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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나들이] 울긋불긋 꽃대궐,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대궐大闕은 임금이 사는 궁宮을 둘러싼 담장을 이르는 말이니 꽃대궐이라 함은 꽃으로 둘러싸인 궁궐을 이르는 말이렸다. 올해 꽃구경은 동요 속에도 나오는 꽃대궐의 원조^^, 창덕궁 창경궁에서 갖기로 한다. [창덕궁 안내도]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창건된 조선왕조의 왕궁으로 원래는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됐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한데다 그런 이면에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 등 정치적 사건과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한 몫 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의 기능을 하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 '돈화敦化'는 중용中庸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말로 '백성을 가르쳐 감화시킨다'는 뜻을 갖고있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당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새로운 왕조의 기상과 위엄을 지녔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회화나무 군락지, 중국 궁궐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도 그려져있는 수령 300~400년의 노거수로 8그루의 회화나무 모두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궐도'(국보 249호ㆍ동아대학교 소장). 조선후기 순조 연간에 도화서 화원들이 도감도식으로 그린 가로 약 6m 크기의 동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으로 지금도 궁궐 복원사업에 소중한 자료로 쓰일 만큼 정교하게 그려져있다고 한다. 수백년의 시공을 넘어 당시 궁궐의 모습과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고궁나들이의 특별한 맛이지 싶다. 왼쪽 아래 모서리 부분에 돈화문이, 오른쪽 아래 빗금에 홍화문이 보인다. 회화나무 군락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금천교錦川橋가 있다. 금천은 백성의 구역과 왕의 구역을 나누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이중 홍예석교로서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나오는 진선문進善門 근처. 앵두나무 꽃이 흐드러게 핀 사이로 매화꽃이 만발했다. 하얗게 피어있는 꽃이 있어 다가가 보니 '미선나무'다. 미선나무는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 식물로 열매 모양이 궁중의 가례나 의식에 쓰이던 부채를 닮았다고 하여 '미선尾扇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청초해 보이는 꽃모양과는 달리 꽃향기가 여간 진한 게 아니다. 궁궐 전각의 형형색색의 단청을 배경으로 푸른 기운이 도는 매화꽃이 어우러져 고결한 모습을 한껏 뽐내고 있다. 그냥 돌아서기가 너무 아쉬워서 줌으로 당겨 한 장 더 찍었다. 근데 흐린 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까지.... 영 말씀이 아니다. 그래도 앵글로 담아온 풍경이 그나마 당시 눈으로 보았던 풍경보다 훨씬 나은 듯, 디지털 카메라 덕이다. 이럴 땐 위에서 아래로 약 15도 정도 각도로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요령이다. 본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첫번 째 문 진선문進善門. 태종 때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申聞鼓'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매달아 놓았다는데 글쎄, 지엄한 왕조시대에 여기까지 와서 북을 칠 수 있는 백성이 몇이나 있었을까 싶다.
진선문 맞은편에 있는 숙장문肅章門. 국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과 왕실의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仁政門. 좌우에 진선문과 숙정문이 있는 인정문 앞마당을 '외조外朝'라 하는데 여기에서 역대 왕들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인정仁政'은 글짜 그대로 '어진정치'라는 뜻으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 국가적인 행사와 외교사절의 접견 등이 행해지던 통치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불렀는데 국왕이 조회를 받을 때 좌우에 있는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즉 동반東班이 서편에는 무관 즉 서반西班이 도열하였다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양반兩班'이라는 말은 이 두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궁을 거니는 한복차림의 관광객들이 하도 예뻐서 기념으로 한 장 찍었다. 이제는 명절에도 보기 힘들어진 한복이 여기저기 눈에 뜨이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한복 대여소에서 한복을 빌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란다. 낯선 외국인들이 오히려 우리나라를 홍보하고 있는 웃픈 현실. 아무튼 고맙다. 인정전仁政殿 내부. 정면에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어좌와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고 주변으로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4폭 병풍, 비단에 채색. 병풍 세로: 248.0, 가로: 366.0 | 화면 세로: 231.3) 일월오봉도라고도 불리는데,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동시에 왕조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좌우로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는데 이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으로 국토를 의미한다고 한다. 인정전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꽃이 마치 지엄한 구중궁궐에 날아든 철딱서니 없는 봄나비 같다. 숙장문肅章門을 지나면 낙선재와 갈라지는 지점 왼쪽에 성정각誠正閣이 있고 성정각의 자시문資始門 앞에 수령 약 400년의 매화나무가 있는데 이 매화나무가 유명한 창덕궁의 성정매誠正梅다. 꽃잎이 여러겹 겹쳐서 피는 만첩홍매萬疊紅梅로 원줄기는 혹한으로 고사하고 뿌리에서 돋아난 줄기가 자라난 것이라고 한다. 자시문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상궁으로 변장하여 피신했다는 일화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궁궐의 전각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봄꽃. 온갖 권력투쟁과 끔찍한 사화가 벌어진 구중궁궐 깊은 곳에도 해마다 봄은 찾아와서 꽃을 피웠을테지.... ㄱ 꽃그림을 좇아 궁궐 이곳 저곳을 배회하다 희우루喜雨樓 앞에 발길이 멎었다.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하는 아름다운 전각이다. 늘어진 매화 꽃 가지가 멋스럽게 솟은 추녀와 호응하며 봄을 만끽하고 있는 듯. 희우루 앞 담장에 찾아온 그림 같은 봄.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는데 열중이시다. 나도 매화꽃 향기에 이끌려.... 햇빛이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아지랑이 속을 나는 하얀 나비떼를 볼 수 있으련만~ 성정각 담 모퉁이에 핀 홍매화. 사진을 찍기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바람에 한참을 기다려 어렵게 얻은 사진이다. 승화루承華樓 앞 붉디 붉은 진달래와 만첩홍매가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는 듯. 일찌감치 꽃을 피운 노란 산수유꽃도 한 걸음 물러서서 한 몫 거들고.... 늘어진 수양 벚꽃은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이어도 저리 아름답다.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1847년에 서재 겸 휴식공간으로 지었다는 낙선재는 특정기간 예약제로 개방하는 까닭에 아쉽지만 문화재청에서 제공하는 사진을 통해서 감상하기로 한다.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는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으로 가꾼 계단식 정원인 화계花階가 있고 그 위의 꽃담 너머로 상량정이 보인다. 매우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창경궁 안내도]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으로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성하고 경사스러운 궁궐'이란 뜻을 지닌 '창경궁昌慶宮'이라 명명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격하되고 동물원으로 놀이터가 되었으나, 1987년 시작된 일제 잔재 없애기 노력 끝에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입장료를 따로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다시 돌아 나올 때 검표에 대비해서 입장권을 잘 간수해야 하는 게 요점이다.^^ 아름다운 굴뚝과 꽃담으로 만들어진 화계花階가 창덕궁 후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계단식 화원에는 앵두꽃 진달래 개나리 매화꽃이 한창이다. 영춘헌과 집복헌 뒷편으로 올라가는 길. 넓은 바위를 자연 그대로 바닥재로 사용한 것이 주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되었음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꽃담. 여기에도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지혜가 엿보인다. 지형의 높낮이가 있는 곳에는 석벽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흙을 채워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중간에 돌계단을 놓아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향나무는 예로부터 신과 인간을 이어주고 부정을 씻어주는 신목으로 궁궐을 비롯해 사대부의 정원, 유명 사찰, 동네 우물가에 널리 심었는데 동궐도에도 나오는 향나무로 200년 이상 이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 나무인들 세월을 비껴갈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것인가 늙은 고목 한 그루가 봄꽃이 만발한 꽃담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주목도 인간사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증거하는 듯. 함인정涵仁亭 그런데 오른 쪽에 서있는 석탑이 영 낯설다. 승유억불 정책으로 성리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궁궐에 석탑이라니.... 영춘헌 사도세자와 순조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개력군주 정조가 승하한 역사적인 장소. 국권을 찬탈한 일제가 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릴 의도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동물원관리사무실로 사용하는 바람에 원형을 보전할 수 있었던 행운(?)의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 어디쯤이었나 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머님께서 수학여행을 못보내주는 대신 동생과 나를 서울에 계신 이모님댁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옛사진들을 보니 새삼 사촌 형님의 손에 이끌려 창경원을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관광객들이 주는 과자를 먹으려 긴 코를 내밀던 코끼리도.... 하지만 그리운 추억의 뒤편에 어두운 오욕의 역사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안 것은 내가 철 들고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1907년 일제는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앉혔는데, 창덕궁에 감금되다시피 한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민족의 얼을 말살시키고자 선인문 보루각터에는 동물원을, 춘당대에는 식물원을 만들고 각종 놀이시설을 설치해 일국의 궁궐을 놀이터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저들의 문화재는 끔찍이도 아끼는 일본인들이 말이다. 더욱 더 한심한 것은 1984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창경궁 복원 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일제가 궁궐 내 노거수들을 베어내고 심은 사꾸라 꽃은 '창경원 밤 벚꽃놀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이벤트로 각광받았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진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 84회 생신기념으로 창경궁이 무료개방 되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이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숱한 전란과 화재와 오욕의 역사를 딛고 우뚝하게 서있는 홍화문弘化門 광화문 돈화문 등 궁궐의 정문은 남향인데 반해 홍화문은 동향인 것이 특징이다. '홍화弘化'는 '크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길 건너편 그러니까 서울대학교 병원 쪽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창덕궁 쪽에서 들어온 때문에 밖을 나갈 수 없어 korean.visitkorea.or.kr에서 빌려왔다. 홍화문을 지나면 춘당지의 물이 흐르는 옥천교가 나오고.... 명정전 쪽에서 바라본 명정문. 좌우 길보다 조금 더 높은 중앙길이 왕이 다니는 어도이다. 조회가 열릴 때에는 문신은 오른쪽 길로, 무신은 왼쪽길로 입장하였다고 한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건축물로 홍화문과 마찬가지로 다른 궁궐과 다르게 동향을 하고 있다.
창결궁 명정전 내부. 다른 궁궐처럼 어좌 뒤로 일월오악도 병풍을 둘렀고, 천정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 왕이 업무를 보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일반적으로 편전은 정전 뒤에 일직선으로 있으나, 문정전은 명정전 남쪽에 있다.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한 곳이기도 하다. 명정전과 문정전 사잇길 궁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드므'라는 용기가 보인다.
웅장한 홍화문에 눈길을 빼앗겨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의 왼쪽에 있는 관리들이 드나들던 조그만 문으로 궁중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인조에 의해 폐출된 소현세자비 강빈이 이문을 통해 궐 밖으로 쫓겨났고 중전 복위를 노리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 씨의 시신이 이문으로 나갔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쫓겨나간 것도 이문이다. 사극을 통해 많이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도 선인문이었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 앞에서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선인문 뒤로 옮겨진 뒤 8일 동안 굶주림과 한여름 더위에 신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한다. 창경궁 선인문 앞을 지키고 있는 수령 400년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본래 줄기가 곧고 단아한 모습을 한 장수목 중에 하나로 잡귀가 붙지 않는 상서로운 나무라 여겨 궁궐이나 서원, 문묘, 양반 집 앞에 많이 심는 수종인데 스물여덟의 젊은 사도세자의 억울하고도 슬픈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고통 때문일까 온몸이 뒤틀리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에 가려진 역사의 빛과 그늘을 둘러보고 창경궁을 떠나며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회화나무의 가슴이 되어 글 한 편 남긴다. 창경궁 회화나무 / 차승열 아직도 나는 살이 떨린다 여기 이 자리에 서서 말없이 지켜보았느니 옥좌玉座가 대관절 무엇이관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더란 말이냐 여드레 밤낮 사도세자의 처절한 비명을 들었느니 그 아픔 뻣 속 깊이 스며 들어 허리는 뒤틀려 갈라지고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 흉한 몰골로 이날 이때껏 선인문 앞마당을 지키고 있느니 꽃을 좇아 무심코 오가는 사람들아 아무리 지은 죄가 무겁다 한들 인륜을 저버릴 만큼 중했다 더냐 임금 자리는 아비도 자식도 없더란 말이냐 사람들아 이 못난 사람들아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조선의 궁궐宮闕. 하지만 뭣 좀 안다는 사람이거나 외국깨나 나갔다 온 사람들 중에는 우리의 고궁을 폄하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이들은 왜소 컴플렉스 환자 이거나, 무한경쟁사회에 길들여진 가엾은 최고 지상주의자가 아닐까. 적어도 문화란 그런 잣대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중국의 만리장성의 웅장함에 감탄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만리장성을 쌓은 돌 하나하나에 피맺힌 민중의 한을 보기도 한다. 조선왕조 500년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에게 궁궐 건축의 기본은 "검이불누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면서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아름답다'였다. 실례로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에게 궁의 이름과 군주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즉, 사치하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실나게 하며,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이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인즉 조선의 궁궐은 저 르브르궁이나 바티칸궁, 자금성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낮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 궁궐만이 지닌 철학과 미학 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아무쪼록 다양성 속에서 우리의 궁궐이 지닌 고유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눈 뜰 일이다. 사랑 할 일이다. 하기는 나처럼 서울에 근 30년을 넘게 살면서도 우리의 궁궐 한 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시민이 대다수인 우리네 문화수준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생각들은 아직 부질없는 외침일지도 모르겠다. 여보게 친구! 올 가을에 다시 와서 꼼꼼히 둘러보자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그땐 책도 몇 권 사서 읽고 와야것지. 나이들어 가면서 이제라도 우리 것은 알고 가야하지 않겠나. 봄날 고궁나들이를 함께 한 친구와.... ( 2018,4,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