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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브로 보기 https://youtu.be/r0lcML1Y784
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30. 자, 무엇이 납승의 본분이겠느냐?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스님 네들이여, 우선 납승의 본분을 분명히 알도록 하라. 자, 무엇이 납승의 본분이겠느냐?"] 운문선사가 상당하여 향상일구(向上一句)를 향함니다. 여기서 운문선사는 “우선 납승의 본분을 분명히 알도록 하라. 자, 무엇이 납승의 본분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납승의 본분을 분명히 알도록 하라”라고 하신 뜻은 제일 먼저 납승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납승(衲僧)이란 삼천대천을 떠돌며 선지식을 찾아 행각하는 부평초(浮萍草)같은 선승(禪僧)들을 칭하는 이름이며 본분이라고 하신 것은 흔히 본분종사(本分宗師)를 말합니다. 선가귀감 칠십일곱번째 게송에 나오는 글을 먼저 소개 하고자 합니다. 본분종사(本分宗師)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인다.
본분종사(本分宗師) 전제차구(全提此句) 여목인창박(如木人唱拍) 홍로점설(紅爐點雪) 역여석화전광(亦如石火電光) 학자실불가의의야(學者實不可擬議也.
고(故) 고인(古人) 지사은(知師恩) 왈(曰) 부중선사도덕(不重先師道德) 지중선사불위아설파(只重先師不爲我說破)
본분종사(本分宗師)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인다.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붙는 화로에 눈이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여, 공부하는 이가 어떻다고 헤아려 보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스승의 도덕을 장하게 여김이 아니라, 오직 스승이 내게 해설해 주지 않은 것에 감격한다.”고 했다.
본분종사(本分宗師), 다시 말해서 참선의 근본을 전해 주는 큰 스님을 본분종사라고 합니다.
이 본분종사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여서 마치 장승이 노래하듯, 또는 불붙는 화로에 눈이 떨어지듯, 또는 번갯불이 번쩍이듯 한다. 이건 다 무슨 소리냐 하면, 어떻게 좀 헤아려 보거나 더듬어 볼 수가 없게,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 답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죠. 법문(法門)과 강의(講義)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강의는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서 많이 하죠. 강의하는 것은 되도록 알아듣기 쉽게 하면 잘 하는 강의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나 법문은 못 알아듣게 해야 잘 하는 법문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모르는 것을 스스로 깨치게 해야 된다, 이런 의미죠. 그러니까 법문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얼 모르는지 그 부분을 탁 짚어주고, 그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법문을 하는 선사(禪師)들을 산파(産婆)에 비유를 하죠. 산파는 본인이 애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산모로 하여금 해산을 잘 할 수 있게 순산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본분종사도 마찬가지이죠. 대신 깨달아 줄 수는 없어요. 그러나 법문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는 설(說)하려야 설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백척간두(百尺竿頭: 백 자나 되는 장대 끝이라는 말.)에서 진일보(進一步: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 하여, 어떤 목적이나 경지(境地)에 도달하였어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노력함을 뜻하거나, 충분히 언사(言辭)를 다하였어도 더 나아가서 정묘(精妙)한 말을 추가함을 말한다.)해야 되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에 운암담성(雲巖曇晟)에게 가르침을 받은 동산양개(洞山良价) 스님은 이런 말을 한 거죠. 스승의 도덕을 장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승께서 나를 위해 설파(說破)해 주시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설파, 말로 설명해 줬으면 내가 오히려 몰랐을 텐데, 말로 설명해 주지 않고 스스로 깨칠 수 있게 찔러 주는 거죠. 선사들은 찔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내놓아 봐라. 도대체 이 시체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 한 번 내놓아 봐라. 일러 봐라.” 이런 식으로 해서 찔러 주는 겁니다.이 동산양개 화상이 스승인 운암 선사를 위해서 재를 올리면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이. “스승의 도덕을 장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을 장하게 생각한다.” 무엇을 일러주지 않았느냐?
동산 스님이 물었죠.
“훗날 스승의 그림자를 묻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하고 얘기했을 때, 여러 설명 없이 그냥,“바로 이것이라고 이르거라.” 이렇게 말했어요. 바로 이것. 바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나중에 다리를 건너가다가 자신의 그림자가 강에 비친 것을 보고 ‘바로 이것’을 깨우친 거죠. 동산 스님이. 그러고 나서 재를 지내면서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주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붓 끝에 오를라! 이를 수 없는 도리를 억지로 일러주는 것보다 차라리 찔러서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
이것이 본분종사의 역할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운문선사의 본분을 알수가 있습니까? 안다면 나와서 한 소리 해보아라 라고 하신 만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나서도 아무도 나와서 한 소리 하는 사람이 없자. 이 납승이 본분종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다시 한 소리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마하반야바라밀. 오늘은 크게 운력을 하리라" 하더니 법좌에서 내려왔다.] 여기서 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였을까요?
조금 전에 납승의 본분사를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으니 덜라 머하반야바라밀이 무엇입니까 크나큰 반야 지헤인 것이니 깨달음이라는 것이 지금 여기서 선문답을 하고 향상일구(向上一句)를 말하고 이 것을 한 생각 일으나면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묻고 하는 것이 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여상한 진여(眞如)이며 평상행(平常行)이 다 진리이며 진여행이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크게 운력을 하리라”라고 하시어 운력하는 것이 그대로가 반야지혜이며 진실 여상한 평상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 가리켜 주시고는 바로 법문을 마치고 법석에서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스님이 나와서 운문선사앞에 꿇어 앉아 절하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고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 화두를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가 간지가 언제인데 지금 여기서 왜 달마대사를 소환하는 것이냐. 오직 그대 마음에 의정이나 걸림이 있는 것을 물어야지 이런 헛소리를 하는가?라고 간파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산하대지(山河大地)다."] 수백년전에 달마대사가 왔다 간것이나 ㅈ지금 여기에 펼쳐진 것은 너의 마음이 펼쳐놓은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있지 않은가 지금 그대는 그대 마음이 그려내는 형상은 바로 지금 여기에 펼쳐진 산하대지가 있지 않느냐 무엇이 있더란 말이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른 견처가 없다. 이 말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하지도 못하고 도 이렇게 묻고 있다. 선문답은 오직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의 견처를 드러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명색(名色)이나 형상(形相)으로 물으면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묻고 있다.
["본분 향상<向上>에도 더 이상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본분종사는 말을 하고 있는 말에 향상일구(向上一句)인데 그 이상으로 바로 들어면 일촉지에 언하대오(言下大悟) 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 ㅎㅎㅎㅎㅎㅎㅎ그런 말이 있다면 바로 가리켜 주지 왜 하루종일 이렇게 묻고 답하는 선문답을 하고 있겠느냐.
이것도 다 선기방편(禪機方便)인데 지금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그대 마음에 계합하면 되는 것인데 왜 짜꾸만 형상과 명색에 매달려 묻고 있는냐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석가(釋迦) 부처는 인도(印度)에 계시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이 나라에 계신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석가(釋迦) 부처는 인도(印度)에 계시고“라고 하신 것은 석가 모니불은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열반하신 한 부처이며 그 이름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이 나라에 계신다."라고 하신 것은 문수보살은 우리 마음에 지혜(智慧)를 나타내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그 문수사리불은 바로 지금 한 생각 일으키는 그대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여기에 있다고 직설석으로 가리켜 주십니다. 이렇게 직설적을 바로 가리켜 주시면 바로 내 마음이 본심(本心)은 바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蔗那佛)이니 내 마음이 그대로 부처로 구나 하면서 한소식 하여야 할 것인데 이른 안목(眼目)이 없으니 그대로 절하고 물러난다.
그 때 다른 한 스님이 나와 절하고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부모(父母)를 모두 잃었을 경우엔 어찌합니까?"]라고 물었다.
이 물음은 임제록에 나오는 물음이지요.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생사의 물음인 것입니다. 그럼 생사에 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생사를 형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마음에서 본다면 마음은 형상이 없으니 생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상으로 몸을 중심으로 본다면 형상이 움직임이 있으면 생이요 움직임이 없으면 죽음이라고 할 뿐 형상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니 그래서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찰나간에 빛의 화현에 의하여 보여질 뿐 생사는 차별심에서 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모두 잃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 어느 것이 너의 부모(父母)이더냐?"]라고 하십니다. “모두 잃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라고 하시여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사라진 것은 빛의 화현이니 그 실체가 없었으니 우선 그만두고 “어느 것이 너의 부모(父母)이더냐?”라고 다시 묻고 게십니다. 너의 부모이더냐? 우리 불보살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부모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은 나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입니다. 즉 한 마음에서 본다면 내 마음에 한 형상인 것입니다. 인연법에서 본다면 부모님이 계시지만 일심에서 본다면 내 마음에 한 형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죽고 삶도 없고 형상에란 찰나간에 비추니는 빛의 화현임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죽고 삶이없는 것입니다. 돌~!!!!!!!
이렇게 설파를 해 주시나 이 한 스님은 이 말의 진실한 뜻을 이해도 못하고 자기 마음의 작용을 이렇게 말로 하고 있습니다.
["매우 괴롭습니다."]이 말은 마음의 성품을 드려 낸 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마음의 성품을 드러낸 것이니 운문선사은 이렇게 인증을 하십니다.
["분명하구나, 분명해."]라고 모처럼 인증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 스님은 절하고 물러났다. 그 때 또 다른 스님이 나와 절하고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큰 시주입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시주(施主)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육바라밀의 보시(普施)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큰 시주라고 하였으니 시주에도 큰 시주가 있고 작은 시주가 있다라는 뜻으로 말하니 이것은 차별심이요 분별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시주는 그 사람은 근기에 따라 하는 것이지 어찌 큰 시주와 작은 시주가있을 수 있느냐 고 꾸짓고 있습니다.
["근기(根器)를 보고도 가려내지 못하는구나."]하십니다.
이 것은 시주를 하는 사람의 근기를 보면 알수 있는 것이지 이것을 차별심으로 크다 작다라는 차별심으로 바라본다면 안니된다라는 뜻으로 이 스님을 꾸짖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묻습니다
["아주 깜깜한 먹통이 찾아왔을 땐 스님은 어떻게 구제하시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주 깜깜한 먹통이 찾아왔을 땐“이라고 하신 것은 아주 불교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제가 찾아 왔을 때는 운문스님은 어떻게 구제하시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정말 무래한인이 선문답에 나온다면 운문선사님은 어떻게 그런 사람도 제도하는 방편이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선문답의 선기방편은 오직 천지만물의 자연적 천진성품(天眞性品)을 알아차림에 있다. 부처님의 경전도 사회의 법률도 상식과 지식도 그 어떻한 법칙도 다 소용이 없다. 사람은 마음이라는 것에는 본래의 성품(性品)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에 계합이 되면 바로 부처의 불성을 가지고 나왔으나 삼독심(三毒心)이라는 탐진치(貪瞋癡)의 욕망의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물들어 본래불(本來佛)인 본불(本佛)을 잃어 버리고 번뇌망상(煩惱妄想)인 알음알이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물들어 있음을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본불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선문답인 것이다. 그럼으로 불교에 대한 그 어떻한 선입견도 없는 사람이 더욱 빨리 본성을 회복하는되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두 겹 공안(公案)에 진술서 하나로 죄상을 다스린다."]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선지식이 학인을 향하여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보통 번뇌망상(煩惱妄想) 아름알이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차별과 분별심으로 사량분별함으로 답을 찾을 수가없다.
그러나 5살 먹은 꼬마에게는 천진불이라 아직 본성이 살아 있음으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바로 자기 몸을 가리키며 “여기 있네”라며 웃는다. 이것이 천진성품이 살아 있는 천진불인 것이다.
그래서 한 두 가지의 선문답으로 그 사람을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를 든다면 바로 육조 혜능대사가 께달은 성품이 무엇입니까? 방에서 금강경을 읽고있는 경전 내용중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起心)이라는 한 마디 경구에 이것이 마음을 나타내는 줄 알고 바로 모든 것은 다 소소영영 지각하는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일으키는 것임을 직감하고 홍인선사를 찾아 인가를 받아 대 선사가 되었듯이 깨달음은 자기의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지 무엇을 알아 께닫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밝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스님은 선사의 말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그 근본 마음에 계합을 해야 하는데 번뇌망상에 휘둘려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다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설법(說法)하십니까?"]라고 주객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운문선사는 이런 맹추같은 놈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나 아느냐 하시면서 아주 혼줄을 내어 주어야 되겠다 슆었는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 가까이 와서 큰 소리로 묻거라."]라면서 상대를 속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이렇게 행동을 합니다.
[그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서 묻자 스님은 갑자기 후려쳤다.]라고 하십니다. 운문선사의 말후구는 바로 직심에 닿아라고 몽둥이로 때립니다. 알겠습니까?~~~~~돌~~~~~!!!!!!!
그렇게 이 한 스님이 몽둥이로 맞고 도망을 가버립니다.ㅎㅎㅎㅎㅎ
그 때 또 다른 한 스님이 나와 운문선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스님의 연세는 몇이나 되셨는지요?"] 참으로 우스운 질문이다.
선사의 나이를 왜 물을까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어심병환자입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정해진 법칙되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어떤 이름도 그사람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 명색에 빠져서 그 이름이 그사람은 대신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허상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왜 여기서 선사의 나이가 궁금했든 모양입니다. 그러니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이 허망함을 알려 주시려고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칠 구 육십팔이다."]라고 하십니다.ㅎㅎㅎㅎ자주 나오는 선문답이지요. 구구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칠구는 육십삼”인데 칠구는 육십팔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명색에만 물들어 있는 학인은 이것을 문제삼아 따지고 듭니다. 선사님 칠구는 육심삼인데 왜
["어째서 칠 구 육십팔입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스님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회광반조(廻光返照0해서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를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이 역순이며 그렇게 우리의 전도몽상(轉倒夢想)을 깨달아야 하는데 명색에 따라 가니 그 깊은 현지(玄旨)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5년은 너에게 덜어주었다."]라고 하시어 숫자나 이론이나 형식에 매달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것입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격외선(格外禪)>
격외선(格外禪)에서 ‘격(格)’은 격식(格式)ㆍ규격(規格), 어떤 정해진 틀을 말한다. ‘격외(格外)’란 정해진 규격 밖, 규격을 초월한다는 뜻으로, 말 밖의 소식을 이르는 말이다. 말이나 문자로 의논할 수 있는 이치를 초월한 말을 격외어(格外語) 혹은 격외구(格外句)라 하는데, 격식을 초월한 선법(禪法)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격외구(格外句), 격외소식(格外消息), 격외선(格外禪) 등 격외는 선승들의 법문 속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격외(格外)와 격내(格內)는 현격하지만 그 간극 역시 얼마 되지는 않는다.
이 격외구로 이르는 선법이 바로 달마(達磨) 조사가 전한 최상승선(最上乘禪)을 이르는 것이다.
※최상승선(最上乘禪)----당나라 규봉 종밀(圭峯宗密, 780-841)이 선(禪)을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의 5종류로 나눈 가운데 최고의 것. 달마계통의 선을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말했다. 인간은 본래 불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깨달아 그 진리를 수행상에 있어 구체적으로 표현해 가는 선을 말한다.
격외구(格外句)란 일체를 뛰어넘은 향상의 어구, 즉 향상일구(向上一句)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 밖의 소식이요, 뜻이 붙지 않는 선지도리(禪旨道理)로 이르는 것으로, 주로 조사(祖師)가 전한 말씀(어구)이다. 격외어(格外語)를 사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첫째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은 말. 둘째 (능력이나 지혜 따위가) 초인간적으로 탁월한 말. 셌째 세상의 명리(名利)에서 초탈한 말. 넸째 ‘인간으로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을 이르는 말.
우리의 근본인 불성(佛性)은 말로써 이를 수 없기에 뜻이 붙지 않은 말 밖의 도리로써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아~시원하다" 하는 것과 같다.
말 밖의 소식이라는 것은 말을 쓰되 말뜻이 직역되지 않고 숨긴 뜻으로 쓰이며,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알려고 참구하게 하는 방편으로 쓰는 선문(禪門)의 어구이다.
따라서 ‘격외도리(格外道理)’란 논리를 초월한 언어의 도리를 말한다. 또한 언어의 격식이나 관례를 초월한 말이지만 진리를 담고 있음을 말한다. 불교는 수행구조가 초월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 의외의 언어, 즉 격외도리인 경우가 많다.
격외도리는 설정된 언어의 뜻에 구애받지 않고 부정과 긍정 양 날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언어의 격식을 뛰어넘는 진리에 대한 표현이다. 말이 있으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뜨고, 옳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쁘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틀이 잡히고, 논리가 생기고, 문법이 생기고, 격식이 생겨, 격식을 벗어나면 틀렸다, 아니다 하는 갈등이 생긴다.
때문에 진리는 옳다 혹은 그르다 하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곳에 있으므로 그 표현도 통상적인 격식과는 달라진다. 선문답(禪問答)이나 화두(話頭)의 경우 대개 격외도리에 해당한다.
선불교에서 제시하는 ‘화두(話頭)’라는 말에서 ‘화(話)’란 말 또는 이야기라는 뜻이며, ‘두(頭)’란 접미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화두란 그저 ‘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선사(禪師)들이 쓰는 특별한 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화두란 모든 사유와 분별의 통로를 막는 선사들의 독특한 언어이다.
이러한 말은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화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유 분별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화두를 일상적인 격을 벗어났다 해서 격외어(格外語)라 한다.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 붙을 수 없는 절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가(禪家)에서 언어를 사용해 선지(禪旨)를 직접 표현하는 경우에는 이른바 격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선장(禪匠)이 격외어를 말하는 경우에는 겉으로는 보통의 의미에서 말을 하는 것 같으나, 그 말에서 의도하는 것은 대개 그 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선(禪)에서 말하는 진리의 세계, 그 깨달음의 자리로 들어서려면 생각이 무너져야 한다. 경계가 해체돼야 한다. 그런데 대화를 하려면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려면 말을 사용하되, 그 말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 이성을 배경으로 한 말을 통해 생각과 사유하는 ‘나와 이성’을 괴멸시키는 거나 다름없다. 이것은 지극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말을 하면서 말을 부정하는 선문답은 일상의 생각의 잣대로는 보면 완전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며 기상천외(奇想天外)하다. 그래서 그러한 말은 법식과 표준, 관례나 규정을 벗어났기 때문에 격외어(格外語)라고 한다.
또한 바른 모양이나 일상적인 세상을 벗어났기에 방외어(方外語)라고도 한다. 격외의 도리나 방외의 도리도 마찬가지 의미다. 이와 관련해 격외지사(格外之士)와 방외지사(方外之士)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일정한 격식이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격외지사(格外之士)의 대표적인 인물이 선사들이다. 선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당나라 시절에는 이러한 격외지사들이 많이 출현했다. 그 선의 대종장들 사이에 활발한 선문답이 전개돼 결코 적지 않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열어나갔다.
이와 같이 어떠한 규격이나 정해진 틀 밖에 있는 선(禪), 사량분별을 용납 않는 조사선(祖師禪)을 뜻할 때, 선승들의 법문 속에서 격외구(格外句), 격외소식(格外消息), 격외도리(格外道理) 등 격외어가 많이 등장한다.
『세간적 척도를 초월한 선, 혹은 세속적인 척도로부터 초월해 있는 경지를 가리킨다. 즉, 말이나 문자로는 표현하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선의 경지, 상식이나 논리로는 접근 불가능한 경지를 격외선이라고 한다. 격외선(格外禪)이라고 할 때는 주로 털끝만치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조사선(祖師禪)이나 임제선(臨濟禪)을 뜻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언어문자나 지식, 지해(知解, 알음알이)의 손끝이 닿지 못하는, 말하자면 사량분별의 저편에 있는 선을 말한다.
선의 경지 가운데서도 최고봉을 가리키는데, 격외선은 중국의 5가 7종처럼 문파나 문하가 형성돼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고준한 방외(方外)의 선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선승 청허 휴정(淸虛休靜) 선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제불설궁 조사설현(諸佛說弓 祖師說絃) 대목의 주(注)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뭡니까?’ 여기에 대해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했는데, 이런 것을 이른바 격외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승문조주(僧問趙州).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주답운(州答云).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차소위(此所謂), 격외선지야(格外禪旨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청허 선사는 사량분별심이 접근할 수 없는, 이를테면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같은 ‘틀 밖(格外)의 대답’이 격외선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매우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또 <청허집>에서 그는 좀 더 사족(蛇足)을 달았다. “향상일로는 삼천석불도 언설이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격외선이라고 한다. 만약 마음이 허공과 같은 자는 조금 합일한다(향상로(向上路), 삼천석불(三千石佛), 탈불급자(說不及者), 격외선(格外禪). 약심여허공자(若心如虛空者), 어도(於道), 유소분상응(有少分相應).”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마음이 허공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유심으로도 무심으로도 뚫을 수 없다는 뜻이다(유심무심(有心無心) 구투불득(俱透不得)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마음이라야만 가능할까?
심공급제(心空及第), 즉 마음이 공(空)에 급제(합격)한 마음만이 가능할 것이다. 격외선이란 이치적인 접근이 가능한 의리선(義理禪)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통상적인 논리와 지식, 견해 등을 초월한 선의 경지를 말한다.
※의리선(義理禪)----의리선이라는 말은 조선 후기에 고창 선운사의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이 저술한 <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긍선은 선을 깨침의 정도에 따라, 의리선(義理禪).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임제3구(臨濟三句) 가운데 제1구는 조사선, 제2구는 여래선, 의리선은 제3구에 해당한다. 임제 제1구는 삼요(三要)이니, 이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므로 조사선의 근기이다. 제2구는 삼현(三玄)이니, 이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게 하므로 여래선의 근기이다. 제3구는 유(有)⋅무(無)⋅중(中)을 희롱하는 것이니, 이것으로는 자기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다고 봤다. 즉, 긍선은 의리선을 임제 제3구에 적용시켜 자기 구제도 어려운, 근기가 낮은 이를 위한 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격외선은 일반적인 사고나 이치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같은 말로는 격외구(格外句, 정해진 틀 밖의 말), 격외담(格外談, 격외구와 같음), 격외현지(格外玄旨, 사려 분별을 초월하는 묘지(妙旨), 격외현기(格外玄機, 사려분별을 뛰어넘은 기용(機用) 등이 있다.
격외란 겁외(劫外, 영겁 밖), 겁외소식(劫外消息, 영겁 밖의 소식, 경지, 세계)과도 같은 말이다. 보편적인 사고(思考)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지인데, 그런 경지를 ‘영겁 밖의 봄소식’이라는 뜻에서 ‘겁외춘(劫外春)’이라 하고, 그런 경지를 읊은 선시(禪詩)를 ‘겁외가(歌)’라고 한다.
꽃피는 봄인데 해마다 맞이하는 상례적인 봄이 아니다. 그 봄은 우주 영겁 밖의 봄이다. 불가사의한 봄이다.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소식), 고목생화(枯木生花, 마른 고목에서 꽃이 피다), 몰현금(沒弦琴, 줄이 없는 거문고) 등도 같은 의미이다. 모두 다 보통 사람의 사유를 뛰어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 격외선의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윤창화
격외선(格外禪)은 선(禪)의 맥이 말과 문자로 된 경전의 이론이나 지식의 격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임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인도에서는 계(戒)⋅정(定)⋅혜(慧) 3학(三學) 중의 하나인 정(定)과 6바라밀(六波羅密) 중의 하나인 선정(禪定)을 선(禪)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독창적인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주창하고, 선의 맥은 교의 밖에서 따로 전해진다고 하는 격외선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즉, 말과 문자로 된 경전의 이론이나 지식의 범주를 초월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격외선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의 무염(無染)이 <무설토론(無舌土論)>에서 최초로 이 선법을 주창했다.
“석가모니가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친 뒤에 다시 설산에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만나서 현극(玄極)한 뜻을 전해 받았으니, 이것이 교외별전의 연원이다.”라고 한 것이나 석존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말한 것 등이 모두 격외선에 관한 주장이다.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도 “정혜쌍수(定慧雙修) 밖에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별전 선지가 있다.”라고 했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도 <선교결(禪敎訣)>에서 격외선을 강조했으며, 조선 후기의 백파(白坡)는 의리선(義理禪)에 상대되는 것으로 격외선을 주장하기도 했다.라고 아미산 이덕호거사는 놀리적으로 설파를 했다.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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