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2207 4학년 정치외교학과 안인용입니다.
답사에 참가하지 못해서 국립과천과학박물관 답사 후 레포트 제출합니다.
Ⅰ. 서론
현대 사회를 사는 인간들에게 ‘과학적’이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공자의 말보다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라는 말이 붙으면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믿고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는 유교질서를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유교 질서 안에서 기술 혹은 과학을 직업으로 삼는 자는 미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러 등장한 장영실이라는 인물은 유교적 폐쇄국가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과천국립과학박물관을 방문하면 장영실의 발명품들을 볼 수 있다. 유교사회라는 명분과 질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에서 그의 등장은 획기적인 것이다. 장영실의 발명품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욱 놀라울 뿐이다. 그 중에서도 시계는 조선시대의 중심인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용품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장영실의 발명품인 시계에 대해서 고찰하도록 해보자.
Ⅱ. 본론
ⅰ. 시계란 무엇인가?
모든 과학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시계의 발명도 일하는 자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계절의 달력이 필요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소박하고 느슨한 발견이었다면, 시계는 보다 정밀하게 세분화된 시간의 공통화를 요구했던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하루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하려는 요구에 관련된 것이었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계절의 절기 등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규칙적인 삶들을 보다 정확하게 묶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하는 동료들과 알차게 하루의 삶을 공동으로 계획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루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필요에 따라 보다 정밀한 시간측정으로 먼 길을 떠났던 것이다. 물체의 움직임은 ‘변화’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자연적인 물체에 자신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 해, 달, 모래 등의 변화는 시간 측정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해시계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관찰의 용이함이라는 이점을 지닌 데서 최초의 시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낮은 자연에 대해 의식적인 행위를 가하는 즉 노동하는 인류에게는 밤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었다. 빛이 있는 시간은 곧 노동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인류를 기아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그 자신을 재생산시켜줄 기본적인 원동력을 찾아내 줄 희망의 시간이었다.
인류는 태양빛으로 인해 생겨난 나무의 그늘에서 또는 누군가가 세워둔 작은 기둥의 그림자에서 해시계의 첫발명의 아이디어를 얻었던 듯하다. 나무 그늘은 해의 움직임의 변화에 따라 그 길이를 달리했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을 때 그늘은 아주 짧았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갈수록 그늘은 길어졌다. 나무 그늘, 서있는 사람의 그림자, 땅을 향해 수직으로 선 기둥들의 그림자는 태양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그림자가 있는 것이면 모두 태양의 시간을 잴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놀라웠다. 사람들은 이를 인용해 그림자 시계 즉 해시계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해시계는 그 정확성보다는 장치와 사용 그리고 측정의 용이성 때문에 16세기경까지 수세기에 걸쳐 세계적인 시간측정 기구로 사용되었다. 원시사회에서는 단순히 기둥의 그림자를 이용한 기둥시계만을 사용했지만, 고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예노동과 이웃 공동체 사회에서 약탈한 물질을 기반으로 보다 복잡하고 풍부하며 거대한 제국사회가 생겨나면서 해시계를 정밀화 시키려는 노력도 배가 되었다.[1]
ⅱ. 해시계
위와 같은 필요성에 의해서 우리 역사에서도 쉽게 시계를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반지름 약 33.4cm, 최대 두께 16.8cm의 원반형 화강석 유물 한 조각이다. 193년대에 경주 월성 성벽면에서 발견된 것이라 한다. 이것은 6~7세기 무렵,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원반모양의 해시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부분은 자시에서 묘시까지 뿐이다. 이 해시계는 다음과 같이 복원해 볼 수 있다. 원을 24등분, 24방향이 새겨진 시반이다. 그 주위에는 8괘를 새겨 8방위를 나타내고 중심에는 시표인 막대기를 세웠다. 즉 사반면의 원주를 등분, 중심에서 사선으로 시각선이 그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해시계는 그 적반면을 수평으로 놓지 않고 적도에 평행하게 설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반면에 수직으로 세워진 시표, 즉 표는 북극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한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는 사이 실존했던 중국의 전통적인 해시계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료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일자, 백제의 일관 등의 관적은 시간을 측정하고 규표나 해시계를 관장했던 관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기원을 전후한 무렵부터 해시계를 쓰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식의 해시계는 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그리고 조선으로 계승되었다.[2]
-조선시대의 해시계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하늘을 살펴 농사에 필요한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대주고 수확하는 시기의 모든 것들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했고, 백성들은 이에 따라 농사일을 하였다.
세종시대에는 규표를 비롯하여 앙부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가 제작되었다. 특히 낮과 밤에 시간을 측정했던 일성정시의와 천체위치측정기기의 부속장치로 백각환을 가지고 있었던 간의와 소간의가 해시계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정남일구와 일성정시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정남일구
정남일구는 1437년(세종 19)에 창제한 해시게로서 시간과 절기를 알 수 있다. 남북 기둥을 잇는 사유환 축은 지구의 자전축인 하늘의 북극방향과 일치하도록 되어 있고, 북쪽 기둥을 통과한 축 끝에 추를 달아 수평을 잡도록 하였다. 지평환에는 24방향과 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사유환의 양 측면에는 주천도(365.25도) 눈금이 새겨져 있어 정오에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유환 안쪽에는 직거가 있고, 그 안에 규형을 움직여 태양광선을 시반면에 받도록 하였다. 시반면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어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과 절기를 측정할 수 있고, 일 년 동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정남일구는 앞서 살펴본 태양의 광점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원대 앙의와 기능상 유사하다. 반구형의 반환을 이용하다는 측면에서 이슬람 해시계에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정남일구는 이슬람 해시계의 특징이 담긴 앙부일구의 구조를 융합한 해시계라고 할 수 있다.
정남일구의 복원은 표준과학 연구소에서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복원은 니덥(1986)의 연구 자료를 활용한 제작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정남일구는 여주 영릉과 국립중앙과학관에 야외전시용으로 제작한 것이 있다. 이곳에 제작된 정남일구는 니덤의 반환(링) 구조를 앙부일구의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는 부분을 활용한 둥근 구면의 형태이다. 남쪽기둥과 북쪽기둥은 왕실에서 사용했던 기기였으므로 용주의 형태로 복원되었다.[3]
-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사용법은 ‘세종실록’을 비롯하여 ‘성종실록’,‘동문선’,‘증보문헌비고’ 등에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성종대에 제작된 일성정시의 부품이라고 추정되는 청동제의 둥근 백각시반과 직사각형 받침판의 부품이 남아있어 복원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창덕궁에 소장된 또 다른 일성정시의 밑받침과 전상운이 소장하고 있는 백각환이다. 성종대 일성정시의 밑받침에는 사각의 발이 있는데, 창경궁에 이전되어 있는 관천대의 의기 받침 석대의 홈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천대에 일성정시의를 설치하여 낮과 밤 시간을 측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일성정시의는 시간 측정이라는 목적과 함께 당시의 표준시계였던 자격루의 시각교정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용삼(1999) 등은 일성정시의 관련 유물을 조사하고, 니덤(1996) 등의 연구자료를 검토하여 일성정시의 복원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세종시대의 일성정시의 모델을 제작 할 수 있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낮 시간은 일구백각환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일구백각환의 사용법은 간의의 용법과 같다. 백각환을 이용한 시간의 측정방법은 간의와 소간의의 백각환을 소개하면서 다루기로 하겠다.
1437년(세종 19)에 만들어진 이 일성정시의 제작에 관하여 김돈(1385~1440)의 서와 명에 기술한 내용중에서 이 글의 말미에서 김돈은 “임금의 시각을 정하는 제도를 서술한 글이 간이하고 상세하여 손바닥을 가리킴과 같이 명백하기 때문에 돈 등이 능히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하고 그 글의 머리와 끝만 보태어 그대로 명을 지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성정시의의 원리와 구조에 대한 명을 세종이 직접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천문의기에 대한 지식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4]
ⅲ. 장영실과 기술
고대에서부터 현대에까지 그 활용이 유용한 시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시계의 필요성은 어느 시대에서나 공통된 모습이었고, 이는 과학의 도움도 있었지만 이는 분명 기술에서 연유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유교에 의해서 탄압받던 기술은 유교가 생각하듯이 천한 것이 아니라 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었다. 기술과 과학에 조화로 인한 인간문명의 편리를 제공해주는 기술자를 현대인은 과학자와 동떨어지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관계를 기술과 유교의 관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자로 장영실(1390년경~1450년경)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장영실의 탁원한 기술적 업적에 연유하고 있지만, 노비의 신분에서 조정의 관료가 된 입지전적 삶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장영실의 사례는 과학기술자를 아끼는 세종대왕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장영실의 생애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자료는 ‘세종실록’이다. ‘세종실록’ 권61은 세종 15년(1433년) 9월 1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행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대 원나라의 소·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세종)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1422~1423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덩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임명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 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 이상으로 뛰어나서, 매양 강무 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명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 해주고자 한다.”
앞의 인용문은 장영실이 자격루를 만드는 데 성공하자 이에 감탄한 세종이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는 일을 대신들과 상의하는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록한 것이다.[5]
현대에 이르러서 까지 우리는 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대 및 자연대를 공돌이라는 우스개 소리로 부르면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천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위인으로 꼽고 있는 세종대왕은 유교시대에도 소신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장영실과 시계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기술에 대해 알아 볼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기술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의 기술 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사회는 발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세종대왕이 아닌 옆의 가신들의 입장에 서 있지 않는가 한다.
첫댓글 이 리포트로 답사데치는 해 줄수 있으나, 본인의 주견은 없고 자료를 그대로 옮긴 것은 불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