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4년제 정규 장교 양성기관’이라는 당시 사관학교 모집광고는 청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전액 국비지원으로 학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일반 대학과 똑같은 4년제에다 학사 학위까지 수여한다니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그런 만큼 경쟁률은 10대1이 훨씬 넘었다. 1차로 449명을 뽑아 1950년 6월 1일 가입교를 시켰다. 그리고 다시 소양시험을 통해 115명을 탈락시킨 다음 최종 334명으로 정식 입교식을 가졌다. 시험관인 나는 구두시험을 볼 때면 한결같이 ‘공산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응시자의 반공의식을 확인하곤 했다. 이때 공산당 타도에 대해 명백한 논리를 전개한 사람은 무조건 합격시켜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 17세에 입교
한 번은 최종 선발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군의 실력자인 원용덕(元用德·헌병총사령관·중장 예편·작고) 준장의 장남 원창희(준장 예편·작고)도 응시를 했다. 그런데 학과성적이 영 합격권에 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나이도 규정(만19세)보다 두 살이나 못 미처 역시 불합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원용덕 장군의 위세로 보아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합격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했다. 나도 시험관으로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먼저 원창희가 진짜로 원용덕 장군의 아들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만에 하나 그가 원용덕 장군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창희의 호적등본을 떼어 오도록 요구했다. 호적을 열람해 보니 과연 원용덕 장군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나는 ‘장군의 아들이 군인의 대를 잇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므로 학과 점수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합격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 대신 학과 및 구두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도 원창희와 같이 오직 17세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불합격 처리된 박경석(朴慶錫·준장 예편·군사평론가협회 회장)을 합격시켜 주었다. 그로써 하마터면 불합격 처리될 뻔했던 원창희에게도 합격권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합격된 이들 두 사람은 다 장군이 됐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나는 지금도 이들에게서 무한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생도 2기생들은 입교한 지 25일 만에 6·25전쟁에 참전함으로써 개전 초기 3일 만에 생도의 25%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 무렵 생도대대가 수원에 있을 때 원창희 생도는 용감하게 싸웠고, 특공대 모집에도 제일 먼저 자원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는 전방 부사단장을 끝으로 예편했으며 끝까지 명예를 지킨 훌륭한 군인이었다. 박경석 장군 역시 6·25전쟁 당시 소대장·중대장을 거쳐 월남전 때는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在求大隊長)으로 참전했다. ‘재구대대’는 고(故) 강재구(姜在求) 소령의 이름을 따서 만든 부대 명칭이다. 한국시문학평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경석 장군은 남달리 독특한 군사관을 갖고 있다. 군 출신으로서 군의 행태를 무조건 감싸고 도는 그런 식이 아니라 잘못된 점은 비판할 줄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 시대의 불행에 장성 출신인 자신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나라위한 장군의 길 보여 줘 보람
그는 한 국가의 장군을 세 부류로 나눈다. 꼭 필요한 장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군, 있어서는 안 될 장군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장군’은 후대를 위해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군사관(軍史觀)이다. 지난 격동기 때 대통령 전기작가로 지명되고도 집필을 거부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4성 장군의 회고록 감수 요청도 정중히 사양했다. 자신의 작가정신에 비춰 볼 때 그들의 행적은 후대에 별 교훈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평소 바른말을 잘해 사단장에 못 나간 데 대해 지금도 아쉽게 생각한다. 사진설명:파월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이었던 박경석 장군.
첫댓글이 글을 쓴 박정인 장군은 육사 6기생으로 임관했다. 그는 노환으로 2016년 연초 별세했다. 강직하고 반공정신이 뚜렸한 참 야전지휘관이었다. 3사단장 재직시 북한군의 총격에 맞서 즉각 포사격으로 응징, 상급 사령부의 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전역조치됐다. 그는 육군에 많은 일화를 남겨 나는 그를 '풍운의 별'로 호칭했다.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 은 내가 집필 감수했다.
첫댓글 이 글을 쓴 박정인 장군은 육사 6기생으로 임관했다.
그는 노환으로 2016년 연초 별세했다.
강직하고 반공정신이 뚜렸한 참 야전지휘관이었다.
3사단장 재직시 북한군의 총격에 맞서 즉각 포사격으로 응징, 상급 사령부의 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전역조치됐다.
그는 육군에 많은 일화를 남겨 나는 그를 '풍운의 별'로 호칭했다.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 은 내가 집필 감수했다.
그런 기막힌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장군님이 육사에 입교가 된 것은..
차라리 하늘의 뜻입니다.
월남전에서 재구부대를 틀어잡고 4대 영웅이 된 것도..
어쩌면 타고난 운명이고..
차갑게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지략은
영원한 전사의 귀감이 될것입니다.
(``백명의 적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어쩌면,,,,?
다 대수의 국민들은,
채명신 사령관님의 단독적인 지략으로 알고 있기도 할겁니다.
육 해 공군..삼군 사관학교 뿐이 아니라...
부사관을 포함한 모든 군간부 양성기관에서
배움의 과목에 잊지 말아야 할..
순 한국산 지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군님을 깊이 존경하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확실하고도 통쾌한 명령을 내리고..
적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던 박정인 장군님..
그 분의 옷을 벗긴..
못난 조국...!
저는 잠깐이지만..
미워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울먹이는 참모들을 다독이며..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명령이었다고
퇴역사를 마감하신 위대한 장군...
백골 3사단의 영원한 자랑과 전설일 것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늘 격려 덕분으로 계속 봉사의 힘이 솟아납니다.
이 글 내용 중 '대통령 전기 작가로 지명' 에 대해 많은 네티즌들의 질문이 있어 밝힙니다.
내용 가운데 '대통령'은 '전두환'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펙트이기 때문에.
먼저 요나가 제기한 박경석은 내가 아닌 朴敬錫(동아일보 기자 출신 전 국회의원)으로 확인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