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과 사회참여
김 종 철
(변호사1), 전 한국라브리 간사)
Ⅰ.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는 그의 적들이 "열개의 머리와 천개의 손을 가졌다"고 말할 정도로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화란 개혁 교회 목사의 아들로 로테르담 근처의 마슬라이스(Maassluis)에서 태어난 카이퍼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였고, 정치가였고, 교육자였고,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화란 개혁 교단(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을 만들었고, 1880년에 암스텔담의 자유 대학을 세워, 1901년 까지 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5년 가까이 자신이 창간한 일간지 '스탠다드(De Standaard)'와 그 자매 주간지인 '헤럴드(De Heraut)'의 편집장이었고, 1879에 네델란드 최초의 대중 정당인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을 세워 평생을 지도자로 일했으며, 화란 의회의원으로 2번 당선되었고, 1901년부터 1905년 까지는 네델란드의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그런데 이론가와 실천가로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토록 여러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그의 개혁주의 신학, 특히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사로잡았던 칼빈주의를 재해석하였고, 그러한 재해석을 통해 기독교인이 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Ⅱ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1.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
근대modernity의 특징 중에 하나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사사화(私事化)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교회가 삶의 모든 영역을 간섭하였기 때문에 기독교가 마치 삶의 전반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 같았지만,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교회가 담당하는 영역이 줄어들자, 기독교는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하여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런 근대의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화란자유대학을 개교하면서 한 유명한 연설문을 통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부분은 단 한 평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2.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그는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이라는 사상을 세계관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신념 체계가 세계관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관계인 신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칼빈니즘)는 단순히 종교적 전통이나 교회의 견해가 아니라 세계관 내지는 삶의 체계이고, 종교 뿐 아니라 정치, 과학,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3. 안티테제(antithesis)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칼빈니즘)는 삶의 체계일 뿐 아니라 당시 유행하는 모더니즘, 다윈니즘, 독일범신론, 프랑스 혁명주의 내지 범신론과는 정반대(antithetical)의 체계라고 하면서, 이 세상은 우상숭배의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께 순종의 무릎을 꿇는 기독교 세계관 사이의 거대한 사생결단의 싸움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기원에 관한 논쟁을 예로 들면서, 이는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두 개의 경쟁적인 세계관 내지 삶의 체계 사이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4. 세속 세계관의 종교성
카이퍼는 기독교를 세계관이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세속 세계관 역시 종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이성이 자율적이고 중립적이라는 모더니즘의 전제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 활동 역시 일정한 종교적 전제에 의해 수행된다고 하였는데,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적 이론이라는 것 역시 과학을 수행하는 자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인 전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5.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가 사회참여 문제에 갖는 함의
하나님은 협소한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주권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창조한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어야만 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신을 섬기는 사상이 지배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시도록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참여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그리는 사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사회가 어떠한 모습을 갖도록 참여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이론을 살펴봐야합니다.
Ⅲ '영역주권'
1.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권위를 부여 받은 영역
앞에서 언급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나온 또 하나의 종교개혁 전통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의 사상입니다. 이는 어느 것도 매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으로서 '자기 위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없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이론은 이 종교개혁자들의 코람데오 사상에서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국가, 경제, 교육, 가족, 교회 등의 사회의 각 영역은 어느 한 영역이 다른 영역 위에 존재하거나 어느 한 영역을 매개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므로 각 영역이 가지는 권위와 주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입니다.
2. 고유의 관할과 목적을 가진 다양한 영역
카이퍼는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각 영역 마다 고유의 관할을 정해 주시고, 영역 마다 적용되는 고유의 규범과 목적을 정해주셨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은 각 영역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할과 규범 내지 목적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책임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역이 '문어발처럼' 다른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하나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목적과 규범을 다른 영역에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교회가, 근대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다른 영역을 침범하였고, 교회와 국가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때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규범, 목적을 다른 영역에 적용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을 세운 목적 역시 국가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학이 추구해야 할 규범과 목적을 따르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3. 비위계적인(nonhierarchical)사회 구조
세속화된 근대에서 사회의 모습이 가이사=하나님 이라면, '그리스도의 주권'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삶의 체계'로 보았던 카이퍼는 사회를 하나님>가이사 로 파악했습니다. 중세는 사회를 하나님>교회>국가>각 영역>개인으로 보거나, 카톨릭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시민사회이론은 국가>각영역>개인으로 보나, '코람데오'에 근거해서 '영역주권'을 주장한 카이퍼는 사회를 하나님>각 영역(국가=교회=가족=기업=조동조합=대학=개인)으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사회의 각 영역은 수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병렬적으로 존재합니다.
4. 소극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국가관
국가는 사회의 한 영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관할을 벗어나서 힘을 행사하거나 국가에 적용되는 규범과 목적을 다른 영역에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소극성을 갖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영역에 간섭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에 적용되는 규범과 목적이 '정의'이고 정의란 '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주는 것'이므로 국가는 다른 영역들 사이에 관할에 관해 분쟁이 생기면 그것을 조정해주고, 영역 내부의 약자들을 강자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므로 이런 점에 있어서는 적극성을 띤다고 할 것입니다.
5. 영역주권의 사회참여적 함의
먼저 각 영역에 적용되는 규범과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국가는 정의, 즉 각자에게 나름의 몫을 주는 것을 위해 존재하며,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며,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잘 관리하고 배분하는 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잠식하거나 한 영역에 적용 되어야 하는 규범과 목적을 다른 영역에 강요하는 예가 무엇인지 발견하여 고쳐야 합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에는 국가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가 진행되는 시대에는 기업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야 합니다. 이윤의 추구(이것 역시 기업에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 내지 목적이 아닙니다)가 기업의 영역에는 물론 국가의 영역, 가족의 영역, 학교의 영역, 심지어는 교회의 영역까지 적용되는 것이 당연시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카이퍼의 사상을 개관했는데 우리는 이 사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Ⅳ. 사립학교 문제에 적용
1. 문제점
사립학교라고 하더라도 강제 배정으로 학생들을 받고 있는데 종교의 자유 내지 자율성을 근거로 기독교교육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사립학교는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으므로 학생들에게 종교교육을 하지 말아야 하고 국가에서 정한 교과 과정과 교육방침에 철저히 따라야 하나요? 사립학교는 학교의 자율성 내지 종교 교육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말아야 하나요? 아니면 학생 강제배정 제도를 폐지하고 학교로 하여금 종교의 자유와 자율성을 누리게 해야 하나요?
2. 평준화제도폐지
영역주권이론에 의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평준화제도(학생강제배정제도)는 국가가 자기에게 맡겨진 관할을 넘어 다른 영역까지 침범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식들을 교육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는 부모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할 권리를 평준화 제도(학생 강제 배정 제도)로 희생시키고, 나름의 교육 철학과 건학 이념에 맞게 학생들을 교육하려는 학교의 역할을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준화 정책과 지나친 교과 과정에 대한 간섭을 폐지해야 합니다.
3. 학생의 종교의 자유와 사립학교의 종교의 자유의 보장
평준화 제도가 폐지되면 학생들은 자신이 신앙과 가치관에 따라서 학교를 선택하게 되므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뿐 아니라 학교 역시 건학이념에 따라서 자율성을 가지고 종교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보조금 정책의 유지
사립학교가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준화를 폐지하고 학교를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 또한 영역주권이론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2) 평준화 정책이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학교의 역할을 국가가 대신하려는 것이라면, 학교를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은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기업에서 적용되는 원리와 규범을 그와 역할이 다른 학교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학교가 완전히 시장의 논리에 잠식되어 가난한 부모들이 제대로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5. 학교 교과과정에 대한 과도한 간섭 폐지
사립학교는 국가로부터 많은 보조금을 받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교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표준화된 교과과정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종교적인 성격과 종교적 중립성의 허구성, 기독교가 삶의 체계 내지 세계관이라는 점을 고려 할 때,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교육 과정만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공교육 과정도 일정한 종교적 신념 내지 이데올로기적인 전제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 구조적 다원주의가 실현하기 위해서 보조금을 주어가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서 구가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카이퍼의 영역주권이론을 사립학교 문제에 적용시켜보았는데, 그렇다면 카이퍼의 이론이 우리의 일상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Ⅵ. 맺음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양한 모습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한 가족의 가장으로, 한 직장의 직원으로, 한 교회의 교인으로, 한 지역의 주민으로, 한 국가의 국민으로, 한 동아리의 회원 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부르심에 응답(책임)해야 합니다. 어느 한 부르심만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부르심을 희생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다양한 부르심은 우리를 다양한 영역 가운데 두셨다는 것 뿐 아니라 그 다양한 영역에서 고유한 목적과 규범을 따라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족에서 취할 태도와 직장이나 교회에서 취할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흔히 말하듯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는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은 가정답고 교회는 교회답고, 직장은 직장다운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