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광해군의 정적 제거 과정과 대북파의 득세]
광해군 시대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방계 승통이라는 오점을 남긴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 시대가 끝나고 정씨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였고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게다가 그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왕위
세습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데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했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였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광해군
지지파였던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책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임해군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해군은 세자 책봉에서 탈락된 이후 줄곧 광해군을
헐뜯어온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처사는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의 광폭한 성격으로 인해 민간이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 세력과 소북 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대북파는 임해군이 말썽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며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임해군 이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몰아내고 영창대군과 능창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까지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사건이 '김직재의 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모반의 주모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이때 고기와 술을 먹었다
하여 칙첩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광해군 때에 늙은 어머니를
학대했다 하여 칙첩을 다시 빼앗겼다. 이 때문에 그는 광해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고, 대북파가 이 같은 그의 약점을 이용해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소북파를 몰아낸 대북파는 어리지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때마침 '칠서의 옥'이 발생해 이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후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은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또 다른 숙청 대상은 능창군이었다. 능창군은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빈의 소생이자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로 책봉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당시 17세로서, 주변에서 그를
중심으로 역모를 감행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능창군은 기상이
비범하다'든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매우 성하다' 혹은 '인빈의 무덤 자리가
좋다'는 등의 말들이 소문을 통해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왔다. 따라서 대북파와
광해군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 작업은 '신경희의 옥'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다. 이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렇듯 왕권 위협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했음에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정적의 제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적을 양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대북 세력이 조정을 독점함으로써
전체를 균형있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군
원조에 병력을 동원한 탓으로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했던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