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장인들의 삶이 그렇듯, 수고로움과 섬세하고 꾸준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고단한 일. 그래야만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앉은 모든 상처와 흔적들을 비로소 지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인의 길은 어렵다. 지류문화재를 다루는 배접은 빛을 잃어 가는 그림과 서책들에 다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림이나 글씨에 종이와 비단을 붙여서 미적 가치를 더하는 표구와 구별된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병풍장이나 책장이라는 장인이 있었다. 하지만 표구를 포함한 그 일들도 결국 ‘배접褙接’이라는 행위가 미치지 못하면 헛일이 될 만큼 배접은 중요하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덧붙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이 일 여하에 따라 애써 그리거나 쓴 서화가 얼마나 오래가느냐가 결정되고 그 문화적 가치도 덩달아 높아지기 때문이다 시커멓게 먼지가 앉은 불화佛畵와 색이 바래 너덜너덜한 영정影幀. 우리 주변에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나날이 훼손되는 지류문화재가 많다. 이처럼 훼손이 진행 중인 지류문화재를 복원하고 수리하는 기술이 바로 배접이다. 배접장은 이런 지류문화재를 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배접의 배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등(背)에 옷(衣)을 입힌다는 뜻이다. 따라서 배접을 그림 뒤쪽에 종이 한 장 붙이는 것쯤으로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업과정은 그리 녹녹치 않다. 특히 국가 지정문화재를 수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작업의 연속이다. 배접장들은 배접을 배우기 위해서는 칼 가는 것만 2년, 풀 쑤는 것만 2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배접이 필요한 지류문화재의 경우 적게는 몇 십 년에서 많게는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썩고 닳아서 손만 닿아도 부서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김표영 옹 바로 그가 이러한 일을 하는 중요무형문화재 102호 배접장이다. ‘중요무형문화재 102호 배접장 전수관’이란 현판이 붙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1백 평에 조금 못 미친다는 실내에 가득 차 있는 괘불이 바닥에 펼쳐져 있다. 하얗게 샌 머리숱만 아니라면 일흔여덟이란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고운 얼굴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우선 김표용 옹이 중요무형문화재 102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25년생인 김표영 옹이 열네 살을 넘어설 무렵 당시 사촌 매형은 청주시내에서 표구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너나 할 것 없이 머리가 굵어지면 일을 하던 때라 그도 표구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2~3년을 보냈다. 어깨너머로 배운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전쟁이 발발했다. 전란 후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서울 인사동에서 ‘박당표구사’를 운영하던 김용복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1년여 배접褙接일을 배웠다. 김용복 선생은 일본의 표구기술이 범람했던 당시 전통 기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몇 안 되는 배접 명인 중 한사람이었다. 스승의 도움으로 박당표구사 건너편에 ‘영일표구사’를 차렸다. 그 후 25년을 인사동 토박이로 살았다.
김표영 옹이 지류紙類문화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60년대 초 문화재관리국이 생기면서 문화재 복원 일감이 간혹 나왔는데 일감을 받으려면 신청서류가 복잡했다. 또 주문은 까다롭고 일을 끝내도 큰 이문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업자들이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여건은 그에게 국가지정문화재의 복원 실적을 쌓아주는 계기가 됐고, 이렇게 누적된 실적은 1972년 그를 지정문화재 수리기능자로 만들어 주었다. 1980년 문화재관리국이 발주해 송광사에 보관 중이던 <묘법연화경> 등 보물 다섯 점을 보수한 것은 이후 사찰 소장 지류문화재의 보수를 전담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작업 모습을 눈여겨보셨던지 보성 스님(조계총림 방장)은 주지직을 맡고 있던 1985년,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던 불화 20점을 보수해 달라고 연락을 했다. 보성 스님은 이어 불모佛母 석정 스님과의 인연도 맺어 주었다. 1980년대 말 석정 스님은 전국 사찰에 산재한 불화를 사진에 담아 책으로 펴내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높이 벽에 걸린 불화를 내려놓으니 닳아서 부서지고, 갈라지는 등 훼손이 너무 심했다. 결국 책 제작에 앞서 훼손이 심한 불화의 복원을 시작했고 이 때도 일감은 그에게 돌아왔다. 이후 석정 스님과의 인연은 서로가 갖고 있던 불화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남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간된 책이 바로 ‘한국의 불화’이다. 생애 중에 60여 년을 배접 일, 특히 성보문화재에 파묻혀 살아온 만큼 화엄사, 해인사, 동화사, 선암사, 범어사, 통도사 등 이름난 사찰 중에 그가 가보지 않은 사찰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다니며 복원한 국보급 지류문화재만 2백 여 점.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언제부턴가 사찰을 찾으면 가장 먼저 대웅전을 들르게 됐고, 틈날 때마다 <법구경>을 즐겨보게 됐다는 김표영 옹. 그래서인지 그는 몇 년 전 무악재에 있던 아파트를 팔고 은행에 융자까지 내어 이곳을 마련했다. 7평 남짓한 갈현동 가내공장은 비좁은 것은 둘째치고 보안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전 후에 14미터가 넘는 무량사 괘불과 안성 칠장사 등 괘불 수리가 잇따르고 있다. 공간이 넓어 작업이 그만큼 용이해진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이전을 하게 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큰 괘불의 복원을 할 때는 사찰에서 가장 큰방이 필요한데 이런 공간이 잘 없을뿐더러 사찰에 행사가 있거나 많은 손님이 올 때는 방을 써야한다며 치워달라는 말을 들어야 했단다. 배접을 하고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것을 말아서 치우려면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이럴 때면 배접에 대한 불자들의 시각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단다. 배접이란 서화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족자와 액자 병풍을 만들어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이는 전통적인 서화 처리방법이다. 흔히 ‘표구’라고 부르는데 표구는 일본식 표기. 배접에 필요한 재료는 풀 한지, 비단, 목재, 축, 축머리, 장식, 등황, 먹 등이다. 이 중에도 풀과 종이는 가장 중요한 재료. 특히 국보급 문화재의 수리에는 10년 이상 삭힌 풀을 써야한다. 밀가루로 풀을 쑤어 담아놓으면 독소가 빠져나오게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물을 갈아 주다보면 풀이 녹말로 정제된다. “제대로 만든 물을 쓰지 않으면 장마철이나 습기가 찰 때 곰팡이가 피는 것을 면할 수 없어요.” 김표영 옹은 이렇게 정제된 풀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국보급 문화재 보수에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이의 경우도 마찬가지. “요즘 외국 종이가 많이 들어오는데 우리나라의 순수한 닥종이 품질이 최고예요. 기존에 양건지(불 대신 햇볕으로 말린 종이)를 많이 썼는데 요즘에 와서는 백토지를 많이 사용합니다. 백토를 섞어 만든 종이는 좀이 먹지 않는 장점이 있지요.” 붓글씨를 쓸만한 크기의 한지 한 장 가격은 만원을 넘는다. 큰 괘불의 경우 복원기간이 6개월에서 1년까지 소요되고, 보통 여섯 번에서 열두 번의 배접을 하기 때문에 한지가 2천장 이상 들어간다. 여기에 깃들여지는 정성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불화는 재질에 따라서도 수명이 달라진다고 한다. 뒷면을 명주로 사용한 불화의 수명이 1백년이면 삼베로 제작한 불화의 수명은 두세 배에 달할 정도로 길단다. “오래된 불화나 괘불을 뒤집어 후광 등에 사용하는 녹색 부위의 훼손이 특히 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옥색 안료를 만들 때 구리의 녹과 석재를 섞어 만드는데 여기에 독성분이 들어 있어서 엷게 사용해도 오래되면 부식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