부렁거리고, 눈을 평범하게 볼 줄 아는 시골 아낙 서너 명도 그네다운 눈짓으로 유난히 아름다운 눈이란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열차에 소나 말이 타고 있었더라도 소나 말도 두 발을 들고, 소리질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열차는 기쁨의 열차인 것 같았다. 기쁨이 눈처럼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겨울의 사랑 최하림
겨울의 사랑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行商)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여
어쩌다 우리는 괴로운 무리로 이땅에 태어나게 되었나
어쩌다 또다시 칼날 앞에 머리를 내밀고
벌거벗은 여인이 사랑을 말하려고 할 때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사랑이 그들의 머리칼을 창대같이 꼿꼿하게 하고
불더미 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생으로 단련하는 것같이
단단하고 매몰차게 세상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아 바람의 시인이여 이제야 우리는 알겠다
그들의 골수 깊은 원한이 사랑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쇠붙이는 불길 속에서 단련되어진다는 것을
바람은 그것을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의 견고한 사랑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기차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가고 최하림
기차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가고
고속도로 좌단. 위쪽으로 옛 친구가 살던 고막원(古幕院) 역사(驛舍)가 있고, 역사(驛舍)뒤로 마른풀이 소리소리 바람에 몸 맡긴 언덕이 있고, 길 옆으로 흰 페인트로 기사님을 제왕으로 모시는 기사식당 있음. 기사들이 설렁탕에 깍두기를 아작아작 씹을 때 기차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가고. 기사들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차를 몰고 굽이길을 돌 때 기차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숨바꼭질하듯 오가고, 사라지고 나타남. 구름 흐르고 도깨비바늘 위로 이슬비 내림. 며칠째 나는 길 위에 있음. 방향을 잡을 수 없음.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숲들은 허리를 구부린 채 여위어가고. 북쪽 벌판에서는 사슴과 늑대들이 먹을 것 없는 날이면 수만 리 눈 속을 걸어감. 이 겨울, 사슴과 늑대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새들은 어쨌는지. 그리고 간간이 드나드는 가난한 사람의 지붕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나는 선맛 느낀다 최하림
나는 선(禪)맛 느낀다
후두둑, 후두둑,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가지각색 나뭇잎들이여!
나뭇잎의 비유여!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너희들은 광주리를 들고 떼몰려온다
아이들을 데불고 오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이는 장대를 들고
마음의 안정이 떨어지도록
사정없이 가지를 난타한다
후두둑 후두둑 이파리들이 비 오듯 한다
형형색색으로 얼룩진 땅에서
이파리는 떨어지는 대로 쌓이고
이파리는 눈비에 부스러지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더욱 세차게 우듬지를 흔들어라!
수동적인 땅의 수동적인 기다림 속으로
들어가거라! 그곳에는 밤의 가슴이 푸들푸들
떨고, 다람쥐 딱따구리가 새의 날갯짓보다
가벼운 발자국을 남기며 잡목 새로 사라져갈
것이다 아직도 색소가 많이 남은 잎들이
연둣빛으로 빛나고, 이끼가 숨소리 죽이고,
바람과 눈비도 무엇인가를
소곤거리며,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말할 것이다
이 긍정적인 소리들은 이대토록 내가 모르던 것!
계곡에서 저녁 안개 올라온다
나무들 짐승들이 모습을 숨긴다
들어가거라! 산속 고요 속으로
풋풋한 흙의 향기 나무 향기
존재하는 것들의 겨울 꿈꾸기
나는 산속에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한다 순간
나는 놀란다
나는 선(禪)맛 느낀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날마다 산길 1 최하림
날마다 산길 1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뭉개구름 같은 숲속으로요
햇볕이 강한 날인데도
빛방울 하나 들어오지 못하고
나무들이 숨막히게 들어 차,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나더군요 처음에는
왼발이 아아아아 소리지르고 뒤이어
바른발도 조금 낮게 아아아아 하고……
나는 그것이 감각적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얼마나 캄캄했던지,
나무들이 굉장한 속도로 자라고, 바위가 여기저기 돌출하고
나중에는 계곡의 후미까지도 바람처럼 트이어,
나는 이제, 어떤 나무 아래 있는지
밤 지나 마을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밤으로 흘러가는지
그대는 어째서 입구에서 우는지
너무나도 아프고 아픈 기억들
이 바위틈새도
약초꽃 피었네
가다가, 가다가,
보라고 피었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날마다 산길 2 최하림
날마다 산길 2
도선사 길을 오른다
큰바위 아래 가쁜 숨쉬고
암자 곁 샘에서 물 한 모금 먹고
눈 마주쳐도 얼굴색 바꾸지 않는
비구니를 뒤에 두고 지상에 그림자 하나
떨어뜨리는 일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적멸보궁이 어디죠? 물으니
눈으로 대답한다 어두운 눈빛!
신발을 벗고 보궁으로 들어가,
남무아미타불을 곡조를 넣어서
읊조리는, 나는, 일어서고 허리굽히는
불자들을 넋도 없이 본다
내려오는 길북한산 바위들이 꽃처럼
피고 냇물 소리 깊은 곳에서
어떤 사내가 어두워 소리지른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날마다 산길 3 최하림
날마다 산길 3
꼭지에 바람을 거느리고 손이 많은
나무들이 고개를 구름쪽으로,
그러나, 구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간다
아픈 다리 끌고, 나는 심호흡한다
시간이 물들어 어느새 단풍나무 잎들이
떨어지고 양치식물들이 바위 곁에서, 바위 감으며,
바위들이 어깨서 꽃이 되는지, 입을 다문다
나는 바위들과 함께 땅에 뿌리내리고, 집 짓고
조금씩 눈물 흘리고 조금씩 웃음지으며,
주기도문 외운다 절망하는 일이 결코 없다,
이 숲속에서, 나는, 침묵을 배운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날마다 산길 4 최하림
날마다 산길 4
그렇게도 단단한 가슴을 빠개고
터져나오는 도봉산 골짜기 자갈꽃!
오늘은 따갑게, 가을 물살에 추파 띠우네
등산객 서너 명 야호야호 소리지르며 깔끄막 오르고
응근하게 바람이 얼굴 흔드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처럼 깊이, 산이 숨쉬는 소리
나무 위로 구름 흐르는 소리
햇빛 소리, 냇물 소리, 소음 소리
천상의 것들은 올라가고
지상의 것들은 내려가
그늘 깊은 땅으로 스미네
쓰라린 길 위에서 나는 걷네
바퀴가 마차를 빠져나가고
밤을 새고 어느새 숲은,
찰랑찰랑 어둠 넘치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내 시는 시의 그림자뿐이네 최하림
내 시(詩)는 시의 그림자뿐이네
시(詩)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달밤의 어릿광대 최하림
달밤의 어릿광대
여름 뜰에서 다알리아가 되어
검붉은 꽃잎이 어둠으로 퍼지며
진한 설움을 동서로 남북으로 전할 적에
나는 무엇을 집착하고 있느냐
원고료 일만원의 의미밖에 없는, 그래서
마누라에게 핀잔이나 받는 시(詩)이냐! 시(詩)이냐!
여름밤의 벌레들이 제 설움에 시달려
울어대는 작은 마당에서
나의 설움을 우는 나는 독백(獨白)의 광대냐
멀리 남도에서 올라와 보아 주는 이 없는
춤을 추고 있는 달밤의 어릿광대냐
어릿광대의 시이냐.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담쟁이덩굴 최하림
담쟁이덩굴
문예진흥원 뒤에 있는 토탈디자인의
벽을 감아올라간 담쟁이덩굴이 비바람 맞아
참을 수 없는 충격으로 설레던 날은
한 도시에서 다른 모양으로 사는
너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
그러나 나는 너를 생각하기 전 어두운
동요들이 일어나는 잎들의 돌연함에 놀라
떨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잎들의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깜짝깜짝 깨어나는,
전율도 있을 것이다 담쟁이 덩굴에서
비바람 소리 들린다 우리가 우리 그림자
뒤돌아볼 때 우리 시선이 머문 그곳으로
불길한 시간이 흔적 없이 지나간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떠난 자를 위하여 최하림
떠난 자를 위하여
오늘도 먼 데서 밤은 함뿍 내리고
바람마다에 우거진 숲이 부우연 머리를 흔드는데
손 하나 허공에 뻗을 수 없이 적막이 내린다
내리는 적막 속에서 여인들이 소리없이 와
떠난 자를 그리는 슬픔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물 위에 밀리는 달빛을 보고 서 있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마음의 그림자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하염없이 먼 길을 걸어왔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서 있었고 여린 가지들이
부러질 듯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덕배기도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기
전의 원갑희(元甲喜)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섭섭치
않았다 옛날의 눈물이 무지개로 기일게
서산(西山)에 떠올랐다 시(詩)
라고들 그랬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말하기 전에, 나는 최하림
말하기 전에, 나는
여느 때와 다르게
공기가 부풀어 오르고
담장이 유리빛으로 빛나고
들녘의 잡초들이 바람에 날렸다
어떤 관목숲으로도 서 있지 못하는
새들이 하늘과 물 속으로 갈앉았다
지상엔 지나간 시간의 상처뿐
십일월의 그림자들이 다도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잎 푸른 가지 속으로 들어가
내가 시름을 나눌 수 있는 의자와 책들 사물들
아직도 불켜 있는 스탠드와 불안하기는 하지만
서쪽으로 열려진 창문들
바람은 언제나 나직이 흘러갔지
풀숲들이 나직이 속삭였지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
네 속에서 편안히 잠을
그러나 잠은 꿈일 뿐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멀리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나무와 돌 사이
언덕과 구렁 사이 죄와 벌이 서성거리고
나는 잘려진 도마뱀처럼, 시간들을 진행형으로
떠올리지 못하고 토막토막, 나누어 이해했다
엉클어진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
유리창을 깨트리고, 오오, 말하기 전에, 나는,
이대토록 상처투성인지 몰랐다
나는 말에게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말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나무들을 비추고 이파리들을 비추었다
어떤 확신의 말도 나는 할 수 없다
파충류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 들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모카 커피를 마시며 최하림
모카 커피를 마시며
이마 넓은 가을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둥글어진다 거년에
입다 둔 무명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보이지 않게 먼지들이
국화문 벽지에 쌓인다
아내가 모카 커피를
타 가지고 오는 소리 들린다
모카 향내는 색다르다 아내는
향내를 조금 쓰게 타올 때도 있고
조금 달게 타올 때도 있다
내 기분에 알맞게는 하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아니므로 그렇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산다 우리의 개성인 모서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
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
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게
감정이 고인다 감정이 가을잎 같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은 쓰다
아내는 사과를 쟁반에 받쳐들고 올 때도 있다
홍옥이 가을에는 향기롭다
나는 부사가 좋을 때도 있고 배가 좋을
때도 있으련만 말을 않고
홍옥을 먹는다 홍옥 냄새가
입 안을 감돌고 붉은 빛은 혀를
감칠나게 한다 향내는 감정이 된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방문 최하림
방문
로버트 프로스트씨(氏)의 편지를 받고 그분의 목장에 갔었지요 그분이 손수 담장을 쌓고 가지치기를 한 목장에를요 오래 전부터 그분은 제게 목장에 꼭 한번 들러달라고 초대를 했댔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요 지난 연대에는 갈 엄두도 못 냈구요 왜냐구요? 아무리 그가 전원의 시인이라지만 미국인 아닙니까? 반미(反美)가 들끓던 시절에 그를 찾기란 누가 뭐래도 꺼림칙한 일이거든요 그래, 이래저래 미루다 지난 여름 사과꽃이 한창 필 무렵 목장에 갔었지요 마침 그분은 쇠사닥다리를 타고 가지들 속으로 들어가 일하고 있더군요 아직 한 개의 사과도 열리지 않았지만 가지들은 가득 사과를 매달고 있기라도 하듯 추욱 늘어지고 향기는 들녘으로 퍼져서 벌들이 윙윙거리고 즐거움 같은 평화가 곳곳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씨가 그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지 기억에 없습니다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던지 꽃들을 쓰다듬고 있었던지 아니면 자연이라는 대명상 속으로 들어가 있었던지…… 농사를 지어봤지만 과수 경험이 없어서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목장에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폐가 될지도 몰라서였습니다 목장을 나설 때 그분은 긴 팔로 나를 껴안고 등을 두들겼습니다 오던 길을 돌아 신작로로 나올 때까지 그분의 손길이 무겁게 등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만남이란 기적은 아니지만 흐뭇한 일인 듯했습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밭고랑 옥수수 최하림
밭고랑 옥수수
내 눈이 너를 보고
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
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
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
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
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
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째 이슬을 털고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
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을 본다
우리도 어느 날, 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
볼 것이다 긴 낫 들고, 긴 낫 내리며
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내는 모습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백설부 1 최하림
백설부(白雪賦) 1
몇 번씩이나 철이 바뀌고 잔설(殘雪)이 들을 덮어도
달라지는 것 없는 산이여
올해도 대관령(大關嶺)에서는 산사람들이
겨울을 맞아들이면서 자작나무 불을 피우고
얼어 꺾어지는 가지와 가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하늘에는 별이, 별에는 눈이, 눈에는 산사람들의
꿈이 결빙하여 얼어터지는 소리
그 소리 위로 내리는 밤눈 소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다
제 나름의 소리를 하고
소리들이 모여들어 산을 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사리(事理)를 만든다
언제나 가난하게 하고
언제나 산에서 살게 하는
사리(事理) 어리석은 사리(事理)
□
이런 밤엔 새로운 기억과 말을 가지고
평원(平原)으로 가 밤눈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표정에 새겨지던 고난의 희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밤엔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내와 옥중 죄수들
그들의 경험 속에 내포된 벽지의 술집여자 눈먼 아이
그들의 눈과 발 그들의 아픔
그밖에도 그들의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들에게서 사랑으로 화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랑의 밤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한다
사랑이란 있으면서 없는 것
짐승과 인적이 지나도 하얗게 설원(雪原)은 열려 있는 것
□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눈이 내리고
민가(民家)의 불빛 따뜻한 모습으로 길을 비춰주는데
끝없구나 살아서 걸어가는 길
학대받고 걸어가는 길
친구도 이웃도 형제도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어
유랑의 무리로 밀어내어
홀로 걸어가게 하는 길
이다지도 자욱한 눈 속을
걸어가게 하는 길
어느 강가에서 어느 벌판에서
우리들의 유랑은 끝날 것인가
눈뜨지 못하는 넋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들어
어느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폭설이 되어
가지도 지붕도 없이 넘어뜨릴 것인가
걸어가거라 진승(陳勝)의 넋이여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베드로 2 최하림
베드로 2&
빌로드같이 검은 밤을 빠져나와 새벽 기슭에 이른 것은
나도 알 수 없는 격정 속에서였다
공기가 사납게 출렁거리고
길이란 길들은 다들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걸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
어떤 사물은 그리움이고
어떤 사물은 사랑이지 않았으며
뉴스같이 맥빠진 언덕과 마루를 올라도
먼 산을 보아도
머잖아 내릴 눈처럼
설레지 않았다
서천군 서천면 서천리
그 이상한 집 뜨락에서
모든 것들은 죽음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베드로 3 최하림
베드로 3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친숙한
중량천으로 화물차량이 덜커덩 덜커덩 가고
천막이 흔들린다 카키색 잠바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천막을 밀고 나와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목운동을 하고
아직도 십자가가 빛나는 교회 층계에 주저앉는다
손바닥만한 마당의 사루비아가 불탄다 잠바는
보는 둥 마는 둥 꽃밭에 침을 칙칙 뱉고 팔팔을
입에 물고 바지를 털고 일어선다 천천히 전망
좋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압구정동으로 갈까 이태원으로
갈까 다시 침을 뱉고 하늘을 보고
휘파람 불며 언덕으로 내려간다 천막 문을 열고
빨간 스웨터가 잠바를 본다 잡초가 때마침 바람에 사납게 날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병후에 최하림
병후(病後)에&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마비를 비집고
무지개가 기일게 남쪽에 섰다
종합청사가 들어선
과천에서 압구정동 쪽으로,
걷기 어려운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걸음 한걸음 이동하면서, 나는
산길에서 무지개의 일곱색을 본다
프리즘이 없어도 색색으로 하늘을 빛내는
빗방울이 황홀해, 비 머금은 나무들이
야릇하게 반응하고 공기를 탐하는
후각이 나무들을 기억하려고 흥흥거린다
나는 오늘 후각을 여기 두고 싶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부랑자의 노래 1 최하림
부랑자(浮浪者)의 노래 1
헤매는 자들아 헤매는 자들아
이제는 그만 마을로 돌아가
어린 날의 보리들을 보아라
서릿발같이 차거운 밤의
보리들을 보아라
이제는 그만 날리는 머리 풀어헤치고
밤이면 밤마다 시푸렇게 빛나는
네 하늘과 네 땅의
보리들을 보아라
보리들은 지천으로 자라서
사방을 가리언만 그대 눈엔
아무 보리 보이지 않고
산과 하늘에 넘쳐흐르는
보리밖에 보지 못하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불빛을 그리워한다 최하림
불빛을 그리워한다
바다가 우는 여드렛날이면
바람이 세어지고 여자들이 피 흘리고
봉오리마다에 이슬이 서려, 강안도
대처도 어둠에 잠겨 불빛을
그리워한다 땅끝 멀리 있는
불을 바라보며 불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이
싸늘한 외로움이여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비가 최하림
비가(悲歌)&
저마다의 말로서 내리는
눈을 따라서
들리지 않는 눈의 말씀을
따라서 걸어가네
그대 곁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무것도 말할 것 없네 잠자리도 없네
떠도는 사람의 발길이 더듬은
멀고 먼 골짜기
형제들이 죽어서
눈에 덮였네
눈에
덮였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빈약한 올페의 회상 최하림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정신(精神)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여진 날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퇴각하는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아아 무슨 근거(根據)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
기계(機械)가 의식의 잠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항구(港口)여
내부(內部)에 쌓인 슬픔을 수없이 작별하며 흘러가는 나여
이 운무(雲霧) 속, 찢겨진 시신(屍身)들이 걸린 침묵 아래서 나뭇잎처럼
토해 놓은 우리들은 오랜 붕괴의 부두를 내려가고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우리들의 소유인 이와 같은 것들이 육체(肉體)의 격렬한 통로(通路)를 지나서
불명(不明)의 아래아래로 퍼져 버리고
울부짖음처럼 눈발이 날리는 벌판의
차가운 가지 새에서
헤매임의 어휘에 걸려 나나히
무거운 팔을 흔들고
나의 가을을 잠재우라 흔적의 호수(湖水)여
지금은 물속의 봄, 가라앉은 고향의
말라들어가는 응시에서 핀
보라빛 꽃을 본다
나무가 물속처럼 커오르고
푸르디푸른 벽에 감금한 꽃잎은 져내려
분홍빛 몸을 감싸고
직모물의 무늬같이 부동(不動)으로 흐르는
기나긴 철주(鐵柱)를 빠져나와 우리들은 모두 떠오른다
여인숙(旅人宿)에서처럼 낯설게 임종한, 그 다음에 물이 흐르는 육체(肉體)여
아득히 다가와 주고 받으며 멀어져가는 비극의 시간은
서산(西山)에 희고 긴 비단을 입고 오고 있다
아주 장대하고 단순한 바다 위애서
아아 유리디체여!
(유리디체여 달빛이 흐르는 철판 위
인간(人間)의 땀이 어룽져 있는 건물 밖에는
달이 떠 있고 달빛이 기어들어와
파도소리를 내는 철판 위
빛낡은 감탄사를 손에 들고 어두운
얼굴의 목이 달을 보면서 서 있다)
□
푸르디푸른 현(絃)을 율법(律法)의 칼날 위에 세우라
소리들이 떨어지면서 빠져나가는 매혹하는 음절로 칠지라도
너는 멀리 고향(故鄕)을 떠나서 긴 팔굽만을 슬퍼하라
들어가라 들어가라 계량하지 못하는 조직 속
밑푸른 심연 끝에 사건이 매달리고
붉은 황혼이 다가오면 우리들의 결구(結句)도 내려지리라
□
아무런 이유도 놓여 있지 않은 공허(空虛) 속으로
어느 날 아이들이 쌓아올린 언어
휘엉휘엉한 철교에서는 달빛이 상처를 만들며 쏟아지고
때없이 달빛이 걸린 거기
나는 내 정체(正體)의 지혜(知慧)를 흔든다.
들어가라 들어가라 하체(下體)를 나부끼며
해안(海岸)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닷속으로
막막한 강안(江岸)을 흘러와 쌓인 사아(死兒)의 장소(場所). 몇 겹의 죽음.
장마철마다 떠내려온, 노래를 잃어버린 신(神)들의 항구(港口)를 지나서.
유리를 통과한 투명한 표류물(漂流物) 앞에서 교미기(交尾期)의 어류(魚類)들이 듣는 파도소리
익사한 아이들의 꿈
기계가 창으로 모든 노래를 유괴해간 지금은 무엇이 남아 눈을 뜰까
……하체(下體)를 나부끼며 해안(海岸)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다 속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산 최하림
산&
바람으로 천둥으로 또 설움으로 가야지
우리 뒤에 있고 지금은 앞에 있는 저 산
붉고 푸른 산
옥수수잎이 하늘을 울리는 밭머리
몇날며칠을 두고 소란스러운 마을을
지나서, 썩어문드러진 천둥이
한꺼번에 쩌르릉쩌르릉 천지를
울리며 가슴을 찌르는 밤이 오기 전에
산 너머 구름 너머 그림자보다 빠르고
쓸쓸하게 가야지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새 최하림
새&
어떤 빛에도 드러나지 않고
어떤 놀에도 몸 붉어지지 않고
오로지 제 어둠으로 가는구나
멀리멀리 그리운 불 밝혀두고
풀잎들이 한덩이로 뭉쳐 사운거리는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서, 겨울새들이여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기다리는 사람들
어둔 벌을 가고 있으니
나직이 새들이 바람을 치며 나르고 있으니.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서 있는 사람 최하림
서 있는 사람
모든 구름이 달리고 달려서
가로수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오늘밤에는 어디로인지 난리처럼 가는데
아직도 너는 붉은 등 아래 서 있구나
통금이 다가온 거리 빈 거리
어둠이 자라 꽃이 되고
더러운 잠자리로 사내들이 들어가고
계집들이 천한 꿈에 시달리는데 아아 깊은
바다의 등불 아래 시름을 두고
아직도 너는 하늘을 우러르나
어느 한자락 구름이 네 맘을 담지 못하누나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설야 최하림
설야(雪夜)&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너갔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슴에 불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 디뎠을까
슬퍼라 어둔 지방의 인내를 버리고
사나이들은 사랑을 찾아 고단한 육신으로 산과 내를 건너가는데
밤 물길을 끌고 지친 화적패처럼 건너가는데
음산한 지방을 새하얗게 물들이면서
때묻은 말을 버리고 내리는 눈 눈 눈
눈이여 오만 가지 죄의 모습과 인욕을 씻고
가는 이의 사랑을 따라나서는 길을 마련하라
구석구석이 허사로 가득한 밤
우리들은 허사에서 배어나오는 암흑을 보며
암흑 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는다.
울부짖음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암흑이 되어 돌아온다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 넣는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소리꾼 최하림
소리꾼
저 강과 바다를, 산맥(山脈)을
햇볕이 쨍쨍한 들판을
선무당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다
삼백예순날 처처를 돌면서
맺힌 한을 서편(西便)에 실어서,
찢고 찢어 배앝으는 붉은 피로,
너의 마음을 부른다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노래가 임당수 물을 가르고
저승의 강바람에 밀리고
밀리다 스러질지라도
북소리 고르게 높여라
우리는 센 물살을 거슬러
천년이고 백년이고
흘러가야 한다
저 들판의 붉은 노을과
갑오년(甲午年)에도 들녘에 고웁게 핀 진달래
우리 마음의 이 울한과 나라도 없는
계집들의 음심을, 자식도
부모도 버리고 도망간
비오는 골목의 네 계집처럼,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시 최하림
시(詩)&
비 내리는 날은 모두가 허깨비 허깨비
그녀가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서양 여자들처럼 도전적인 걸음으로 다가와도 비 내리는 날은 이미 모두가 비이고 죽음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멀리 멀리에서 아우성치며 손을 내밀어도 시간들은 이미 죽음이고 추억일 뿐이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세계여 나는 이제 네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구겨지고 짓이겨지고 뒤죽박죽되어 시간 속에서 시간꽃이 된다
세계여 나의 시는 이제 비 맞은 나무 비 맞은 새 비 맞은 들녘
이런 시를 쓰면서 제법 나는 시인인 체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엿먹어라, 지금은, 가을, 대지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심연으로 최하림
심연으로
참을 수 없이 환한 목소리로
깔깔거리고 줄달음치고 바자울을
넘나들면서 쿡쿡 소매를 잡아당긴다
소유할 수도 없고
불태울 수도 없는
내가 아닌 것들이
저렇듯 불처럼 빛난다
물 속에서 빛난다
무지개처럼 빛난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에서 우리는 논다
말괄량이처럼 춤추며 물구나무서며, 우리가
사랑했던 아이가 우리를 힘껏 민다
안 돼! 안 돼! 안 돼!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말한다
처음의 그대가 꿈꾸었던
무지개 같은 말로, 나중엔
검은 재의 말로
그러나 말들은 심연으로 심연으로
돌처럼 갈앉는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어느 뫼를 걸어도 좋으리 최하림
어느 뫼를 걸어도 좋으리
슬픔이 얼비친 바다도 골목도 버리고
흙으로 돌아간 어메여 여름 물소리
흐르는 언덕에 누워 이제는 하늘을
보아도 좋으리 구름을 보아도 좋으리
갯비린내 자욱한 해안통을 돌아가는 그대
발자국마다 출렁거리던 파도 소리
들으며 우리가 돌아갈 길목에서
어떤 새 울음이나 풀바람으로
멍울진 가슴을 풀어 버리고
햇빛이 넘치는 어느 뫼를 걸어도
그 뫼의 그림자로 내려도 좋으리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어둠의 노래 최하림
어둠의 노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둠이 된 자
어둠의 빛이 된 자여
한 하루도 한 생명도
새빨갛게 타올라 밤이 되면
어둠으로 돌아가
어둠의 부피를 늘리느니
섬진강이나 영산강 가에서
또 금강 벌판에서
마을을 돌아보며
외쳐 부르던
영원의 길을 간 자
그 뒤를 따르고 따르던 자
아아 우리들의 어둠은 끝없고 끝이 없어라
하늘의 기러기도 대숲의 바람도
소리 밖에 아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한 마음으로 함께 울부짖어도
암흑은 꿈쩍 않고 더욱 차올라
암흑을 밀어내어라
아아 암흑 속으로 들어가
이제는 암흑이 된 자
암흑의 빛이 된 자여
한 하루도 한 생명도
새빨갛게 타올라 밤이 되면
암흑 속으로 돌아가
암흑의 부피를 늘리느니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어머니 강물 최하림
어머니 강물
불볕의 모래 속으로 붉은 해 잠기고
가마우지 같은 새들이 날아가는 저녁이면
얼마쯤의 안식이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심신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고통, 고통,
본래 모습으로 어머니 강물이 흘러갔다
무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검은 강물이
언덕과 마을을 스쳐
깊은 침묵으로
침묵으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어머니 곁에 누우면 최하림
어머니 곁에 누우면
걸어갈거나, 오늘도 나는 걸어갈거나.
음산(陰散)한 바람은 버릇같이 나를 달래고
어느 한 곳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러기떼처럼 하늘을 흔들며 가고
온종일 지저귀다가 보는 저녁 햇빛을 받은
떨어진 잎새의 흔적(痕迹)들
참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이렇게 피곤할 때면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 누우리 그의 곁에 누우면 물소리 흐르는 나무들이며 이파리들이며 그리도 조용한 삼라만상이 내 생전 처음 내게 와서 소근대고,
나는 얼굴을 숙이고
나를 팔아먹은 여자 생각도 않고
부끄러운 신부(新婦)처럼 귀를 모으고,
흥건히 어깨 적시는 비여……
공중에서 내리는 비여……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영동 최하림
영동(嶺東)
□ 1
열 두 산을 너머 기차가 달리는 산골에는
눈이 많어, 사람들은 쿨룩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아세티린 불빛이 가물거리는
갱도를 지나서, 검은 석탄을 지나서,
새들이 하늘에 매달리듯
띠엄띠엄 선 가로수들이
기슭에 매달리듯,
헬맷을 쓴 십장이
소리지르고 굴착기가 울고
흐르는 달같이, 내리치는
곡괭이와 함께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적(敵)처럼 외로운 시대여, 내리쳐라 어둠이
무너져 별이 보일 때까지, 별의 정수리가
부서져 보석이 될 때까지
오늘밤에도 칼에 닫는 아이의 여린 살이 마취를 지나서
울부짖으며 떠오르고 꿈틀거리는
여인의 하체가 떠오르고
빛이 내리는 지하(地下) 일천 피트
어둠도 증오도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일어서지 못한다
□ 2
삶이 개만도 못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빠져나와
아침, 북항(北港)을 지나가면 눈이 큰 수영(洙暎)을
닮은 사내가 북어를 메고 눈 속을 간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열지어 서 있고
어디메선지 굶주린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일이 일어나겠구나
은신할 곳도, 자작나무숲도 베허지고
멀리 저녁 종소리도 들리지 않겠구나
아아, 또 몸서리를, 쳐야겠구나.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 최하림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
새 한 마리, 잿빛으로 날아가 넋을 달래는 무량군 무량면 무량리
겨울 어둠이 내리면 나무도 짐승도 말이 없고 울타리만이 공중 높이 떠올라 울어댄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이여 그 나라에서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가. 그 나라에서는 눈을 맞으며 눈 속을 사람들이 걸어가는가
일천 미터, 이천 미터, 삼천 미터, 무량산 상상봉까지 올라가면 겨울나무들이 아직도 세차게 몸을 흔들고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이 비렁뱅이 모습으로 사라져간다. 눈송이가 후두둑 후두둑, 정수리를 차갑게 친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우리나라 1975년 최하림
우리나라 1975년(年)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앙상한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가로수 밑둥을 물어뜯어도
가로수들은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이 발길 그리고 저 돌멩이 돌멩잇길
서남해의 대숲마을이나 마늘냄새
매캐한 중강진의 살얼음 속에서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여윈 손목을 끌어 잡을 줄 모르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로 말하고
끌어잡지 못하나 그 손으로 일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함께 사네
아아 비바람에 씻긴 바윗돌 같은 얼굴
모진 불행을 다 삼키고도 표정없는 얼굴
그러한 얼굴로 서 있는 시대여
네 완강한 몸뚱이를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물어뜯고 뜯어도 시대는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우리는 손잡고, 기다리고 있었네 최하림
우리는 손잡고, 기다리고 있었네
집과 무덤 사이
나는 살고, 숨쉬고,
꿈처럼 본다, 하늘에서
요란스레 꽃들이 피고,
피가 흐르고, 천사들이 나팔 불고,
진압군이 몰려온다, 거리가 구부러지고
무너지면서, 심장이 터질 듯한 나는,
얼마나 손잡고, 웃고 있는가, 땀 흘리고
있는가, 고요히, 플라타너스 푸른 이파리 새로
몰려오는, 이것은 플라타너스, 이것은 최루탄,
이것은 민주주의, 이것은 방패, 하면서,
일렁이는 햇빛의 파도 속에서
흐르는 육체의 신선함으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우리들은 무엇인가 최하림
우리들은 무엇인가
칼날의 댓닢이 밤에도 자지 않고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달빛의
신경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여기저기 떼몰려 가고 있는 아우성을
들으며 유배의 꿈을 부르는 우리들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무서운 칼날이고
무서운 칼날이고 무서운 칼날이 아닌가
밤의 히어로같이 한걸음 한걸음
가슴과 목덜미 눈과 입술가로
부정의 손을 쓰면서
무서운 칼이여
잠든 지방을 흔들어라
번쩍이는 날로 사방을 베어라
우리나라의 대밭에는 말 못할 소리가 내려 있고
부정의 울부짖음이 있고
우리들은 우리의 무뢰배처럼
억새풀 속에서 억새가 자라나고
주민들 속에서 주민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있다
뒤숭숭한 잠결에도 그들이 떨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우리들은 오늘도 최하림
우리들은 오늘도
우리들은 희망이었고 우리들은 비명이었지
우리들은 전사였고 우리들은 사도였지
우리들은 피였고 우리들은 시체였지
우리들은 빛고을이었고 빛고을의 망월동이었고
우리들은 플라타너스였고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피어나는 금남로의 벽돌짝이었지
해 저물어 어둠을 찾아들 때, 바리케이트 너머로 하나, 둘 모여드는
피투성이 된 붉고붉은 입술들 입술들의 입맞춤 입맞춤의 환희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들의 꿈이 살아난
우리들은 한마당이었지 합창이었지……광주였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최하림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기억들은 행복하다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아침마다
눈부신 햇덩이로 솟아오르고,
이슬을 털고 바지런한 애인들이
길을 가고, 농부들이 간다
빛을 뿜어라 떵떵 울려라
더욱 높이 사랑의 새들이 오르고
푸른 풀잎에서 이슬이 떨어지고
애인들이 순간 걸음을 멈칫한다
그러면 들판의 그림자들이 감싸듯이
그들을 가린다 그러나 떨어질 것들은
결국 떨어지고 만다 애인들은 처음의
맹세를 거두고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어둠 잠긴 참혹한 많은 시간들이
그들을 할퀴고 간다
이제 나는 가야 한다
떨린 어깨를 두팔로 감싸며
내가 걸어온 길의 붉은 노을과
내장을 꺼내 놓은 것 같은 생생한
황토밭 고속도로 추운 나무들 마을들
나는 내 거울에 입술을 대고
내 손으로 나를 만져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저녁 창가에서
반쯤 문 열고 스웨터 입고
나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봐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았듯이 이제 나는
빛 속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유랑자들의 노래 최하림
유랑자(流浪者)들의 노래
우리나라의 길 위에서 자라고
그 길을 통하여 객지(客地)를 헤매는
유랑자(流浪者)들의 풀리지 않는 몸을
부드러운 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별인지 어둠인지 알 길 없는데
오늘도 검은 우리를 빠져나와
걸어가는 너의 비틀거리는 걸음
어느 누가 슬픔없이 살 수 있겠는가
어디에다 이 울한을 풀 수 있겠는가
일하고 술마시고 싸우다 쓰러져
사립을 밀고 새벽길로 나서면
나무에 바람에 걸려 울리는
밤바다가 밀어오는 소리
지친 사나이들의 발걸음 소리
길마다 어둠이 멀리 뻗치고
잡초들이 음산하게 흔들리는데
오늘도 걸어가야 할 너의 길은
몇 십리냐 몇 십리 걸어야 끝이 나느냐
무거운 발을 끌고 어둠 속을 가는
울한의 사람아 우리들의 사람아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이제 나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최하림
이제 나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새들이 모두 흘러갔나요 밤이 됐나요 아침이 됐나요 새들이 울고 있는 듯한데 아침 새들인가요 그들이 인사하러 왔나요 그래도 이제는 소용없습니다 내게 소중했던 시간들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저녁 그림자 최하림
저녁 그림자
여섯일곱살 때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열여섯살 때도 열입곱살 때도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반고비 넘은 어느 날에도 갈매기들은 유리창 밖의 어린 모과 나무 새에서 반투명체로 꽃들을 조으다가 마주 보다가 날개를 푸드득이다가 이윽고 먼 수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늙어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최하림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광산촌의 여인은 보고 있었다 물에 뜬 붉은 바다
날빛 새들이 날아오르고 물결에 별들이
씻겨져 제 모습으로 갈앉고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흔들리고 있었다
키작은 사내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일천 피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으나
가도가도 막막한 어둠뿐 모두 다 뜨내기와 갈보뿐
낡아빠진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어허와어허와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
불렀으나, 신참내기 전도사도 노래불렀으나 가슴의
멍울은 풀리지 않고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슬픔만 달빛이 내리는
나무 그늘이라든가 산등에서 아주 낮게
흘러내리고 어떤 적의도 없이 흘러내리고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새들 무리가 무의미하게 날아오르고
물결에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 위로
상수리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정방폭포 최하림
정방폭포
저녁마다 안개가
아랫도리를 가리는 서귀포(西歸浦)에서
정방폭포가 흰 몸뚱이째로
떨어지면서 말하더라
수치스럽다고 말하더라
수치스러워 못 살겠다고 말하더라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천길
벼랑에서 사지가 녹아드는 그리움으로
울부짖어도 별들은 보이지 않고
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밤마다 안개가 아랫도리를 감는
서귀포(西歸浦)에서 술을 마시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
너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
소리 들으며 동서남북(東西南北) 소리쳐도
들리는 것은 검은 수면(水面)에 일었다
사라지는 물포래뿐 물포래뿐……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즐거운 딸들 최하림
즐거운 딸들
즐거운 딸, 바람쟁이 딸들! 그들 땜에 우리집은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구름처럼 젖가슴이 벌어지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가지고 남자들을 라켓으로 바꿔치면서 그들은 신촌으로, 압구정동으로! 꿈에서도 남자들이 꽃다발 바치며 애달아해도 슬쩍슬쩍 눈 피하고 향기 피웠지 전화질했지 어려서부터 큰애는 바람쟁이여서, 숙제 끝나면 거울 앞으로 가, 땀 뻘뻘 흘리며 춤을 추었고, 둘째는 가끔씩 고장난 로보트춤을 추었지 아름다웠지 그들의 춤은 목적이 없고 관객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이 춤이고 즐거움이었으므로
꽃 같으고 나비 같은 처녀들이여! 춤추는 처녀들이여!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어른들이 불러도
돌아보지 말아라 춤추며 가거라
너희들, 있는 세상, 벼락처럼
장미 피고 향기 넘치노니
어느 날 애인에게 바람 맞고
자존심 상해할 때, 오매!
우리 딸 바람맞았네 놀릴지라도
기죽지 말아라 바람피워라
바람이 이 세상 생명이고 기쁨이니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천은사 길 최하림
천은사(泉隱寺) 길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물살이 흘러간다
우리가 생각할 새로운 물살이 흘러간다
우리가 꿈꾸고 반성할 물살, 우리가 해찰할
물살, 우리가 욕지거리를 퍼붓고, 우리가 저주할
물살이 흘러간다 물살은 살아서 흘러간다
어떤 때는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고
어떤 때는 화려하게 물보라를 뿌리고
어떤 때는 느릿느릿
저를 잊고 저를 생각하면서
머릿단같이 흘러
어깨 너머 가랑이 사이로
육감적으로 흘러간다
가을 되어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단풍잎이 물 속으로 얼비쳐들어가
물 속을 빨갛게 물들이고 씻어낸다
우리 마음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간다
우리가 간다 천만 가지 단풍잎이 비 오듯
떨어지는 가을 천은사(泉隱寺) 길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