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3장 12-15절 (신약 345쪽)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말씀제목
장로교 칼빈의 5대 교리(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오늘부터 오후찬양예배시간을 활용하여 몇 주에 걸쳐 장로교 칼빈의 5대 교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장로교 칼빈의 5대 교리입니다.
여기 칼빈은 사람 이름입니다.
그래서 먼저 칼빈이라는 사람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에 태어나서 1564년 5월 27일 5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프랑스 출신의 종교개혁자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존 칼빈 요한 칼빈 John Calvin 프랑스식 발음은 장 칼뱅 Jean Calvin 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1517년 마르틴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칼빈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졌던 칼빈이 오늘부터 우리가 배우게 되는 장로교 칼빈의 5대 교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부는 아니지만 장로교를 세우는 중요한 뼈대라고 할 수 있기에 오늘부터 이 교리를 배우려고 합니다.
먼저 이 교리가 체계화 되게 되었던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의 교리적 논쟁의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가 죽은 후에 그의 가르침을 추종하던 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5개의 신앙조항을 작성하여 유포시켰습니다. 이들은 이 5개의 교리를 항론의 형식으로 정부에 제출했고 당시 교회가 신조로 받아들여 사용한 벨직 신앙고백서나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도르트 라는 곳에서 국제적인 종교회의가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1618년 11월 13일 열리게 됩니다. 이 회의는 7개월 동안 154번의 회의를 했습니다. 결국 이 회의를 통해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적 입장이 5개항으로 정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다섯 개 조항을 소개하면
1. 전적 부패 또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궁극적 구원(Perseverance of the Saints)입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더욱 자세하게 배우기로 하고요
오늘은 칼빈에 반하는 알미니안의 5대 교리를 소개하며 개론적으로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간의 타락은 부분적 타락인가 전적 타락인가
칼빈은 인간의 타락은 전적 타락이라고 말한 반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은 부분적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부분적 타락이라는 말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에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할 정도로 전적 타락을 한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양심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믿게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간 각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중생 할 수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망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선택인가 무조건적 선택인가 칼빈은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말하는 반면 알미니안은 조건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조건적 선택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여 구원하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하리라는 것을 아셨다는 예견(예지, 부르시면 응답할 것을 미리 아시고)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신앙을 선택하고 이에 하나님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명 예지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예정 섭리에는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는 작정과 전적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의 어떠한 선한 행위나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이미 전능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신 전능자이시며, 인간의 모든 의지는 그분께 종속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면 구원을 얻고 인간이 거부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 여부가 인간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또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예지예정론)하셨다면 예정 자체도 인간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일반적 속죄인가 제한적 속죄인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제한적 속죄라고 말한 반면 알미니안은 일반적 속죄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일명 만인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알미니안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일반적 속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세계)을 위하여 죽었으며, 오로지 그러한 사실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이 효과를 보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반하는 칼빈의 제한적 속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직 택함을 입은 자의 죄만을 제한하여 속죄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가(가항력적 은혜)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가(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알미니안의 주장은 성령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할 수 있는 일은 하시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저항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중생 시킬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저버릴 수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셔서 구원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인간의 구원은 확신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알미니안은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확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연결되어 일치될 때만이 인간의 구원이 성립된다는 신인공동사역입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혹 구원 받은 사람도 신앙을 잃고 타락하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구원을 의심하게 되어 불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칼빈의 주장은 성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그 근거가 자신의 믿음의 분량과 의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에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주체가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라는 문제에서 칼빈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주장이 오늘의 세계 기독교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둘 중에 칼빈의 주장과 사상에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저의 성경 해석이나 그것에 근거하여 하는 설교나 가르침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의 성경해석만이 옳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의 성경해석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의 성경해석은 잘못되었다고 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성경해석자를 여러분들이 보신다면 단호히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가 얼마나 살아야 이 성경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내수동교회를 담임하시는 박희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자신은 약 30년 이상을 하루에 4시간 이상 성경을 묵상하며 연구하였지만 태산의 한 줌 흙은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이라는 사람도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 어린이의 손에 들려져 있는 바가지에 있는 바닷물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성경해석에 대한 절대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