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성의 쾌락과 생산, 그 상관관계를 되묻는 영화
<가버나움(Capharnaüm)>
김익하
이미 일상화된 성의 탐욕성과 윤리의 뒷전으로 밀려난 성의 책임감, 즉 성의 쾌락과 생산의 상관관계를 되묻는 영화 한 편을 접했다. 여류감독 나단 라바키가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를 배경으로 4년간 준비 기간 걸쳐 앵글로 추적해낸 <가버나움(Capharnaüm)>이 그 영화다.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예수가 기적을 행했던 곳인데, 그곳 사람들은 기적만 바라고 깨닫지 않아 결국 저주의 땅으로 바뀌는 곳을 말한다. 이 영화 제목에선 굳이 <가버나움>을 불어 <Capharnaüm>로 표기하여 ‘혼돈’이란 뜻도 내포했다. 즉 신에게조차 버림받아 구제 불가능한 출구를 잃은 혼돈의 땅이란 의미다.
영화 도입부는 희뿌연 회색 도시, 폐타이어가 가득 얹혀있는 지붕, 페인트가 벗겨져 너덜거리는 건물 사이의 쓰레기 하역장 같은 거리, 오랜 내전으로 퇴락한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가 무대배경으로 등장한다. 카메라 앵글은 퇴락한 건물과 빈민가에 뛰노는 아이들의 일상을 잡아낸다. 빈민가 아이들의 일상은 놀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앵벌이 하며 끽연과 마약에 손을 대는 일이거나 놀이라야 총을 쏴대는 일이고, 여자애들은 조혼 형태로 이루어지는 인신매매로 팔려나가는 비윤리적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것들이 빈민가의 가난을 극명하게 상징하며 아동학대의 비참함을 수식 없이 보여준다.
이곳에 사는 열두 살 자인은 방송사에 전화해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인은 변호사와 함께 고발인으로 법정에 서 ‘엄마·아빠가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이에 부모는 가난을 빙자하여 불가항력이었다고 눈물까지 보이며 항변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법정 상황에서 과거의 회상 양식, 즉 액자형 삽입형식으로 짜져 현실과 과거로 넘나들며 관중을 사건 현장에다 데려가서 관람케 한다.
아홉 명의 자식을 생산한 자인의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해도 아이들의 부양과 교육에 외면한 채 마약 주스를 팔면서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자인만이 가족을 위해 한 살 아래인 여동생 사하르와 거리에서 동생들을 위하여 앵벌이로, 슈퍼의 심부름꾼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 동생이 초경을 하자 부모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인이 일하는 슈퍼 주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자인이 거친 행동도 불사하며 막아선다. 그러나 부모는 폭력으로 자인의 저항을 제압하며 닭 몇 마리를 받고 딸을 팔아넘긴다.
이에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헤매다 놀이터에서 청소일을 하는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라힐을 만난다. 불법 체류자 신분인 라힐은 일하는 집에서 아이를 가져 신분증도 구하지 못한 채 쫓겨나와 젖먹이 아들 요나스와 함께 악착같이 살아가는 여인이다. 자인은 그녀의 집에서 일 나간 라힐 대신 젖먹이 요나스를 돌보게 된다.
한편 가짜 체류증으로 생활하던 라힐이 단속반에 걸려 연락도 하지 못한 채 구속되자, 자인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요나스를 보살피기에 온정성을 다 한다. 집에서 동생을 보살피던 노하우, 심지어 어머니가 형제들에게 먹거리로 베푼(?) 설탕을 적신 얼음조각을 요나스에게 먹이는가 하면, 다른 젖먹이 우유를 낚아채 오기도 한다.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했던 마약 주스도 만들어 팔면서 살기 위해 요나스를 큰 냄비에 끈을 달아(몸으로 추스르기에 버거워) 끌면서 거리로 떠돈다. 그러면서 자인은 투덜거린다.
‘요나스를 버린 리힐이 자기 부모보다 더 나쁘다’다고.
이렇게 살아가려는 행적에서 관객들은 두 아이의 어림에서 오는 서툶에 대한 동정과 딱한 상황이 안겨주는 극한 슬픔에 끼들거림과 먹먹함을 동시에 느낀다.
요나스의 부양(?)에 지친 자인은 신분증을 위조해 좋은 곳으로 요나스를 보내준다는 해외 입양 브로커인 아스파르에게 아이를 넘기고, 너도 신분증을 가져오며 이곳보다 나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꼬임에 신분증을 가지러 집으로 온다. 그러나 집에 온 자인은 자신은 물론 형제 모두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사실에 분노한다. 부모로서 자식들을 최소한 지켜야 할 윤리를 저버리고 사회적 인간에서 거세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신한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한 채 하혈하다가 병원으로 찾아갔으나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칼을 들고 뛰쳐나가 슈퍼 주인을 찌르나 살인미수에 그쳐 구속된다. 자인은 풀려나와 변호사를 대동하고 부모님의 고발자로 법정에 선다.
이 영화의 메인 메시지는 구속된 아들을 찾아온 엄마가 자인에게 ‘동생이 죽었다고 슬퍼하지 마라. 하나가 없어지면 또 하나가 생기는 법이다. 지금 내 배 속에는 네 동생이 있다’는 부모의 성행위에 ‘엄마·아빠가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달라’는 아들의 비정한 외침이다. 물론 율법으로 낙태가 금지된 환경을 참작하더라도 감독이 앵글로 담아낸 메시지는 구제 불가능한 가난과 낙태를 금지한 관습 사회에서 성의 쾌락성과 윤리성에 대한 고발이다. 성의 쾌락과 생산의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아동학대까지 고발한 이 영화는 주제 이외에도 빛나게 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매력은 극한 상황의 생략이다. 원인을 암시하고 디테일한 리얼리티 제시 없이 결과만 관객 눈앞에다 가져다 놓는다. 아이들 우글거림과 부모 침대의 흔들림, 집안의 낯선 닭의 등장, 젖병의 이동, 칼을 들고 뛰쳐나가는 것과 법정에 등장하는 휠체어를 탄 피해자 등 우리나라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생략에 따른 절제미가 압권이다. 그래서 극악상황을 관찰해야 하는 불편함에서 해방될 수 있어 편안하게 상상만으로도 극한 장면을 유추하기에 시선이 편하다.
또 하나의 돋보임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이 영화의 신선함은 연기 경력이 전무한 비전문 배우들이 신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려진 땅의 피폐한 도시에서 맡은 배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경이에서 온다. 주인공 자인 역 열두 살 자인 알 라비아는 물론 이민여성 라힐 역을 맡은 요르다노스, 젖먹이 요나스 역을 감당해낸 당시 열 달짜리인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까지 믿기지 않는 연기로 리얼리티를 광폭으로 극대화한다. 특히 자인은 놀이 기구의 여체 동상의 옷을 벗겨 가슴을 드러내는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맑은 눈빛은 빈민촌의 실황을 담아내면서 저주의 땅에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 하나 참을성은 엔딩 크레딧(end credits)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였다. 등장인물의 촬영 뒷일, 즉 현재 삶을 알려주는 감동 때문이다. 감명을 더 얹어주는 이러한 배려는 오르지 한국에서만 있다는 점까지 알고 일어서는 게 좋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기능 가운데 하나는 미생인 타자의 삶에 대한 엿보기로 간접체험의 습득인데, 이 영화도 다양한 삶의 한 모서리를 오롯이 보여준다. 평단의 반응은 둘로 나뉘는데 ‘가난을 파는 포르노’ 또는 ‘비윤리적인 재현’이다. 나는 후자 쪽에다 시선을 둔다. 감독의 인터뷰로 한 전언이 귀에 남기 때문이다. ‘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영화를 만듭니다.’ 우리는 부모의 무책임과는 다른 자인이 요나스에 대한 책임감에서 그러한 희망의 싹을 보기에 그러하다. 영화는 소설 위에다 시를 더 얹는 작업이란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잊고 있던 그 문장이 롯데시네마 상영관을 나오는 순간 머리에 떠올랐다.
러닝 타임 126분, 제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