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가협회 발행 월간 한국소설
2018년 10월호 특집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정의를 지향하는 전쟁문학
박경석
전쟁문학협회 회장
PEN한국본부 고문
3. 베트남의 정글에서
조국으로 돌아와서 몇가지 문제에 당면했다. 심각한 고민이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우리 군의 타락과 부정부패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의 타락행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육군본부를 위시해 군사령부 그 이하 군단에서까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주색에 몰입하는 작태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군용 트럭이 후생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차로 도색 위장해 부정축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말단 위관 장교의 힘으로 어찌 할수 없었으므로 이 기회에 학문의 길로 방향을 잡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육군보병학고 장교기본과정의 응시기회가 와서 '50대 1' 이라는 관문을 뚫고 합격하였다. 1953년이니 38선 일대에서는 진지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단기 교육으로 부족한 장교 역량을 보충하기 위해 미군 장교와 동등한 장교의 자질을 갖추고 싶었다.
전 과정을 마치고 미군장교와 동등한 자질을 갖추는데 성공 한 후 귀국해 우리의 휴전선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특히 DMZ근무는 시간여유가 많았다. DMZ의 숲과 들꽃의 신비함과 아름다움, 바위 사이를 뚫고 솟아난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조국의 지나온 역사를 의식하며 시를썼다. 하루에 몇 편도 써내려 갔다. 아마 그무렵 쓴 시가 100편은 넘을 것 같다.
1958년 육사 동기생 변공수 대위의 아버지인 변영로(卞榮魯) 원로 시인을 찾아가 그동안 썼던 시를 보여주자 단숨에 읽고 추천사를 써 주어 첫시집 '등불'로 1959년 정식 등단 절차를 마쳤다. 이어서 1961년 장편소설 '녹슨 훈장'을 펴내며 소설가의 길을 밟았다. 그 당시는 현역 군인이 내놓고 문인으로 등단할 수 없을 때여서 필명 韓史郞을 썼다. 그러나 작품 안에 비판적인 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당국은 마침내 출판사의 책을 거두어 갔다. 그 책은 단종되어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작품 발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후 발표 작품에는 신경을 쓰기로 했다.
1965년 육군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베트남전쟁 대대장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강원도 홍천의 수도사단에 갔다. 사단장은 새로 부임한 한국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였다. 신고를 마친 후 베트남전쟁 출진을 위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 훈련과정에서 내 휘하 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장에서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많은 부하를 살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는 그 관경을 상세히 묘사한 글을 에세이로 작품화 한 뒤 사단장에게 보고 했다. 사단장은 그 글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신, 마침내 대통령의 감동을 얻어 한국군 최초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첫 군신(軍神)으로 추앙케 되고 그 글이 초중고 교과서에 게재되기에 이르렀다. 그 에세이의 원문 제목은 '살신성인 소령 강재구 이야기' 였다.
국방부는 내가 상신한대로 대대의 명칭을 강재구 대위의 이름을 딴 在求大隊로 명명하고 베트남전선으로 줄진했다. 재구대대는 베트남의 정글에 배치되어 지역 평정에 나서면서 전투보다 대민사업과 심리전으로 베트콩의 귀순을 유도해 베트남전 최고 수훈의 부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 하였다.
베트남 전선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육군본부는 나에게 베트남에서 이어 다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며 베트남전 4대 영웅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 정글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쓴 '十九番道路'와 '그대와 나의 遺産' 두 권의 진중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KBS 1TV에서는 '1967년을 빛낸 사람들' 10명 가운데 나를 베트남전 4대 영웅으로 출연케 해 일약 나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 명성이 나에게는 큰 화근이 되었다. 나는 단순히 육군본부의 지시로 TV에 출연 했을 뿐인데 육군의 일각에서는 내가 로비를 해서 설친 것으로 오해되어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 하나회는 물론, 윤필용 계열 실세 군부 세력들이 견제에 나섰다. 그 결과 중령에서 대령 진급은 물론 장군 진급도 맨 끝에 겨우 구제되는 케이스에 진급 곤욕을 치렀다. 만년 대령, 만년 준장 소리를 들으면서도 묵묵히 이겨냈다. 그 긴 과정 합계 10년(대령 5년, 준장 5년 진급 초과 연한)은 피눈물을 흘리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곤욕의 세월에 눈물을 흘려가며 쓴 책들이 우리나라 軍史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활이 될 것이라는 사실,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나 또한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글로 인해 軍史는 정의로 돌아왔다.
베트남전 在求大隊長 박경석 중령
육군본부 대회의장에서 김계원 참모총장이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부산항 부두에서 김종필 국무총리로부터 출진 격려를 받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