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변(南忭) -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9세
▲ 남변의 묘갈명 (墓碣銘)
저자 : 김안국
이명
- 자 : 숙구(叔懼)
9세 삭령공(朔寧公 諱 忭) 묘갈명 (墓碣銘)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정대부 삭녕군수 남공 묘갈명
공의 휘는 변(忭)이고 자는 숙구(叔懼)이며 성은 남(南)씨이다, 남씨는 본디 의령현(宜寧縣) 의 대족(大族)으로 고려 때의 문하 시중(門下侍中)인 휘 을번(乙蕃)이 있고, 그의 아들 휘 재(在) 초명 겸(議)은 본조에 들어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 ·좌명공신(開國佐命功臣)에 책록(冊錄)됨과 아울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역임하고 의령부원군(宣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그의 아들 병조의랑(兵曹議郞) 증 좌의정(贈 左議 政) 휘 경문(景文)은 공의 증조이고, 증 좌의정(左議政) 충간공(忠南公) 휘 지(智)는 공의 조이 고, 내섬시부정(內贍寺副正) 중호조참의(贈 戶曹參議) 휘 칭(偁)은 바로 공의 부0|며, 모는 송 (宋)씨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휘 희경(希瓊)의 따님이니, 경태(景泰) 갑술년(1454) 10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삭령공 남변의 묘소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음보(蔭補)로 연은전 참봉(延恩殿 參奉)에 임명된 뒤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에 전직되었는데 직무를 관장하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화(成化) 경자년(148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이어서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에 승진한 뒤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사헌부감찰 (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1489)에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에 임명도 었는데 명쾌한 판단을 이끌어 법정에 쌓인 송사가 없었다, 다시 내섬시판관(內赡寺判官)으 로 승진하고 이어서 외직으로 나가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에 임명되었는데 능숙하게 잘 다 스린다는 평가를 받아, 당시 의지를 고추 세워 남을 잘 인정하지 않던 유수(留守) 홍흥(洪 興)공이 청렴하고 법을 잘 지키는 공을 보고 매우 중하게 여겼다.
다시 장례원사의(掌隸院 司議)에 체직(遞職)한 뒤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형조로 옮겨왔는데 옥사를 세심하 심사 하여 공평하게 처리하는 예가 많아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부모를 모시려는 이유로 외직을 구해 식녕군수(朔寧郡守)로 나갔는데 그 치적이 다시 뚜렷하여 백성이 편안한 삶을 누렸다. 그리고 이곳에 내려온 지 3년 되는 해인 기미년(1499) 10월 30일에 관청에서 세상을 떠나니 아전이며 군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0|음해 3월 17일에 광주 (廣州) 남쪽 음촌리(陰村里) 건좌(乾坐) 손향(巽向) 언덕에 장지를 마련하였으니 향년은 46 세였다.
아, 고려 말 이후 변고가 끊임없이 일어나 명문대가들이 거의가 자신을 보존하지 못했는데 남씨 가문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온전히 보존되어, 대대로 빛나는 공로를 세 워 높은 반열에 명성을 드날렸으니 쌓은 덕이 두텁고 그 연원이 깊지 않다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공은 또 단정하고 바른 자질로 학문에 힘쓰고 세상에 우뚝 서서, 계승된 가업을 지킴은 물론 그 흐름을 더욱 넓혀 후손에까지 경사가 이어져 바이 흐로 그 영광이 끝없으니 하늘의 베픎이 어굿나지 않음을 새삼 알겠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에 자식이 귀하게 된 일로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로, 한산세가(韓山世家)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후예 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숙야(叔野)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였 고, 조의 휘는 축(蓄)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고, 부의 휘는 훈(塤)으로 순성조자리공신(純福佐王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한성군(韓城君)이다, 모는 비인현주(庇仁縣主)로,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따님이다.
부인은 어질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식을 의리와 방정함으로 이끌고 노비들을 관대함으로 다스려 집안이 정연하였다. 평생 무당 등에 의탁하여 복을 비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근면으로 집안을 다스리는 자세를 늙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견지하였다. 손에서 여인이 해야 할 일을 놓지 않아 자식들 이 그만 하실 것을 권유하면, "실을 짜는 일은 부인이 할 일이니 너희들의 책과 같은 것을 어찌 놓을 수 있겠느나"라고 했다. 부인은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건강하였 고, 집안이 부유하고 이름을 떨쳐 높은 관직에 오른 자식들이 많아 두루 잘 모시어, 부귀와 영화를 갖추는 큰복을 누렸으니 당시 가문들에서 이보다 앞선 예가 없었다. 가정(가정) 정유년 (1537) 10월 11일 정침(正침)에서 편안히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4세였다. 이듬해 (1538) 2월 16일에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슬하에 7남이 있으니 장자는 세웅(世雄)으로 급제(及第)한 뒤 호조 참판(戶曹祭判)을 역임 고, 차남은 세형(世䚘)으로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을 역임하고, 3남은 세평(世枰)으로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고, 4남은 세준(世準)으로 급제한 뒤 이조 참판(吏曹祭判)을 역임하 고, 5남은 세칙(世則)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역임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6남은 세 건(世健)으로 급제한 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고, 7남은 세언(世彦)으로 장 예원사의(掌隸院司議)를 역임하였다, 장남 호조참판은 인의(引|義) 문간(文簡)의 따님을 맞아 2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감찰(監察) 고몽참(高夢參)이 그 남편이고, 차녀는 유학(幼學) 윤지 성(尹之誠)이 그 남편이다. 차남 첨정은 목사(牧使) 윤구산(尹龜山)의 따님을 맞아 2남 1녀 를 낳았으니, 장자는 응각(應角), 차자는 응규(應奎)이고, 1 녀는 유학 이효중(李孝曾)이 그 남편이다.
3남 안성군수는 좌랑(佐郞) 이소원(李紹元)의 따님을 맞아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연경(延慶)으로 진사시에 급제하고 차자는 홍경(弘慶)이다, 4남 이조참판은 판서(判書) 안침 (安琛)의 따님을 맞아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응노(應老), 차자는 응정(應井)이고 장녀 는 종실인 극포수령(極浦守令) 이희남(李希男)이 그 남편이고 차녀는 유학 구언(具彦)이 그 남편이다. 5남 병절교위는 첨정(僉正) 한사개(韓士介)의 따님을 맞았고 후사가 없다, 6남 대사헌은 군자정(軍資正) 이윤식(李允湜)의 따님을 맞아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용운(應 雲)으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고, 차자는 응룡(應龍)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였는데 동시에 을미년 과거(乙未科擧)에 급제하였으며, 장녀는 참봉(參奉) 정안(鄭顔) 이 그 남편이고 차녀는 유학 이홍진(李弘縉)이 그 남편이고 3녀는 유학 정순하(鄭純嘏)가 그남편이다 . 7남 장예원사의는 군수 권교의 따님을 맞았는데 자녀가 없다. 내외의 중손은 남녀 20여 인이다.
혁혁한 남씨 가문, 고려부터 흥성하였으니 덕을 쌓고 충성을 이어, 저 하늘도 감동시켰도다, 위기를 부축하여 다시 일으켜 세움은 실로 신명의 도움이 있어 공(公)이며 경(卿)의 자리들 세대가 흐를수록 더욱 많았으니 훌륭하신 삭녕 군수(朔寧郡守)께선 이를 잇고 이를 닮으셨도다. 남편은 심고 부인은 가꾸어 높은 덕을 쌓았으나 그 몸에 다 누리지 않고 후손에 경사를 물려주어 황금 띠에 인끈을 늘어뜨린 이들 집안에 영광으로 빛나니 찬란한 가문은 동방의 모범이 되었도다. 공적을 적어 후손에 권장하며 먼 미래에 분명히 알리노라
자헌대부 (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議政府左參贊) 겸 지춘추관사 (兼知春秋館事) 예문관 관제학 (禮文館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김안국(金安國) 짓고 숭의랑(崇議郞) 이조좌랑(吏曺佐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승무원(承文院) 검교(檢校) 김노(金魯) 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0 선산에 모셔져 계시다.
▲ 남변의 묘소
선영 :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0
재실 :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0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선영 묘소
<출처>
의령남씨부정공파종중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