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수퍼마켓들, 도둑 감시원 고용…
손님들에게 눈 부릅뜬 '인간 CCTV'
1971년 여름 서울에 색다른 직업 하나가 새로 등장했다. '수퍼마켓 도둑 감시원'이다. CCTV도 도난 방지 태그도 없던 시절, 상품을 슬쩍하는 아마추어 도둑을 막기 위해 가게마다 건장한 남자를 2~3명씩 감시원으로 고용했다. 손님이야 불쾌해하든 말든, 사내들은 '인간 CCTV'가 되어 매장을 서성거리며 대놓고 감시의 눈길을 번득였다. 초창기 수퍼들은 상품 진열대 위쪽에 볼록거울 대신 대형 평면거울을 비스듬하게 걸어놓고 매장을 비췄다. 사각지대 손님들의 행동을 살피려는 이 거울에 대해 감시원들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을 억제하려는 용도"라고 설명했다(동아일보 1971년 7월 26일자). 업소들은 도둑을 사후 적발하는 것보다는 사전에 훔칠 마음을 못 먹도록 약간의 겁을 주는 데 중점을 뒀다. 1968년 미국에서도 백화점에 좀도둑이 활개 치자 필름도 넣지 않은 무비 카메라를 소리가 크게 나도록 작동시켜 손님들을 촬영하는 척하며 절도를 막으려 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에 국내에 등장한 수퍼마켓 운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도난이었다. 화려하게 진열된 상품 중에서 고객이 마음대로 집어 계산대로 가져가는 무인 판매 방식이 화근이었다. 이 방식은 구매욕도 자극했지만 일부 손님에겐 절도욕도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가장 많이 없어지는 물품은 조미료, 커피, 치약이었다. 붙잡힌 범인 중엔 주부, 여학생 등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많을 땐 하루 10명의 현행범이 붙들렸다. 가게의 '도둑통계장부' 갈피엔 붙잡힌 사람들이 쓴 '반성문'과 '자인서'가 수두룩했다. "500원짜리 초콜릿 두 통을 훔쳤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라는 여중생부터 "소시지 몇 개만 가져가면 장 볼 돈이 약간 남을 것 같아서 그만…"이라는 가정부의 서툰 글씨도 있었다. 감시원들은 정도가 심한 도둑만 경찰에 넘기고 대개는 주의 주는 것으로 끝냈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상경했다가 며칠을 굶은 끝에 빵을 훔쳤다는 시골 청년에겐 차비까지 주며 돌려보내기도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수퍼마켓 절도는 1970년대 중·후반에 가장 극성을 부린다. 가게들 피해액이 1970년엔 총매출의 2% 선이었지만 1979년에 이르면 총매출의 4%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느 가게는 한 달에 20만원(오늘의 약 340만원)어치를 도둑맞았다. 당시 소형 상점의 파산 원인 중 3분의 1이 좀도둑 때문이라는 조사도 있었다. 수퍼마켓 감시원은 더 늘어났고 감시는 더 날카로워졌다. 필요 이상으로 고객에게 접근하는 바람에 불쾌하다는 불만을 유발할 정도였다(조선일보 1975년 12월 11일자). 1980년대에 대형 서점인 종로서적에선 2층부터 6층까지 마련된 매장 출입구마다 건장한 감시원들이 높은 발판 위에 올라서서 고객들을 훑어보며 약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오늘의 상점들은 도난 방지 시스템에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속속 도입한다. 고객의 수상한 움직임을 스스로 포착해내는 인공지능 CCTV도 개발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도난 방지 태그를 무력화하는 특수 가방을 이용한 의류 대량 절도범이 이달 초 적발되는 등 도둑질의 테크놀로지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판매장 상품 도둑을 둘러싼 창과 방패의 오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