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시사사》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 김봉환
집의 구조는 기다림을 전제로 설계되어있다 외 2편
김봉환
트랙으로 뛰어나간 마장의 gate처럼 식구들의 방문은 열려있고 고기잡이가 끝난 빈어선 한 채 현관에서 캄캄하다. 아무리 개조를 해도 집은 파도에 취약했고, 늙은 선장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판에서 마상전을 펼치고 있을 식구들의 승전보를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선박의 구조와 집의 구조가 같다고 우겨보더라도 몸에 달라붙어있는 비릿한 냄새는 환기의 대상이었다.
햇살이 집의 구조를 읽으며 사다리를 걸쳐 놓는 시간, 건조대의 빨래들이 팔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다. 작은 물방울들이 햇살을 따라 빨래들의 방을 빠져나가고 있다. 제자리가 아닌 것을 버리고 가는 가벼운 것들의 오후가 뽀송뽀송 해지고 있다. 젊은 날들을 선박위에서 보낸 시간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와도 눅눅하다.
구조에 익숙해지면 기다림도 익숙해진다. 현관문이 열리면 문들이 반듯해지고, 악어 입처럼 악어새를 기다리던 천정은 그제야 눈을 뜬다. 말굽에 붙어 튀어 오르던 모래가 다시 트랙으로 스미듯 집의 구조를 밝히며 기둥이 선다. 한 낯의 햇살을 따라나섰던 선장의 항해가 정박할 시간이다.
바닥이 벽에 등을 내어주고, 모서리와 모서리가 경계의 날을 세워도 아주 다른 방향이라 말하지 않는 집에서, 온종일 섬으로 떠있던 식탁이 항해를 시작하고 있다.
가방
엄마의 가방에서 나를 끄집어내었다.
엄마는 가벼워지고 싶었지만 새로운 가방은 늘 말썽이었다고 회고했지. 엄마는 싸구려 가방을 하나 더 얻은 셈이고 가방의 용도는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놓고 수다를 떠는 장식용에 불과했어. 가방에 날개가 돋아야 한다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방에 나를 자꾸만 구겨 넣었지 악어처럼 거칠어지거나, 물소처럼 얌전해지기도 했지만 난 몸에 착 달라붙지 않는 나일론 천이거나, 돌같이 딱딱했었어.
타인의 가방과 나의 가방을 번갈아보는 습관이 생겼던 어느 날. 빈 가방을 달랠 목적으로 시장에서 구관조 한 마리를 샀지 이름을 ‘할래’로 지어주었어. 가방에 넣어 다니며 NO. NO. NO... 반복적으로 연습을 시켰지. 새가 가방을 쪼거나 이 빠진 지퍼 사이로 울음을 뱉었지만 날지는 못했어. 아버지의 가방에도 새가 있었지만 도통 ‘할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 낯선 가방들과 부딪쳐 생긴 구멍으로 ‘할래’를 잃어버린 후 가방을 버리고 싶어졌어. 숨겨온 물건들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가방은 빠르게 낡아갔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은 너무 무거워 그것도 버리기로 했어. 여러 번 꿰맨 끈이 자꾸만 손바닥에 상처를 냈어.
엄마는 황보 씨 성을 버리고 명품을 베낀 싸구려 가방 안에 잠들어있다. 주문을 외워도 더는 열리지 않는 가방, 아무것도 꺼낼 수 없는 나의 가방에 눈물이 한 가방이다.
사과를 다 깎으면 당신이 올까
오대양과, 툰드라 숲을 샅샅이 뒤져도 당신은 없다.
지구본을 빨리 돌리면 사과가 열린다. 나는 사과에 감긴 햇살의 밧줄을 풀어낸다. 풀어낸 밧줄을 붙잡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남극에서 북극으로 가는 중이다. 엄지와 장지를 연결해 무전을 친다. 옷 색깔도, 머리스타일도 희미한 점멸등으로 깜박거리는 당신. 잘 있나요? 길을 더듬는 왼손에 당신이 지문처럼 찍히고 기울어진 축을 따라 환청처럼, 혹은 환생의 기억처럼 귀뚜라미소리와 별들이 쏟아진다. 아슬아슬한 길을 걸으며 사과나무가지 끝에 매달린 별로 점을 치거나 뿌리의 방향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당신과 나의 뿌리는 다른 곳으로 가고 있나 봐요. 두려움으로 팔을 뻗어 방향을 짚어보는 날은 고비사막에 남겨진 작은 짐승 같아서 사과 향을 맡지 못합니다. 긴 줄을 타고 사과보다 많이 열리기만 하는 당신. 지겨워지네요. 지구본을 반대로 돌리면 중력이 반대로 작용할까. 키 큰 나무들이 작아져 씨앗이 되고 당신은 홀로그램으로 나타날까. 조급할수록 길이 좁아져 칼이 지나는 지점은 항상 절벽이다. 절박한 자들이 붙잡는 절벽, 절박함이 없는 자들이 버리는 절벽, 절벽은 꼭짓점이기도 하지만, 동굴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 그 절벽에서 당신과 내가 마주하기를 바라며 서있다. 경도와 위도는 촘촘한 그물 같아서 지구를 감싸고 있지만, 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과육처럼 북극은 까맣게 깊어지고 있다. 그물을 빠져나가고 있다. 나는 남은 껍질을 벗겨내며 꽃피던 지점을 잘라내고, 처음 당신을 만났던 배꼽을 가볍게 떼어낸다. 절벽을 건너온 비뚤비뚤한 길들이 쟁반에 가득하다.
사과를 쪼갤 시간이 다가온다.
* 김봉환 시인
-경남 김해 출생
-자원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