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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하나 구하지 못한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
잘못될 여지가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되고 만다. 유명한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다. 어떤 군사작전이고 머피의 법칙은 작용하기 마련이며, 이런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철저히 계획하고 땀 흘려 훈련하며 긴장 속에서 작전을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전의 사상 최대 실패라고 불릴 만한 작전이 1980년 4월에 벌어지고 말았다.
1921년부터 팔레비 왕조(Pahlevi Dynasty)가 집권해왔던 이란은 모사데크(Mohammad Mosaddeq) 정권의 축출 이후 왕정이 더욱 강화되었고 노골적인 친미ㆍ친영 노선을 표방했다. 그중에서도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Muhammad Rizā Shah Pahlevi) 국왕은 ‘중동의 경찰’이란 이름 아래 미제 무기를 수입하면서 군비를 강화했다. 또한 팔레비 국왕은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으며, 그의 집권 이후 BP,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슬람전통을 무시한 친서구 정책에 반감을 가진 국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경비견’ 노릇을 자처하는 팔레비 왕조에 대한 불신감이 커져만 갔다.
이에 더하여 과시성 국책 사업과 군비 강화로 예산마저 고갈해버린 왕정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1978년 이슬람 혁명이 불붙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팔레비 국왕은 이듬해 1월 이란을 떠났고, 아야톨라(종교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이란으로 돌아오면서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쫓겨난 팔레비 국왕이 암 수술을 위해 미국에 입국하자 이란 혁명정부는 국왕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물론 미국 정부는 그 요구를 거절했고, 그 결과 1979년 11월 4일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과격파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란의 온건파 총리인 메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과 만나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도리어 역풍이 거세게 일면서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란의 강경파들은 이 사태를 친서방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재선을 앞둔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인질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이상 강제로 인질을 구출해오는 길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합참을 포함한 각 군 지휘부에서는 군사적 구출작전의 가능성을 검토했고, 11월 17일자로 구출부대의 발족을 명했다.
이에 따라 제일 먼저 구출부대의 목록에 오른 것은 제1특수전 D분견대(1st Special Forces Operational Detachment-Delta), ‘델타포스(Delta Force)’였다. 대테러 임무를 위해 1977년에 창설되어 능력을 갈고 닦던 육군의 특수임무대대, 델타포스에게 구출작전은 부대의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델타포스의 창설자이자 지휘관인 찰리 벡위드(Charles A. Beckwith) 대령은 자연스럽게 구출부대의 현장 지휘관이 되었다.
이런 델타를 지원하는 증원 병력으로는 미 육군의 레인저(Ranger) 특공연대가 동원되었다. 한편 MC/EC-130 수송기를 보유한 공군 특수전 비행대대와 전투통제반(CCT, Combat Control Team), 그리고 해군/해병대의 시 스탤리언(Sea Stallion) 비행대대도 구출임무부대에 합류했다. 이리하여 4군을 아우르는 합동기동부대(Joint Task Force) 1-79가 제임스 보트(James L. Vaught) 소장의 지휘하에 편성되었다.
인질을 구출할 부대의 핵심은 1977년 창설된 델타포스였다. 델타포스는 우리 육군의 특수임무대대처럼 대테러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다.
JTF 1-79이 처음 작전에 붙인 이름은 ‘라이스 보울 작전(Operation Rice Bowl)’ 이었다. 이후 ‘이글 크로우 작전(Operation Eagle’s Craw)’으로 재명명된 이 작전은 이틀 동안의 복잡한 임무로 구성되었다.
• 제1일 : 구출부대는 이란 영토 내에 제1집결지(암호명 ‘데저트 1’)를 구축하게 된다. 데저트 1에서 구출부대원들은 MC-130E 컴뱃 탈론(Combat Talon) 특수전 수송기로부터 니미츠(CVN-68 USS Nimitz) 항공모함에서 날아온 RH-53D 시 스탤리언 헬기로 환승한다. 헬기의 재급유와 환승이 끝난 구출부대는 다시 헬기편으로 테헤란 시내 근방의 제2집결지(암호명 ‘데저트 2’)에서 사전에 대기 중이던 요원들과 접선한 후 낮 동안은 시내에서 대기한다.
• 제2일 : 부대는 밤이 되면 다시 밴 트럭에 분승하여 인질구출작전을 준비한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테헤란 시내의 전력이 차단되면 구출부대는 미국 대사관과 이란 외무부를 급습하여 인질을 구출한다. 이후 대사관 근처의 축구 경기장에 헬기가 날아오면 여기에 탑승한 후 퇴출한다.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레인저 100여 명이 MC-130 특수전 수송기 편대에 탑승한 후 낙하산을 타고 만자리예(Manzariyeh) 공군 기지에 강하한다. 이들 레인저는 AC-130 건십의 엄호 아래 공항을 공격하여 적 병력을 소탕한 뒤 인질들을 후송시킬 C-141 수송기 2대를 착륙시키고, 공항에서 수송기로 환승한 인질과 구출부대는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한 해군 전투기의 호위 속에 안전히 귀환한다.
구출부대를 데저트 1에서 데저트 2로 침투시키는 수단으로는 RH-53D 시 스탤리언 헬기가 선정되었다. RH-53은 원래 기뢰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소해 헬기이지만, 그 당시 항공모함에서 발진이 가능한 장거리 헬기로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임무에 선정되었다.
라이스 보울 작전은 미군이 가능한 최대한의 작전 능력을 함축시킨 명작이었다. 적어도 작전계획서상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실행하기에 너무도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구출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구출부대만이 아니었다. 인질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는 정보작전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란 내의 가장 믿음직한 정보 출처이던 CIA 이란 지국의 정보요원들은 대사관 점거 시에 인질로 잡혀버렸다. 원래 CIA를 믿지 못하던 델타포스는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정보요원이 이란 현지에 있기를 원했다.
그 임무에 적임자는 바로 리처드 메도우즈(Richard J. Meadows) 예비역 소령이었다. 그린베레의 전설로 한국전에서부터 베트남전까지 풍부한 전투 경력을 가진 메도우즈는 15살에 군대에 입대하여 19살에 상사 계급으로 진급했으며, 대위로 전장임관을 한 유례없는 인물이었다. 1977년 퇴역했지만 그는 여전히 군과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델타포스의 창설 때부터 부대의 자문으로 부대원들과 여러 가지 문제들을 고민하고 또 해결해왔다.
CIA는 메도우즈 이외에도 2명의 현역 특수전 요원을 차출하여 현지로 급파했다. 아일랜드, 독일 등 다양한 국적으로 위장한 이들은 유유히 테헤란 국제공항을 통해 인질 사건 현장으로 잠입했다. 현지의 이란인 정보원과 접선한 이들은 인질의 대부분이 대사관의 구청사에 모여 있으며, 3명은 별도로 외무부 건물로 옮겨졌음을 확인했다. 작전을 위한 사전 정보는 이미 확보되었다. 이제 작전 실행을 결심하기만 하면 됐다.
작전은 1980년 4월 24일 시작되었다. 델타포스는 C-141 수송기를 타고 24일 09시 이집트의 와디 키나(Wadi Keena) 공군 기지를 출발했다. 오만 연안의 마시라(Masirah) 섬에서 MC-130 특수전 수송기로 환승한 이들은 ‘데저트 1’으로 향했다. 한편 19시 05분 이란으로부터 60마일 해상에 떠 있던 니미츠 항공모함으로부터 RH-53D 헬기 8대도 ‘데저트 1’을 향해 이륙했다.
구출부대의 최초 집결지인 ‘데저트 1’은 테헤란 남서쪽 270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CIA의 사전 조사 결과, 이곳은 이란 혁명군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약 3,000피트 정도로 비행하더라도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을 정도로 안전했다. 그러나 헬기 조종사들은 실제 작전 시에는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200피트 이하로 날도록 명령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헬기들은 너무 낮게 비행한 나머지 ‘하붑(Haboob)’이라고 불리는 모래바람에 휘말렸고, 조종사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계기 비행을 통해 지형을 극복해나갔지만, 항법 장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2대의 헬기는 편대 대형을 이탈하여 엉뚱한 곳에 착륙해버렸다. 다른 1대는 엔진에 모래먼지가 잔뜩 들어가는 바람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편대는 잠시 동안 지체했고, 그로 인해 예정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되었다. 이렇게 RH-53 헬리콥터들이 모래바람 속에서 간신히 길을 찾아나가는 사이 MC-130 수송기와 EC-130 급유기들은 먼저 데저트 1에 도착했다.
델타포스의 정보중대는 데저트 1에 도착하자마자 레인저 대원들과 함께 집결지 부근에 차단선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미군의 존재가 알려져 혁명군이 몰려온다면 구출부대는 위험해질 터였다. 잘못될 여지가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되는 법. 집결지 인근의 도로를 지나던 버스에 탄 이란인 승객들이 착륙한 항공기들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작전 노출을 우려한 경계부대는 황급히 버스를 제지하고 44명의 이란 민간인들을 억류했다. 헬기는 아직 집결하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이란인 인질만 잡게 된 것이었다.
한편 편대에서 이탈했던 2대의 헬기는 다시 집결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2대 중의 1대가 기관 고장을 일으키면서 항공모함으로 되돌아가버렸다. 결국 8대의 헬기 중에 6대만 남게 된 것이다. 이 6대는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헬기 대수였다. 여기서 1대라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임무 수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항상 머피의 법칙은 적용되기 마련이다.
최초의 헬기 편대는 작전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데저트 1에 도착했고, 나머지 편대는 그보다도 15분 더 늦게 도착했다. 작전은 상당히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도착하고 나니 더욱 큰 문제가 발생했다. 헬기 중 1대가 주 유압 계통의 고장으로 인해 최대 하중으로 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5대의 헬기만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결국 구출부대는 작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란을 향해서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미국의 이글 크로우 작전은 결국 이렇게 실패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이 헬기 1대가 부족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실패는 작전을 포기한 이후에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모래바람 속에서 귀환을 위해 서두르던 해병대 헬기 1대가 서서히 이동 중이던 EC-130 급유기에 충돌한 것이다. 이 충돌로 두 기체에 화재가 발생했고, 5명의 수송기 승무원과 3명의 헬기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커질 수도 있었다. 충돌한 급유기에는 무려 40여 명의 델타포스 대원들이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수십 초도 안 되어 수송기가 불길에 휩싸이자 폭발음을 들은 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수송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부단한 훈련과 뛰어난 반사 신경 덕분에 델타포스 B제대는 몰살을 모면할 수 있었다.
폭발로 인해 이제 작전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미군 지휘부는 헬기를 모두 파괴하고 수송기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화재와 부상자의 아비규환 속에서 현장의 대원들에게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대원들은 흔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현장에서 철수했다.
결국 다음날 이란 혁명군은 미군의 침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사고를 일으킨 조종사가 탈출하면서 작전의 세부 계획이 담긴 서류를 현장에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이란군 정보부가 이런 좋은 자료를 놓칠 리 없었다. 그 때문에 현장에 미리 잠입해 있던 메도우즈 소령 일행의 존재가 노출되어버렸다. 이들은 가까스로 체포되려는 순간을 모면하고 간신히 이란을 탈출할 수 있었다.
백악관은 다음날 새벽 1시에 구출작전의 실패를 발표했다. 이란 혁명정부는 제2의 구출 시도를 막기 위해 대사관 인질들을 더욱 세분화시켜 이란 전국으로 분산시켰다. 이란군 당국의 조사 결과, 미국인 8명과 이란인 1명, 총 9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인질로 붙잡혀 있던 44명의 이란 민간인들로부터 증언도 녹취했다.
한편 크레더블 스포츠 작전(Operation Credible Sports)이란 이름으로 제2의 구출작전도 계획되었지만,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다. 이 작전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헬기 대신 아주 새로운 항공기를 사용하려고 했었다. 로켓 추진 장치를 장착하여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허큘리스 수송기(YMC-130H로 명명) 3대를 비밀리에 개조했으나, 1980년 10월 29일 시험비행에 실패하면서 작전은 완전히 취소되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취임하던 1981년 1월 20일에야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들은 전원 석방되었다. 이로써 인질들은 무려 444일 동안의 억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인질구출작전의 실패는 미군에게 여러 가지 개선점을 던져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미 육군은 저고도 침투비행 능력의 부재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내놓아 제160특수전항공연대(나이트 스토커, Night Stalker)를 창설하게 되었다. 또한 장거리 침투 능력을 갖춘 항공기에 대한 소요도 높아졌으며, 궁극적으로는 틸트로터 항공기[Tilt-rotor 항공기, MV-22 오스프리(Osprey)]에 대한 소요가 긍정적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가 공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통합 군조직을 창설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수많은 정치적 비난과 음모론 속에서도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통합 군조직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로써 상원은 미군 내의 모든 특수전을 총괄하고 실질적인 지휘권과 작전통제권을 가진 통합 특수전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군사전문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2명의 상원의원[샘 넌(Sam Nunn) 의원과 윌리엄 코헨(William Cohen) 의원, 코헨 의원은 이후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역임]이 발안한 코헨-넌(Cohen-Nunn) 법안에 따라 1987년에 미군 특수전사령부(US SOCOM, 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 Command)가 창설되었다. 특수전사령부는 이후 전쟁에서는 더 이상 데저트 1과 같은 참패가 없도록 만들기 위한 받침돌이 되고 있다.
세계 최강의 대군이 헬기 1대 때문에 작전에 실패했다는 점은 작전에서 디테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실패의 비극이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분석하는 미국의 태도는 우리가 배울 만한 자세다. 아프가니스탄 인질사건을 겪은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웠을까 자문해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델타포스의 이란 인질구출작전 - 인질 하나 구하지 못한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2009.5.11, 플래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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