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전 상서
이재영
이융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주 중안 국민학교 53회 제자 이재영입니다.
선생님께서 1962년에 저희 남녀공학 5학년 5반 담임을 맡으셨고, 6학년 때도 급우 60여 명 그대로 변동 없이 올라가 가르쳤습니다.
매주 4학년 이상 반장과 부반장이 모여서 ‘풋과일을 먹지 말자’ 같은 주간 생활 목표를 정하는 임원 회의에서, 제가 전교 어린이회장에 뽑혔습니다.
“재영이는 고무줄도 끊지 않고 착합니다.”라는 구복자의 지원 연설 덕분에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부반장 복자를 미리 불러, 제 찬조 연설을 하라고 시키셨더군요.
그런 줄은 결혼 후에 아내인 복자에게서 들었습니다. 복자는 부산에서 저하고 같은 대학교의 간호과에 다녔습니다.
저는 전자과를 나와 대기업 계열사 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회사가 고향 진주에서 천 리나 멀리 떨어진 경기도 오산에 있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아버님이 교장 선생이었고, 저를 마흔 중반에 낳아서, 사친회에 오신 제 어머님도 연세가 오십 중반 쪽 찐 머리 할머니였습니다.
누님 셋 밑으로 태어나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컸지요. 그래도 가정교육은 제대로 받고 자란 모범생이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님께서 저희를 세 번째로 담임 맡으신 줄로 아는데, 아마도 선생님의 학습 지도력이 탁월하여 일찍 고학년 담임이 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5학년 2학기 중반쯤에 장학사님을 모신 학습발표회가 있었는데, 우리 반이 학교 대표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는 6개 분단으로 나뉘어 선생님 지시대로 시청, 호국사, 향교, 도립병원 등으로 흩어져 관계자분을 만나 물어보고 자료를 수집했지요.
돌아와서는 공책에 적은 내용을 모으고 정리해서, 각 분단장이 모조지 전지에 크레용으로 쓰고 그림도 그려 넣어 차트를 만들었지요.
장학사님을 모신 날, 교실 뒤에 교장, 교감, 교무, 5학년 담임들, 사범학교 졸업반인 우리 반 교생실습생 3명까지 온통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단장들이 차례로 교단에 올라가서 지휘봉으로 차트를 짚어 가며 분단 학습 발표를 했습니다.
복자가 발표할 때 제가 손을 들고 “저기, 기타 등등에서, 기타가 뭡니까? 손으로 퉁기는 기탑니까?”라고 짓궂은 질문을 했는데, “문디 자슥!”이라는 복자의 답변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었지요.
장학사님과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은 학습발표가 끝나고, 강당에서 장학사님과 선생님들만 참관하는 학예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반 여학생 5명이 발레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친구 몇 명과 강당 창문틀 아래에 붙어 서서 까치발을 하고, 창틈으로 몰래 들여다봤습니다.
무대 위에서 하얗고 짧은 발레복을 입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나비처럼 무용하는 복자가 어찌나 예쁘던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러고는 괜히 성이 나서, 돌멩이를 걷어차고 속으로 장학사를 욕하며 씩씩거렸답니다.
그리고 5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음악 시간에 하모니카를 가져와서 불 줄 아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랑 몇 명이 들었는데, 저는 나가서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라는 ‘원일의 노래(최무룡)’를 베이스 넣어가며 불어 박수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노래 잘하는 20여 명이 뽑혀서 방과 후에 피리와 하모니카 연습을 했고, 한 달쯤 뒤 저녁녘에 촉석루 광장에 새로 들어선 라디오 방송국에 갔습니다. 서울에서 전학 온 4학년 남학생이 노래를 특출하게 잘 불러 함께 가서 독창했습니다. 독창, 합창, 악기 연주를 섞어서 방송한 겁니다.
그때가 1962년이었으니까, 저희는 선생님 덕분에 만 10세에 아이돌이 된 셈입니다.
“빨간 꽈리 입에 물고 뽀드득 뽀드득, 동글동글 굴리다가 뽀드득 뽀드득. 꽃밭에다 물을 주자 뽀드득 뽀드득, 앞마당에서 꽈리를 불면 병아리들이 모여와서 듣는다. (읍) 병아리야 너희들도 빨간 꽈리 불어보고 싶으냐?”
지금은 노래 제목도 잊은 그 합창이 80m 높이의 송신 철탑 안테나에서 멀리멀리 진주 시내를 넘어 진양군까지 울려 퍼졌을 겁니다. 우리는 생방송 하느라 듣지도 못했지만요.
그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서, 6학년 때는 학습에만 정진하고 학교 행사에 더는 참여하지 않았지요.
60여 명의 철없는 학급 동무 조무래기들은 훌륭한 선생님의 자상한 가르침 아래 세상모르고 뛰어놀며, 나날이 즐거운 시간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때 전교생이 3천 명을 넘어, 운동장이 두 개나 되었고, 교사 건물도 3개 동이었습니다. 교문 옆 좌우 1층 목조 건물 1학년은 14개 반으로 오전 오후 교대로 등교했고, 큰 운동장을 지나 신축 본관 시멘트 2층 건물의 우측 1층이 5학년, 뒤쪽 작은 운동장 끝의 2층 목조 건물 위층이 6학년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새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셨는데, 가끔 우리에게 기름 헝겊으로 자전거 세척을 시키고, 탈 줄 아는 아이들은 운동장 한 바퀴씩 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도 교육대학교 운동장에서 간혹 오시는 사촌 자형 자전거 빌려 배웠던 솜씨로 아슬아슬하게 뽐내며 돌았습니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 체력 종목에 턱걸이가 있었습니다. 턱걸이는 10개가 만점인데 학년 초에 겨우 두서너 개밖에 못 했습니다.
저는 집 울타리 나뭇가지 사이에 철봉을 걸고 매일 연습했고, 시험 당일에 배치기로 10개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시험문제 국어시험 사지선다형에서 “나비는 훨훨 요걸 못 잡아? 아가는 숨이 차서.”라는 문장의 ‘숨이 차서’와 같은 뜻을 가진 문절을 “달이 차서”, “기가 차서” 등의 답 중에서 고르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잘못짚어 한 문제 틀리는 바람에 전체 9등으로 입학해서, 톱을 바랐던 선생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선생님으로 인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5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시작 직전에 성적표를 나눠줬습니다.
시험 본 점수로 평가되는 학습 발달사항은 과목마다 수·우·미·양·가로 매겨지고, 선생님이 평가하는 행동 발달사항은 가·나·다로 매겨집니다.
1학년부터 줄곧 반장을 해온 제 성적표는 어쩌다 ‘우’가 한두 개 있을까 말까였고, 행동 발달사항은 항상 ‘가’ 뿐이었기 때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행동 발달사항 ‘인내심’ 난이 ‘나’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혹시 잘못 쓰였나 싶어 아무리 들여다봐도 분명히 ‘나’였습니다. 창피한 말씀입니다만, 5학년 반장이라는 게 그때까지 인내심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이거 큰일 났다. 아버지한테 어떻게 보이고 도장을 받나? 교장 선생인 아버지 체면을 봐서라도 ‘가’라고 적어주시지 않고, 선생님도 참!‘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날 하굣길의 책가방은 왜 그리도 무겁기만 하던지요.
“인내심이 뭡니꺼?”
아버지께 성적표를 드리고 아예 무릎 꿇고 앉았지요. 내 꼴과 성적표를 들여다보시던 아버지가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을성이 조금 모자란다는구나.”
그날 이후로 저는 평생을 인내심 ‘가’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성장하면서 화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성적표를 떠올리며 참았고, 어른이 되어 여러 번의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인내심 ‘나’를 되뇌며 조급함을 자제하고 극복해 내었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때 선생님의 생각은 솔직했고, 그대로 ‘나’라고 적으신 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누님 셋 밑의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란 저의 염려되는 성정머리를 미리 예견하시고, 일찌감치 교훈을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는 매 학기 성적표의 인내심 난은 ‘가’였지만요)
가끔 스승의 날이면 문득 아내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진주에 계신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이제껏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저희도 은퇴한 칠순을 넘었고, 선생님께서도 팔순을 넘으셨는데, 더 늦기 전에 내년엔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뵙게 될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편히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못난 제자 이재영, 구복자 올림.
< 『남강문학회지』 2023년 봄호 등재 예정 >
첫댓글 참 귀한 인연입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던 복자님과 백년 해로를 하고 계시다니...
네, 난정 작가님.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던 11살 때를 기준으로 하면 꼭 60년, 반백년 넘었습니다. ㅎ
그것도 5학년 초 3월에 전학을 와서, 선생님 따라 교실 문을 들어서는데, 연분홍 원피스 입은 귀티 나는 모습에 그냥 필이 팍 꽂혀버렸습니다. ㅎ
반장이라 혼자 일어서서 "차려! 선생님께 경례!" 하면서 폼 잡았지요. ㅎㅎ
두 분은 복받으신 분이십니다.
저도 6학년때 반장 남학생을 무척 좋아했었던...
우리는 1년 내내 한마디도 못하고 서로 바라만 보았답니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이름!
그는, 쟁쟁하던 서울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에 진학하였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었는데..
얼마전 초등 동창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아주 세계적으로 이름이 거론될 만큼 유명인사가 되어 있더라구요.
첫사랑을 제대로 골라 좋아했던것 같습니다. ㅎㅎㅎ
네, 들고은(위연실)님. 님께도 그런 애틋한 풋사랑의 사연이 있었군요.
근데, 왜 1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바라만 봤을까요? 지금 활달한 성격과는 조금 달랐던?
그 남학생이 너무 크게 성공해서, 가끔이라도 지금 사시는 부군과 비교해서는 안 되겠죠? ㅎ
@삼일 이재영
그러게요~
핑크빛 감정이 수줍게 만들었나 봅니다.
성적순으로 자리를 앉혔는데, 그는 맨앞 1등 자리에
저는 그 줄 끝트머리쯤 8~9등 자리에 있으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그가 뒤를 돌아보면 마주치곤 하던 눈빛으로~~ ㅎㅎ
그 때 저희는 한 반이 거의 80명이 넘었으니, 못한 공부는 아니었건만
부끄러웠답니다.
비교는요~
그는 향기없는 액자속 그림일 뿐이고, 평생 공직에 소시민으로 살았지만
추우나 더우나 체온을 나누는 진정한 내편, 내 남편이 젤이지요~~
@들고은(위연실) 하하, 공부 더 열심히 해서 앞쪽으로 당겨 앉지 않고 죙일 뒤돌아보기만 기다렸다니요. ㅎ
그럼요. 공직에 계셨던 부군께서 든든한 내편 애국자이죠.
선생님전상서, 사친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정겨운 단어들입니다.
전교생이 3천명이 넘은 큰 학교에서 삼일선생님은 일찌감치 수제자였군요.
네, 뱃사공님. 사라져 간 옛 이름들이 많습니다.
진주 중안(지금은 진주) 초교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당시 진주 시민이 20만 명 정도였고 봉래, 천전, 배영, 금성 등 국민학교 중에 제일 컸고 전교생 3,200명으로 기억합니다.
대부분 귀한 집 자제가 다니는 벽돌집의 제일 작은 배영 국교가 중안 국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었는데, 하동 악양에서 2학년 말에 이사와 어머님이, 외아들이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학생이 제일 많은 중안국교에 전학시켰습니다.
원고로 올린 '남강문학회' 14년 선배 되신 분의 놀라운 댓글을 옮겨봅니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蘭亭주영숙 네, 난정 작가님. 참 묘한 일이라 저 농암 선생님과 제가 무슨 인연인가 싶습니다.
농암 선생님은 마산에서 고교 교장으로 은퇴하셨는데, 성품이 후덕하셔서 국회의원 등 따르는 제자가 많다고 합니다. 동생 한 분은 노태우 대통령 경호실장 지내셨고요.
저보다 연배가 14년이나 선배이면서도 저한테 "이 후배님"이 아니고 "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 좀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