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잘 보지도 않는 TV채널을 돌리다보니 전원일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20여년이나 세월이 지난 애기지만,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중에는 이미 운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고, 아직도 활동을 하는 배우도 있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농촌의 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선 일상이 그렇고, 텁텁한 두엄냄새 나는 고향의 정취도 있으며, 드라마속의 젊은 청년들이 나 또래인 이유도 있다. 삶의 애환과 희열이 함께했던 드라마, 지금 그들은 70을 넘어섰지만...
나도 전원일기 금동이처럼 어린시절의 농촌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일잃은 소년도 아니면서 말이다. 전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었성 싶고, 보관이 제대로 되지않았을 것이다.
남는 기억이란 국민학교 입학 전후쯤의 아련한 추억들, 검정 고무신에 대각선 책보를 메고 2km가 조금 넘는 고개넘어 학교까지 한걸음에 다름박질 치던일...삼베 옷은 입었고, 대나무 삿갓도 썼던가? 놀이라는게 고작 땅따먹기, 구슬치기, 자치기...그저 땅바닥에 머무는게 고작이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방귀 잘나오는 거칠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점심이래야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이었으니 배부를리가 없었다. 아침에 소에게 풀을 먹이고 느티나무에 매어 놓았던 뒷산으로 향했다. 소를 풀어놓고, 또래들과 어울리기에 바빴다.
넓은 산을 뛰어 다녔고, 땅따먹기 놀이, 씨름, 도라지 캐기, 흙가마 감자 삼기...하여간 정신없이 즐기다보면, 소는 어느새 능선을 넘어 다른 산으로 옮겨가 있거나, 남의 밭을 침입해 버렸다. 그럴때면 한차례 꾸지람을 들어야했고, 저녁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시골집은 나무와 흙으로 지어지고, 지붕엔 벼를 추수한 볏짚으로 짓다보니 많은 생물들과 함께 살았다. 지붕에는 구더기, 천정에는 쥐가 일치감치 무상임대를 받았고, 모기, 바퀴벌레, 귀뚜라미, 나무벌레 등은 대략 공생을 하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큰집에는 부산에 사는 큰집조카가 한동안 시골에 와서 있었다. 나와는 두살터울, 그래서 우리집에 와서 껌딱지처럼 나한테 붙어살았다. 어느날 밤 자다가 깬 그가 등어리에 뭐 붙어있는 같다는 것이었다. 놀란 나는 불을 켜고 이불을 들쳤더니, 커다란 자네가 방바닥을 기었다. 재빨리 지네를 때려잡아 죽였다. 시골집이란 그랬다. 때론 굼벵이나 쥐를 잡아먹기 위해 기둥을 타고 오른 뱀이 지붕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한번은 화장실(그때만해도 통시라고 불리었음)에서 대변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뱀이 내가 들어있는 화장실 문짝을 기어 오르고 있었다. 그때의 화장실 문이란 밑에서 공간의 절반만 가리게된 나무 문이다. 하필 화장실의 아래편은 대나무밭으로 언덕받이였다. 그러니까 뱀이 절반만 올라오면 화장실 안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수평진행을 한다면 다행아련면, 만약 고개를 문턱에 걸치고 나를 위협한다면... 방어할 방법도 없이 화장실 바닥에 나딩굴어질 뿐인게고, 또 한가지 최후의 수단은 뱀이 상단을 넘보는 순간 화장실 문을 차서 부셔버리고, 그 위력에 뱀도 대밭으로 떨어져 나간다는 마음을 굳혔다.
5분여 초초한 시간이 흘렀고, 뱀도 감각이 있는 동물에게 상대가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뱀의 꼬리가 문을 지나칠 무렵 문짝을 세게 차며 앞쪽으로 띄어 내렸다. 하여간 그 후로는 당분간 화장실을 가게되면 위 아래를 살펴보고, 헛기침아라도해서 내가 강자임을 주지시켰었다.
그래도 어린 우리가 뱀을 겁내지 않은 것은, 자주 접하는 부분도 있지만,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에 대한 보복심으로 뱀과의 수많은 전투를 벌였었고, 독성을 가진 것들은 집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속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위 집지키미라는 보호 개념도 있었다.
어느 해던가 오후 나무를 하려가기 위해 낫을 갈다가 할아버지께서 뒷방 부억에서 불씨를 가져 가시다가, 짚동에 불이붙어 지붕으로 옮겨타는 모습도 보았고, 할머니께서 달려들어 불을 끄시려다 화상을 입은 모습에 어린 마음이 아팠었다.
무뚝뚝한 아버지, 말없이 순종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에 담았으나, 끝내 마음편히 효도도 제대로 못해 드렸다. 그리고 또 어느해, 아버지는 아랫채의 창고수리와 새로운 장독대를 만들기 위하여 시몐트를 사고, 냇가에서 모래를 짊어지고 오셨다. 그리고 블록제조기를 빌려다가 시멘트 블록을 만드셨다.
나는 모래와 시멘트가 혼합되어 그 단단한 블록이 되는게 신기했다. 아버지와 함께 창고를 만들고, 장독대도 만들었다. 누나는 자신이 많이 사용하는 장독대가 새로 만들어져 기뻐했다. 그러한 누나는 먼저 먼길을 가버렸다.
장독대 가장자리에 작은 형이 물앵두나무를 사다 심었고, 나는 잎이 파랗고 꽃이 빨간 칸나를 심었다. 물앵두나무 밑엔 봉숭아도 심었다. 이후 해마다 여름이면 칸나는 장독대를 웨어싸고 빨갛게 피어났다. 나는 무성하게 자란 푸른 잎 위의 빨간 칸나꽃을 보면서 계절의 감각을 느끼고, 가정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정독가에 한해살이 해바라기를 심었고, 이곳저곳 울타리가에 코스모스도 심었다. 초가을 해살아래 그러한 꽃들이 함께 피어나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 장독대에선 달콤한 간장냄새가 났고, 구수한 콩된장 냄새가 새어나왔다. 빈약한 살림살이지만, 식구들의 맛있는 먹거리였다.
물앵두나무에 매미가 울고, 빨갛게 핀 칸나꽃에 고추잠자리가 날아와 앉았다. 매미가 울음을 그칠즈음이면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건너편 남새밭에선 잘 영글은 옥수수와 벌레먹은 채소가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저녁 모깃불 피우던 평상 너머 소마굿간 앞에선 한밤중 달빛아래 산토끼가 춤을 추고 달아나기도 하였었다. 전형적인 마음의 고향이었다.
보리밥 점심을 먹은 아이들은 또다시 뒷산으로 올랐고, 마을 처녀들은 모여앉아 길삼을 삼았다. 배고픈 아이들은 올밤을 주워먹고, 고구마 서리를 했다. 나는 이렇게 초여름이 다가오면 장독대곁에 칸나가 빨갛게 핀 옛고향집이 생각나고, 가난했지만 마음 풍성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 오른다.
몇년전 90세가 훨씬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18세 출가후 한번도 가보시지 않았다던 고향을 찾은 적이 있었다. 숙연하고 감개무량했다.
그래도 죽을 때는 고향을 찾고, 그것도 안되면 고개라도 고향 방향으로 돌리도 죽는다고 했다. 생의 최적화(身土不二)된 곳이라는 것이다.
산다는건 소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부여한 의무이다. 다시금 그런 곳에 머무르고싶지만, 이제는 산천도 인걸도 변해버린 추억속의 옛이야기로 남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