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이 대장경판(大藏經板)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목판(木板)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을 말하며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하며 또한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文)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종(顯宗)(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蒙古)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 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고종 19년(1232)에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고자 국가적(國家的)인 차원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이때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北宋官版)과 거란본(契丹本)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誤謬)를 바로잡은 대장경 역사상 가장 완벽한 대장경판이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大藏刻版)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契丹兵)의 침입 때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지금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에서 부처님에게 고(告)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板刻)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이 대장경판은 판심(版心)이 없는 권자본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으로 한 면(面)에 23행(行) 14자(字)씩 총 1,401종(種) 6,708권을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새긴 것인데, 이중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판은 79종 520권이 판가(板架)에 수록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은 이 고려대장도감각판(高麗大藏都監刻板) 외에 9종의 분사대장도감의 판각판과 조선조(朝鮮朝)에 판각(板刻)된 사간판(寺刊板)이 포함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현존(現存) 최고(最古)의 대장경판일 뿐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대장경판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文化遺産) 가운데 하나이다. (문화재청)
장경판전에 보관 중인 대장경판(문화재청 사진). 판각 하나하나마다 뒤틀림 방지를 위해 양쪽 끝에 다른 나무를 씌우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댔으며 글자를 새긴 뒤 옅게 옷칠하여 판을 보호하였다고 하니 선조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해인사 장경판전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불리우고, 이 건물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배치하였다.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며 동·서쪽에도 작은 규모의 동(東)·서판고(西板庫)가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部材)를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고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板架)의 진열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 세조 3년(1457) 확장·재건한 후 성종 19년(1488)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아 옛 모습을 남기고 있는데,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1964년 해체수리시 상량문(上樑文)과 광해군 어의(御衣)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한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앞쪽 건물인 수다라장(문화재청 사진)
창살을 아래 위가 다르게 냈다. 위는 넓고 아래는 좁다.(문화재청 사진)
뒷쪽 건물인 법보전
석가모니불을 안치하였다. 원래 모셔져 있던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대비로전으로 안치하였다.
법보전은 창살을 아래를 넓게 위를 좁게 하여 수다라장과 반대로 냈다. (문화재청 사진)
서판고(문화재청 사진)
맞은편에 동판고가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 전경이다.(문화재청 사진) 양쪽으로 길쭉한 건물이 수다라장과 법보전이고 마주보는 작은 건물이 동서판고이다.
장경판전은 아주 중요한 건물이다. 행여나 잘못될세라 감독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온통 촬영금지가 붙어 있어서 주로 문화재청 사진을 사용하였다.
2011.11.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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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 그리운 나라 ** 원문보기 글쓴이: 낭만방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