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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국악로 5’의 아파트에 40여 년째 살고 있다. 요즘같이 변화가 빠른 시기에 긴 세월을 한 곳에서 살고 있다면, 내가 생각해도 쫌 그렇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실은 그때와 지금은 엄청 변했다. 경계선으로 치면 옛 유솜(USOM) 자리에 들어선 국립국악원이 2차선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요, 주한 미군(美軍)의 주둔지였던 하이야리아 부대가 2014년에 14만 평의 시민공원으로 바뀌었다. 10차선으로 변한 도로만 건너면 된다. 옛날 어른 말씀처럼 진짜로 ‘엎어지면 코 데이는’ 거리다.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 들락거리고 있다.
금년에는 이 안에 ‘부산 콘서트홀’이 새로 개관했다. 국제적 음악 공연홀이다. 할멈의 얘기처럼 늘그막에 노인들의 ‘문화수준을 높이기’는 딱 좋은 환경이 되었다.
공연 전의 모습
벌써 국내 유명 오케스트라와 가객(歌客)들의 공연이 여러 번 있었다. 듣기로는 관객들은 거의가 서울서 내려온 분들로 부산 사람들은 입장권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고, 그 때문에 1km 거리에 있는 부전역을 복합쇼핑몰로 리모델링하고 KTX나 SRT가 출착(出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가족들도 한 번 새 아파트로 옮겨보자는 얘기들이 있어 여러 차례 시도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답사를 해보니 여기만한 곳이 없었다. 분양 당시 30평이 지금은 40평짜리도 그 구조나 쓸모가 미치지를 못 했고 교통 또한 그랬다.
「아파트가 좋으냐 단독주택이 좋으냐는 논쟁을 할 때, 아파트에 살면 편하고 단독주택에 살면 불편한 게 많다. 이런 것은 기능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와 단독주택에 사는 사이에 내 개성이나 삶의 방식이 어느 쪽이 더 아름답게 표현되느냐 하는 것이 어느쪽이 편하냐 편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 보다 인간의 심금(心琴)으로는 더 높다는 말이다. 기능적으로는 불편해도, 심지어 옳지 않더라도 그것이 내 삶을 구현하는데, 내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추구되는 단계가 있다. 아름다움에 눈을 뜬 단계가 훨씬 높은 단계이다.」고 한 철학자의 얘기를 들었다. 백 번 옳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나와 가족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얘들이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이 아파트는 기념관으로 하자.”는 말들을 보면 걔들도 느끼는가 보기도 하다.
2008년 가을이던가? 부산국립국악원을 착공한 이후 소음, 먼지 등이 불편하다고 아파트에서 반대 데모도 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중지할 리는 만무하고 아파트 마당바닥을 재포장 해주기도 했고, 개원(開院)할 땐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무료 공연초청장이 와서 구경한 적이 있었고 돈 내고 구경한 적도 한두 번 있었다.
금년에 개관한 부산콘서트홀도 그려러니 했는데 소식이 감감했기에 아직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매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고 있었다. 입장권도 수월찮은 수준이지만 순식간에 매진된다고 했다.
큰 딸애가 음악을 전공했기에 가족들이 가끔 좋은 공연이 있을 때 관람하고 가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어중간하면 내 집에 들러 차나 과일이라도 다시고 간다. 단, 들릴 땐 빈손으로 오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소주병에다 족발 안주까지 곁들여 갖고 오니, 이 또한 ‘문화수준 높이기’와 더불어 집 가까이에 콘서트홀이 생긴 덕분이 아니겠는가.
“난 아직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고 투덜댔더니, 눈치를 긁었는지 입장권 2장을 구해 와 엊그제 함께 가보았다. 공연 이름이 「백건우 피아니스트와 이 무지치」라고 했다. 하도 외국말이 판을 치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 한다.
이 무지치? 꼭 옛날 우리 할머니들의 이름 같기도 했다. 벌써 70년이나 더 된, 1951년에 로마 출신이자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지휘자 없이 운영되는 독창적 챔버 오케스트라 이 무지치(I Musici : ‘음악가들’)를 창단했으며, 특히 비발디의 <사계>의 전 세계적 인기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안내장에 나와있었다.
공연 준비를 하는 이 무지치 챔버 오케스트라
그래도 영화관 가는 것도 아니고 얼마간은 수준을 맞춰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옷차림도 고려했다. 늘 겉만 보다가 처음 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감개가 무량이었다. 전체 관객석이 2,500여 석이라는데 이번에는 공연장 뒤쪽을 제외한 앞쪽의 객석이었다.
달걀을 바구니에 담았듯이 무더기 무더기로 나누어 관객들을 아담하게 실었다. 정면 전체를 차지한 파이프오르간 시설이 웅장했다.
관객들의 관람 자세 역시 여간 수준이 않음에도 놀랐다. 팔 하나 움직여도 눈에 드러난다. 그런데 가끔씩 각 출입문 담당 안내양의 움직이는 것이 눈에 몹시 거슬리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공연 중 폰으로 사진 찍는 무례한 자(?)들 때문이라고 했으니 역시 아직은…… 하는 느낌이었다.
장애인과 노인이라고 할인해 준다더니 좌석도 맨 꼭대기였다. 괜심한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게 웬 떡이냐’는 기분이었다.
정면의 파이프오르간과 객석들
거의 다 차다싶이 한 관객 가운데 넥타이 차림은 한 사람 보았다. 그리고 실내에서 여성들이 반 팔 차림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한때 영국에서 연극을 구경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큰 차이라 하겠다.
나 같은 청각장애인에게 오케스트라는 마치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와 같지만 그래도 한 번은 들어가 보자는 욕심에서였는데, 소리도 그렇지만 막상 연주 모습에 취해 실눈을 뜨고 내려다 보니 홀 전체가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가 최고령 관객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현(絃)을 문지르는 활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가늘고 약한 소리부터 우장창 높은 소리까지 낼 수 있는지? 감탄의 연속이었다. 너무 멀어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연주자들 가운데는 연령이 적잖이 높아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평생을 악기 하나에 바친 이력들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듯했다.
백건우 피아니스트! 중학생 시절부터 들어왔던 이름인데 먼 빛이지만 처음 실물(?)을 봤다. 80 고령에도 두드리는 건반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힘차고 간지럽다.
근 반세기 전 ‘히로시마마루(宏島丸)’의 선장 때의 일이다. 영국의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스 사이에 대서양쪽으로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의 만(灣)이 브리스틀 해협(Bristol Channel)이다. 이 해협의 웰스 지방의 끝부분에 밀퍼드 해븐(Milford Haven)이란 조그만 포구(浦口)가 있다. 그야말로 작은 어촌이다. 여기로 가라는 오더(order)를 받았다.
밀퍼드 해븐항과 주변의 도시들
1977년 11월 29일 새벽 4시 30분에 외항에 닻을 내렸다. 도착을 알리기 위해 항만국을 부르자 VHF(초단파 무선전화)에서 모 없이 굴러 나오는 아가씨의 상냥한 음성이 긴 항해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06:00시에 Pilot(도선사)가 나와 접안 한다고 알려준다. 새벽의 찬 공기에 입술이 텄다. 일반 부두가 아니고 간만(干滿)의 차를 고려해서 만든 갑문식 dock(선거:船渠) 였다. 좁은 갑문을 겁도 없이 밀어붙이는 도선사(導船士)가 믿음직스럽다기 보다 미울 만큼 곡예를 연출, 겨우 10시에 접안했다. 찬 바람속에서도 진땀이 났다. 애선(愛船) 히로시마마루(宏島丸)가 들어가기에는 좁은 곳이었다. 아침 10시인데도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는다.
건선거에 접안 중 지방 신문인 'Western Telegraph'에 실린 기사(흰선이 본선). 아래 영어로 된 기사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 "밀포드 갑문(閘門) 부두에 정박한 역대 최대 규모의 선박 중 하나가, 헐(Hull)사(社) 냉동 트롤어선 2척으로부터 고등어를 받아 싣고 있다. 3,600톤급 냉동운반선 히로시마 마루는 어제 도착했으며 다음 주 초까지 부두에 정박할 예정이다."
11시부터 작업은 시작되었다. 내게는 자유시간인 셈이다. 위도가 북위 51.5도니 엔간히 올라왔다고 생각되지만 조석(朝夕)으로 낮과 밤의 구별이 어려웠다. 한창 낮이 짧은 동지(冬至) 직전이 아닌가! 추위, 습기, 비, 바람, 짧은 낮과 긴 어둠의 시간, 그러면서도 아늑해 보이는 거리의 풍경과 교외의 목장과 새파란 잔디들! 따뜻한 해류의 덕분이리라.
규모는 작지만 역시 해양국답게 갯가의 구릉지대를 최대한 이용하여 부두 시설과 마을을 만들었다. 마침 시내 ‘TORCH’란 극장에서 ‘넬슨과 에마(Nelson & Emma)’라는 제목의 연극을 하기에 동행한 1등항해사와 들어가 보았다. 오랜만의 연극 구경, 새삼스러웠다. 연기자보다 현란한 조명들이 더 큰 역할을 한다. 꽉찬 관객 전부가 300여명, 그러나 동양인이라고는 나와 손◯하 일등항해사 둘 뿐이었다. 놀란 것은 낮에 시내에서는 정장한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모두가 까만 양복에 넥타이를 맸고 부인들도 예의복 차림이었다. 그것도 아무리 못 되도 20년은 더 됐을 법한 낡은 패션의 옷이지만 깨끗하게 손질했다. 겉옷은 모두 라운지의 보관소에 맡기거나 걸어두고 입장했다. 밖은 겨울인데도 부인들은 거의가 반팔 차림, 객고가 심한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했다. 우리는 모로코산 씨커먼 가죽 잠바 차림이었는데…… .
민망스럽기를 넘어 남사스럽기까지 했다. 이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 수준의 차이인가도 싶었다. 헛기침 소리 하나 없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된다. 몸을 꿈쩍거리기만 해도 잡음이 일 것 만 같았다.
입장할 때 주문한 맥주 2잔을 중간 휴게 시간에 찾아 마셨지만, 내 돈 주고 들어간 극장에서 내가 미안한 감을 가진 것도 처음이다. 어쩌면 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진다.
또 하나는 입장할 때,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이어폰(earphone)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당시로선 듣도 보도 못 한 것이었기에 그냥 입장했었는데 중간에 옆에 앉은 관객에게 살짝 빌려 껴 보니 분명히 소리가 약간은 크게 들렸다. 얼핏 말도 다른 듯 했다. 당시는 그게 뭐하는 것인지도 몰랐으니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제 저녁 콘서트홀에서 내게도 비슷한 거 하나 주었더라면 가늘고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반 본전은 건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넬슨(Nelson)과 Emma(에마)’에서, 넬슨는 역사적 인물인 영국의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었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남은 분이다.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높이 서 있는 그의 동상에는 오른쪽 팔이 하나 없다. 스페인 테네리페 해전(海戰)에서 작전 중 적탄에 맞아 잃은 것이라고 했다.
에마(Emma)는 에마 해밀턴(Emma Hamilton)으로 넬슨 제독의 연인이나 ‘세기의 불륜커플’ 이란 스캔들로 유명했으며 둘 사이에 딸 호레이샤 넬슨을 낳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Milford Haven과 Nelson이 무슨 인연이 있는 듯도 했지만 확실한 건 지금도 모른다. 영어 대사(臺詞)는 들려도 알아 묵을 수 없었기에 그림책 보듯 했지만 연극의 재미는 만끽한 셈이다. 아니 요즘 말로 ‘감동 먹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영국 런든의 트랄팔카 광장에 있는 넬슨의 기념탑(빌려온 사진)
이곳 대리점(Agent) Mr. David Clack 집에 초청을 받았다. 그의 Italy인 부인이 수월찮은 미인이었다. 한국인형을 갖고 있었다. 진선미(眞善美) 그리고 인형의 옷 속에 ‘福’자와 ‘壽’자의 뜻을 물었다. 남편과 한 직장에서 일하며 첫 애기를 가진지 4개월째란다. 도톰한 복부의 모양이 한층 향수를 자아내게 했다. 바깥보다 훨씬 질이 높은 실내, 각종 가전들이 돋보인다. 일본제 화병 한 개를 선사했다.
저녁에는 젊은 일본인 통신사 스가하라(菅原)군을 데리고 밤차를 타고 두 시간 거리인 스완지(Swansea)에 가서 삼등 여인숙 St. Helens House에서, 먹을 것을 찾아 꼬물거리는 생쥐와 한 방에서 보내기도 했다, 출렁이는 흰둥이의 고고리듬의 물결. 다만 색깔만 희달뿐 아프리카 Warri의 그것과 같았다.
영국! 고위도 지방이지만 생각보다 그리 찹지는 않으나 짧은 낮에 햇볕을 볼 수 가 없는 겨울이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와 시골과의 격차 없는 생활 수준. 그리고 파랗게 자라는 목초 위에 유유히 풀을 뜯는 얼룩소 떼와 면양과 말들! 그 숱한 야산을 온통 메우고 있던 아담한 목장들의 인상은 어느 곳 보다도 강한 것이었다.
한때는 세계를 제패했었지만 지금은 등외국으로 물러났다고는 해도 그 축척된 부와 규형잡힌 생활의 기틀은 결코 쉽사리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러 파해쳐 놓은 곳 이외는 맨흙은 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만들었다. 정갈하게 포장된 길목 곳곳에 서 있는 이정표, 그리고 야산 속을 헤집고 꼬불꼬불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그 주위에 우거진 잡목 숲들은 곧 표본이 되고 있다. 언젠가 여름철에 한 번 더 와서 저 깊숙한 숲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어둑한 뒷골목도 뒤져보고 싶은 곳이었다.
어느 항구이든 입항 중일 때면 늘 차분하지 못하고 왠지 들뜬, 그래서 한 쪽의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한 줄의 일기도 쓰지 못하던 그 얄궂은 버릇이 여기서도 예외없이 실행되었다. 아무리 둘러봐야 내 것이 없고 내가 갈 곳도 없는데 왜 내 자신을 잃고 우왕좌왕했을까? 다만 같은 인간이 사는 곳일 뿐인데…….
인간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하는 짐승이기에 이러한 안정되고 풍요한 분위기에 젖으면 정신이 헤까닥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경황없이 멍하게 보낸 9일간이었다.
새벽 2시 Milford Haven Dry Dock 좁은 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다시 아프리카 황금해안을 향해 새로운 모험과 기대를 안고 항해 길에 오른 것이 12월 8일이었다.

첫댓글 좋은 터에 오래 사시는 것도 복인데 콘서트홀과 가깝다니 금상첨화입니다.
공연을 자주 보시고 신선같이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사실 가보니 좋데요. 월말에는 조수미 성악가의 무대가
있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네요. R석이 12만원이라는데 온 돈 내고 반 밖에 못 들으니
그것도 억울하고.... 그렇슴다. 할멈은 "나야 좋지요" 하니 약만 오르고
어쩔거나 고민중임다. ㅎㅎㅎ 건강하세요. 부산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 간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요.
귀멍멍한 노인이 음악회에 간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방콕 탈출. 행복해 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