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하라
삿7:9~15
오늘 본문 (15)에는 미디안과의 일전을 앞둔 기드온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삿7: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했습니다.
“경배하다” 라는 말은, “엎드리다, 고개를 땅에 묻고 절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모든 일의 계획과 진행을 전적 하나님의 선하심, 그 도우심의 손길을 구하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삶 가운데 돌아가 적용하고 실천하여 행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즉 듣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둔하여 알지 못하고 넘어지고 자바집니다.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도 다시 말씀을 믿고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약속하신 복을 얻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의식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바리새적인 외식 곧 보이기 위한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헤롯의 누룩과 같이 세속의 내 욕심을 얻고 채우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기드온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지금 전쟁을 앞에 두고, 먼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곧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으로 보면, 도저히 게임이 되지 않는 전쟁입니다. 누군가와 동맹을 맺고 맞서도 이길까 말까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전적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미디안 대군과 같은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두렵고 덜리는 도무지 대책이 없는 것 같은 문제들 앞에서 먼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서야 하는지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1. 감격으로 예배하라!
기드온의 지금 상황이 어떠합니까?
삿7:10~11/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기드온에게 부라 라고 하는 부하를 부쳐 주시고 기드온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가 현상 앞에 떨 때, 하나님은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버리시지 않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의지하고 예배할 때입니다./할렐루야!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책망치 않으시고 오히려 안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적들의 진영에 내려가 보니 그 수가 메뚜기 같고, 낙타의 수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적들의 꿈과 해몽을 듣게 하시고 이를 통해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럽고 가슴 벅찼겠습니까? 이처럼 세밀하시고 일일이 감찰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예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듯이 예배는,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한 은혜에 대한 감격을 담아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어떤 현상에서도 믿고 행하는 순종하는 믿음이 동반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삶 가운데 적용하고 실천하여 행할 때, 그 상황이 13만5천의 미디안 군사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적을 만난 상황일지라도, 도무지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김의 자리에 서게 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심은 대로, 일한 대로, 행한 대로 일하시고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좇아 살아가는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도 그 은혜를 체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활력을 잃고 뜨거움이나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로 인한 기복신앙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바른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설이나 장소, 말씀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또한 프로그램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열정이나 뜨거움이 사라졌을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살아가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아도,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아도 먹고 마시고 사는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지도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감격도 없습니다. 그러니 열정이 식어지고 감격이 사라지고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자기만족을 위한 치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나오고 아니면 떠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정작 도우미, 머슴 하나님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하나님의 틀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종교인, 또는 무속신앙, 기복신앙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돌아간 2만2천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좇아 분주하게 세상 풍속을 따라 살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렇게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체험과 재능으로 버티고 살다가 주일이 되면 겨우, 마지못해 교회에 나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데 무슨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며 무슨 기쁨과 만족이 있겠습니까?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고 밥 먹고, 돌아가면 또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는 종교인의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마당만 밟는 종교생활에 빠져서 열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배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리는 것, 받는 것 모두를 실패한 무속적인 종교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적인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종교인의 자리에 맴돌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그 바알의 단을 헐어야 합니다. 아세라 신상을 찍어 불태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배에 대한 관심도 열정도 없습니다.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생활에 지쳐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께 대한 감탄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즉 그 영광, 그 손길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견고히 설 것을 다짐하고 결단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고, 예배라고 드리기는 하는데 세상에 나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힘으로 살아가니까 감탄도 예배에 대한 열정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간탄함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무슨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탄 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감탄합니다. 그래서 종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감탄하다가 하나님께서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아무런 관계없는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2. 영안을 열어야 합니다.
에바다의 은총을 구해야 하고 그 은혜를 덧입어야합니다.
사6:1~3을 함께 보겠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인데,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라고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은 정치, 경제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던 왕이었지만, 그로 인해 교만하여져서 말년에 문둥병에 걸려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마지막에 실패한 왕이 웃시야 왕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갈3:1~3,6/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이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충성스럽고 열정적이던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아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13권의 서신서를 보면 하나 같이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떠나 당시 만연했던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꼬임과, 허구적인 그릇된 복음에 끌려가는 그들이었습니다. 또 할례나 율법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그럴듯한 복음 곧 비진리가 횡행하던 때에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안타깝고 속이 상했으면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했겠습니까?
히13:17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會計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갔다가 보니,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의 왕이 사라진 그 자리에, 영원하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평강이 펼쳐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영원을 봅니다. 즉, 이 땅의 모든 것이, 나의 존재 목적과 가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모두 헛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과 모든 범사의 목적과 가치를 하나님 영광, 하나님 사랑의 재료요, 과정이요, 도구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져야 보입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안을 열고 바라보면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내 일생과 영원을 책임져 주지 못함을 압니다. 그래서 움켜쥐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분토만도 못한 것으로, 배설물로 여깁니다. 오로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에 삶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큰 복을 더하여 주심을 체험하여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축복원리입니다. 깨달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미디안 대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기드온은, 자신의 삶 속에 세미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성령은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속이지 못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그대로 나타내시고 말씀하십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그 전쟁터는 더 이상 공포나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감격하는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매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며 세상 가운데 넉넉히 이김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처소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자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서의 삶입니다./할렐루야! 이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타락하고 혼미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 곧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때, 즉 말씀을 붙좇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삶을 살 때, 그곳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 자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배를 드림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일으켜 세워주시는 은혜가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맛을 아는 성도는 예배에 목숨을 겁니다. 그것이 복 받는 비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병 고침을 받고, 회복의 역사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성공 자들이 다 되셔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복을 받아, 미디안의 대군 앞에서도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영안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고, 또 해마다 성경을 수 십 독씩 했다고, 영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태신앙? 신학박사? 목사이기 때문에? 장로요 권사이기 때문에? 신앙연조가 십 년, 20년, 30년이기 때문에? 새벽기도를 많이 하고, 철야에 금식을 많이 해서?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만나주시고 영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이론적 지식이나 성경적인 지식으로는 여전히 떠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예배를 통하여 열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고, 설교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영적 파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성공하면 세상에서도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구약제사는 동물에게 안수하여 내 죄를 전가하고 죽여 번제 곧 완전히 흔적도 없는 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완전한 나의 죽음선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겠다는 삶에 대한 다짐과 결단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곧 삶인데, 그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회복케 하시는 은혜와 복 주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적인 믿음이 감격으로 승화되고, 깨달음의 그 감동과 감격이 삶 가운데 적용, 실천되어 행함으로써 나타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선포하는 것이 설교요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 세움 받은 자가 설교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의 검을 무디게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칼로 가감 없이 들이대야 합니다. 영적인 수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고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한다고 위하는 척,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음에도 방치하여 죽게 만들면 자기의 양을 맡기신 주님 앞에 서는 날 수치와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황윤리요, 영혼을 유기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기드온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예배의 자세는, 말씀을 들었으면 삶 가운데 믿고 그대로 행하는 곧 선포하고 확신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지식, 계획, 명예, 권세, 돈, 심지어 자아까지 다 내려놓으십시오, 낮아지십시오, 비우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 삶 가운데 복으로 역사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뿌렸은즉 반드시 때가 되매 거두는 것입니다.
삿7:15을 보십시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말씀하심이 현실로 나타남을 체험하고 이스라엘에게 선포합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감격합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선포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넘겨주셨다”고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예배와 삶은 이처럼 뗄 수없는 밀접한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미디안에 대해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떨리지만 그대로 믿고 행했더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역사를 듣고 보게 됨으로써 승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일어나라” 라는 말은 “굼” 이라는 말입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실 때, 회복되어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고, 대체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 같은 암흑 같은 절망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좇으면, 흔들리지 아니하면 주시는 복인 것입니다./할렐루야!
어려움을 만났습니까?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병이 들었습니까?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까? 자녀들 때문에, 혹은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속이 상하고 우울합니까? 예배에 목숨을 거십시오. 거기에 “굼” 살 길이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수요일 날 살피고 있는 막5:41~42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그 체면과 지위를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합니다.예수님은 야이로의 그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셨습니다. /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능으로 할 수없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지금도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내려놓고 진정으로 행하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증거는 반드시 행함에 의한 역사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약2:17, 26에 말씀 하시기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교훈합니다.
또한 약2:20~22에 이르시기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곧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철학, 사상이나 그 어떤 물리적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맹목이나 의식, 추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야이로의 딸을 향해 살짝 손을 대시거나 작은 소리로 “일어나라” 고 하셔도 되는데, 왜 큰 소리로 “달리다굼” 이라고 외쳤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주님께서 막5:39에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 사람들을 향해 선포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보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들을 향한 외침이요 고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들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했으면 들었으면 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면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처럼, 우리들의 막혔던 문제들이, 근심덩어리들이, 걱정이, 병고가 떠나가고 살아나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할!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외쳐야 합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산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붙좇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현상을 바라보지 말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런 복음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목자에게 진정한 회복의 역사, 능력의 역사는 병원에 가서 고농축 링거나 영양제를 맞는 순간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병든 자를 벌떡 세우는 그것이 아닙니다.바로 강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할 때입니다. 이것이 목적이고 먼저입니다. 말도 안되는 보앗네, 들엇네 로 영혼들을 말씀과 상관 없는 곳으로 끌고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ㅇㄹ 선포하고 듣게 하고 행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 주시는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에게 “굼” 이라고 바르게 외치는 자가 바른 신앙인이요, 정직한 목자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굼”을 외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성공 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만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축복을 나누고 섬기시는 “굼”을 외치시는 복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 또 축복합니다./할렐루야!!
왜인지 아십니까? 삿7:15의 기드온의 선포에 혼비백산 합니다.
사단의 속성은, 똥개의 속성과 같습니다. 약해 보이면 덤벼듭니다. 그러나 돌아서 마주하면 “깨갱” 하고 달아납니다.
오늘 삿7:21에서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무서워 파종조차 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세우신 기드온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모든 진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고 영적으로 선포하고 나니, 그 많은 미디안의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망가는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따라 행하는 곧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세상 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가 하면,
환경이 바뀌고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완치되어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될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여 선포하니 새로워지는, 사는 역사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축복이고 능력이고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300명이었던 이스라엘의 수가 수 천, 수만 명으로 늘었기 때문에 “굼” 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김의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 “굼”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또 힘들고 어려운 답답하기 그지없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 같은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좇으면 우리는 “굼”의 복을 받고 또 세상을 향해 “굼”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신 승리의 복, 그 열매를 드리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결과물 곧 형제를 사랑하는 삶의 열매입니다. 행한 행적입니다. 삶의 과정을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적했던 그리고 승리했던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객기, 지식, 교만, 내가 의지하는 돈, 명예, 권세, 사람, 방백,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하나님을 만홀되게 여겼던 종교인의 모습 등등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내게 주신 것 곧 내게 있는 것으로 지금 이웃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까를 물어야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 삶의 현장에서 이를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나는 지금 기드온과 같이 형편 없을지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영적 눈으로 그 요구를 듣고 믿음으로 좇아 행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그때 우리를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축복의 사람으로 우리를 세우시고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배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런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