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2) 최양업, 가르치다
부친의 신앙 모범 본받아 연구와 사제 양성에 전력
- 수리산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생가 기념성당 입구 전경. 빈터만 남아있던 성인 생가터에 지어졌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많이 아는 것은 가르치기 위해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모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을 잘 전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배움에 있어서도 부단히 노력했지만, 가르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이 연구하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을 살피면, 그는 단순히 말로 가르치는데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도구와 방식을 동원해 신자들을 가르쳐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신자들에게 교리를 전하는 도구로 한글에 주목했다. 최 신부는 1851년 10월 작성한 8번째 편지에서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며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최 신부가 한글로 번역하는데 참여한 「천주성교공과」는 100여 년 동안, 「성교요리문답」은 70년 동안 각각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와 교리서로 쓰였다. 또한 ‘가사’(歌辭) 양식을 활용해 누구든 교리를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특히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그가 만든 천주가사는 주요 교리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암송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최 신부는 음악을 활용해서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1858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양 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요청했다. 최 신부가 요청한 악기는 ‘풍금’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학기간 중 칼르리 신부에게 음악을 배웠는데, 이를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활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실제로 이 풍금이 조선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이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최 신부는 이미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음악 실력이 있었고, 이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르치는데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 최양업 신부가 한글 번역에 참여한 「천주성교공과」.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최 신부는 신자들의 신심을 위해 묵주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1857년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신자들이 묵주를 아주 잘 만든다”고 자랑했다. 최 신부가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면서 묵주 만드는 법도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리브와 신부에게 묵주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를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집게를 보내주면)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를 조선 교우들에게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는 셈”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 신부는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고 연구했다.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사제가 된 후 자신의 아버지 최경환의 삶과 신앙, 순교를 정리했는데, 특히 최경환 성인이 가르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최 신부는 “프란치스코(최경환)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했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 신부에 따르면 최경환은 한문 교육조차 별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조선시대에 한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학자는 물론이고 지식인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강론과 강의에 박학한 지식인들도 감탄했던 것이다. 최 신부는 그 비결로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던” 점을 들었다. 최 신부는 탁월한 교육자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고, 그것이 단순히 지식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노력에서 온 것임을 성찰했던 것이다.
- 최양업 신부가 한글 번역에 참여한「성교요리문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신학생을 양성하다
“지난 봄에 (배티의)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최 신부는 1854년 리브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신학생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1854년 배티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시 배티에서 양성되던 3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최 신부는 신자들만을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사제양성 측면에서도 교육을 맡았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1850년 조선대목구장이었던 페레올 주교에게 조선대목구 신학교 설립을 명받았다. 다블뤼 주교는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하면서 이를 준비했는데, 이때 마찬가지로 배티에 머물고 있던 최 신부가 신학생 지도와 유학 준비에 관여했다. 마침내 그는 1854년 3월 임 빈첸시오, 김 요한사도, 이 바울리노를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물론 최 신부가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교회사 학자 사이에 이견은 있다. 그가 신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최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 세 신학생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 신부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페낭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알렸으면 한다면서 조선인 신학생의 지도 시에 유념해야할 부분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 중 김 요한이라는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해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아니하면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 상당히 염려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를 잘 지도해 줄 수 있도록 학생들의 상태에 관해 설명했다. 최 신부가 각 신학생들의 특성과 신앙, 지식수준을 면밀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이런 이해는 이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수리산성지
수리산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 교우촌을 일군 곳이자 묻힌 곳이다. 최 신부는 1832년경 가족과 함께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해 생활하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성지에는 최경환 성인의 묘역과 순례자성당, 최양업 성인 생가 기념성당 등이 조성돼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4일,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