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사건은 결국 그 문제입니다.
고라는
"왜 당신들만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가?"
를 묻고,
모세는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
고 답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 역시 모세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를 묻게 됩니다.
사실 종교개혁도, 근대 민주주의도, 인권사상도 어느 정도는 이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할 수 있는가?"
"권위는 어떻게 검증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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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그것을 누가 견제하는가?"
사용자의 해석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신앙적 독법에서는 "고라가 틀렸기 때문에 심판받았다"가 결론이고,
정치철학적 독법에서는 "고라는 종교 권력의 정당성을 최초로 질문한 인물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무리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본문을 권력과 정당성의 문제로 읽는 비평적 해석이라고 보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읽을 경우에는 민수기 저자의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해석이라는 점도 함께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나,종교를 막론하고, 지도자에게 권력을 주었거나, 위임했을 때는 따라야 하죠. 그것이 정당하니까. 그러나 그 권력이
잘못주어졌거나 잘못 위임되었을 때는 그리고 잘못 행사되었을 때는 그 권력을 회수하는데는 회수하는 자들에게 많은 사람의
피와 목숨이 요구되죠. 때론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죠.
그 말씀에는 역사와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권력 자체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공동체도 권위 없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가정에는 부모의 권위가 있고,
학교에는 교사의 권위가 있고,
국가에는 정부의 권위가 있고,
종교 공동체에는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있습니다.
문제는 "권위의 존재"가 아니라 "권위의 정당성"과 "권위에 대한 견제"이지요.
그래서 민수기를 읽으면서도 두 가지 시선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신앙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세우셨으니 그 권위를 거역한 고라는 잘못되었다.
두 번째는 역사적·정치철학적 시선입니다.
만약 권위가 정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력 행사였다면, 그것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는가?
사용자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 두 번째 문제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역사에서 권력은 대부분 "신의 이름", "민족의 이름", "국가의 이름",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은 정말 신의 뜻이었는가?"
"정말 국민의 뜻이었는가?"
"정말 정의였는가?"
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그리고 사용자의 지적처럼 잘못된 권력을 회수하는 데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졌고,
종교 권력에 대한 도전은 종교전쟁을 낳았고,
독재에 대한 저항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정치철학자들은 "권력을 주는 것보다 회수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으로 민수기를 다시 읽으면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고라는 단순한 반역자인가?
아니면 정당성 검증을 요구한 사람인가?
성경 저자는 분명히 첫 번째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현대 독자는 두 번째 질문도 동시에 던질 수 있습니다.
다만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이것입니다.
고라의 문제 제기가 옳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옳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정당한 권위에 대한 무분별한 반항도 있었고,
부당한 권위에 대한 정당한 저항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언제 복종하고, 언제 저항해야 하는가?"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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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민수기 16장은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본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선택을 믿고 읽고, 역사가나
철학자는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읽습니다. 그리고 두 관점 모두 인간 사회에서 반복되는 아주 오래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 권위가 잘못되었을 때 누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이것이 사용자가 고라 사건에서
발견한 핵심 문제의식처럼 보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고 애굽의 지도자가 요셉을 잃어버릴즈음 애굽은 요셉의 무리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어려운 노예의 일을
시키게되고 절망에 빠진 히브리인은 삶을 이어나가면서 계획을 합니다. 자신들의 신의 이름조차 히브리인은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아론의 부친은 히브리인의 제사장입니다. 이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게획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죠. 이들은
살기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아기를 보냅니다. 죽을 수도 있고 ,평범한 가정으로 갈 수도 있는데 모세는 바로의 누이인 공주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라면서 공주의 아기로 입양이 되고 애굽의 왕이되는 왕자가 되고 모세는 권력을
갖게되고, 애굽의 비밀을 모두 배우게되죠. 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로 들어갈 수는 없죠. 그는
애굽에서 피신하게되고. 미리암의 가족이 되죠. 공교롭게도 미리암 역시 그들의 제사장입니다. 이곳에서 모세는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입장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히브리인의 제사장에게서
여호와를 배우고, 미리암의 제사장에게서 또한 제사장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사장과 신을 배우게
된 것이죠. 사람이 계획하고 신이 답한 것이죠. 사람의 입장입니다. 바꿔서 신의 입장이 되고 미리암의 신이 아닌 히브리인의 신
여호와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선택은 신이 하고 게획은 인간이 하는 것이죠.
지금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역사"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역사"로 읽는 관점으로 보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출애굽을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용자는 거기에 인간의 측면을 추가하고 계십니다.
즉,
억압받는 히브리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고,
제사장 가문은 정체성을 보존하려 했고,
모세를 살려냈고,
모세에게 교육과 경험이 축적되었고,
그 모든 인간의 노력과 준비 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했다
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사실 성경 자체와 꼭 충돌한다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형들은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요셉은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여기에는 두 층위가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의도로 행동한다.
하나님은 그 행동을 통해 일하신다.
사용자께서 말씀하시는
"계획은 인간이 하고 선택은 하나님이 한다."
는 말도 비슷한 구조입니다.
다만 성경은 보통 인간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고, 사용자는 인간의 역사적 역할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이지요.
제가 특히 흥미롭게 들은 부분은 이 대목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제사장들에게서 하나님을 배웠다."
신앙인들은 보통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모세는 누군가에게 전통을 전달받고 교육받고
배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배경 없이 여호와 신앙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같은 사건도 두 가지 언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언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
역사의 언어:
모세는 민족의 전통과 제사장 집단의 기억을 계승했다.
사용자는 이것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준비하고 하나님이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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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런 구조가 자주 보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든다.
모세는 지팡이를 든다.
여호수아는 강을 건넌다.
다윗은 돌을 던진다.
인간의 행위가 먼저 보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용자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면,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지만, 신앙은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응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고라의 반역도, 출애굽도, 왕정 수립도 모두 단순히 "하나님이 하셨다" 또는 "인간이 했다"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은 그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
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읽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자의 해석은 전통적인 문자주의 해석보다는 역사신학이나 정치신학에 가까운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 문장은 아마 이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네요.
"선택은 하나님이 하지만, 그 선택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과정은 인간의 계획과 행동을 통과한다."
네, 반역자들이 잘못되었다면. 여호와의 믿음을 받지 못했다. 사람으로서 준비가 안되었다. 그러나 실패했더라도. 인간은 그
잘못을 배경으로 또 계획할 것이고 그것은 반복될 것이죠. 이것은 신의 전쟁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유한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가능한 것이죠. 사람이 만들어낸 신은 결국 반역자들의 처음 질문한 그 반역이 정당화 될때까지 그 수고를
할 것이죠. 모세도, 아론도 죽고. 그들의 잘못이나 권위가 다른 반역자들의 옳바른 계획을 만나면 그것은 인간의 세습 방향을
틀기도 하죠.
말씀을 따라가다 보니, 사용자는 단순히 "고라가 옳았나 틀렸나"를 묻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긴 역사적 흐름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즉, 신앙의 문제 이전에 인간의 문제 말입니다.
고라의 질문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질문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당신이 권위를 갖는가?"
"그 권위는 정당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고라와 함께 죽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어도 남고, 아론이 죽어도 남고, 왕이 죽어도 남고, 제사장이 죽어도 남습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반복이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권위가 필요하여 한 사람이나 집단에 권력이 집중되고, 그 권력이 오래되면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도 다시 권위를 갖게 되면 또 질문받게 됩니다.
어쩌면 성경의 역사도 그런 반복을 보여줍니다.
출애굽은 애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사사 시대는 왕권의 부재이고,
왕정은 새로운 권위의 수립이고,
예언자들은 왕권과 제사장권에 대한 비판자들이고,
예수는 성전 권위에 질문을 던지고,
종교개혁은 교회 권위에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권위를 세우고 또 끊임없이 권위를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용자의 이 말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신은 결국 반역자들의 처음 질문한 그 반역이 정당화될 때까지 그 수고를 할 것이다."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표현일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체계라면 결국 인간의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말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면, 오히려 그 비판과 시험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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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도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조차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실수합니다.
아론도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다윗도 죄를 범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를 부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