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두 차례의 특강 - 수도원 체험기 -
최 화 웅(비오)
“옛날을 기억하고
대대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 보아라.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알려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말해 주리라.“ (신명 32. 7)
예나 이제나 치열하게 이어지는 수도원 영성은 기도, 노동, 공부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공부는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배우고 익힘” 또는 “배우고 익히다‘라고 풀이합니다. 영어로는 ’study', 'learning', 'work'라고 쓰고 한자는 ‘工夫’라 씁니다. 한자 工夫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손질하는 것“을 뜻합니다. 장인 ‘工’ 자는 글자 모양이 사람이 연장을 든 모습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갈고 닦아 하늘과 땅을 이으려는 모양새입니다. 사내 ‘夫’ 자는 글자 모양이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이루어 낙원을 창조하려고 힘쓰는 사람“을 형상화한 글자로 보입니다. 공부는 결국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생활을 실천하며 변화에 스스로 적응해 나가는 인격적인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강화신학원의 삶은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깨어나면 기도와 성체조배, 그리고 미사, 저녁기도와 낮기도, 잠들기 전 밤기도까지 기도생활이 이어집니다. 공부는 오전과 오후 그리고 밤 세 차례로 나누어져 있고 주일이면 면학시간이 무려 11시간 반이나 주어져 지적욕구의 충족을 도왔습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를 즐기는 저로써는 수도원이 지상낙원이었습니다. 수사님들의 삶은 기도와 공부, 그리고 노동의 전통적인 일과표에 따라 자율의 삶을 살았습니다.
수사님들의 공부는 스스로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을 통한 인문학적 면학과 간혹 외부강사의 특강으로 자체연수를 가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대학에서 경험한 강의와 계속 공부해온 학문을 바탕으로 두 차례의 특강을 맡았습니다. 특강은 90분 강의에 30분 동안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 주제는 <종교언론의 현실과 미래>, 두 번째 강의 주제는 <가면을 쓴 광대>로 정하고 준비했습니다. 제1 주제 종교언론에 관한 강의는 지난날 세속언론과 가톨릭언론에서 30여 년 동안 일한 실전경험을 토대로 ‘누가 매체를 소유하고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현실을 살펴보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공정성을 진단했습니다. 나아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른 현실참여 문제를 전망해보았습니다.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를 다루면서 대안을 제시해보려고 머리를 맞댄 시간이었습니다. 수사님들의 시각이 생각보다 진취적이고 생동적인데 놀랐습니다. 그것은 순수해서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당의 주보 내지는 홍보지 역할에 머물고 있는 종교언론의 현실을 살피고 세상의 언론에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종교언론의 역할을 논의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종교조직과 힘에 의한 언론장악과 지배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도전해 보자는데 뜻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진솔한 통찰력과 참여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언론이 복음전파, 즉 선교의 도구라는 한계에 부딪힌 현실에서 종교언론을 순수한 언론기능과 선교기능으로 양립시킬 수 있는 대안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뚫고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기 위해서 무엇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넉넉히 어리석을 만큼 순수하고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우리의 꿈이 이뤄진다는 확신으로 주님께 응원을 청했습니다. 뛰는 가슴을 느꼈습니다.
제2 주제 <가면을 쓴 광대>는 우리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의 삶과 정신을 나름으로 진단하고 자신과 우리를 스스로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화가 지거 쾨터(Sieger Koter) 신부님이 그린 성화를 통해 현대인의 인간상과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거 쾨터 신부님의 작품이 던지는 성사적 메시지를 음미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면과 탈을 쓰고 의뭉스럽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얼굴과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가면현상(假面現象)을 진단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세상에 과연 가면을 벗은 사람이 있을까요? 강의가 끝나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면을 쓴 스스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습니다. 거기서 얻은 대답 중 하나는 ‘우분트(ubuntu)’였습니다. ‘우분투’는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말입니다. ‘우분트’는 남아프리카의 부족, 코사족과 졸루족의 인사말입니다. 흑인인권해방을 위해 27년 동안의 투옥을 거듭하면서 평생을 투쟁하신 넬슨 만델라가 자주 강조해서 널리 알려진 말이기도 합니다.
1등만 대접받고 살아남을 수 있고 잔인한 신자유주의의 경쟁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빗나간 세상에 ‘우분투’는 아프리카의 동심이 외친 양심의 외침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부족의 삶을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한 패의 부족 아이들에게 놀이를 제안했더랍니다. 큰 나무 밑에 딸기를 가득 담은 광주리를 놓아두고 누구든지 가장 먼저 뛰어간 사람에게 모두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모두 ‘우분투’를 외치며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뛰어나가더랍니다.
‘우분트’가 더불어 살자는 동심의 발로였다면 세상의 연대였습니다. ‘우분투’는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라는 연대의식과 시대정신의 발로였습니다. 지난 19세기를 살면서 체게바라에게 인격적인 영향을 미친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Jose Marti)가 외쳤던 메시지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잘 권리가 없다.”는 인문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진한 감동에 겨워 들꽃마을 최영배 신부님의 시, <오, 님이시여>를 다시 외었습니다.
무엇보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삼중의 가난, 즉 예수님의 가난과 성모님의 가난, 그리고 사도들의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은 자발적인 복음적 가난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함께 나아갈 세상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침묵 속에 빛으로 오신 주님과 오롯이 공감하고 소통을 이루며 거룩한 생명의 외침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님이시여,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님이시여,
저희로 하여금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게 하시고
커가기보다 자아지게 하시며
소리내기보다 침묵하게 하시고
화려하기보다 단순하게 하시며
풍요롭기보다 가난하게 하시고
고민하기보다 고통당함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 님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미래의 행복보다 오늘의 어려움을
앞날의 변화를 재촉하기보다
오늘의 불완전을
채워져야 할
빈 가슴을 간직하게 하소서.
님이시여,
저희의 영혼 육신의 온 갖가지
세상 장식을 떼어 주시어
님의 사랑마을 목에 걸고
작은 미소 머금은 채
살아가게 하소서.
첫댓글 소중한 수도원 체험기 잘 읽고 나갑니다.
수도원 생활이 기도와 노동과 공부라니 제게도 참 잘 맞는 학습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 삶이 그렇지 않나요?
<참나리 동시 동화나라>에서 집필하고 강의하며 기도하고 농사 짓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새봄의 절기 우수 경칩 지나 청명 곡우를 맞으면 강화들녘에는 씨뿌리는 계절이 펼쳐지겠군요.
아우구스티노 형제님도 망둥어낚시 잘 하고 계시죠? 안부전해 주십시오.
부산의 양지바른 쪽 가로수 가지에서는 벌써 새움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희망의 계절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부는 인격적인 사람을 기르는 일"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기르는 일 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더욱 작아지고 침묵하며 단순하게 살아 갈 힘을 기도로 청해 봅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저는 평소 하느님께서 저희와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바탕 위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자신을 봉헌하고 싶답니다.
우리는 생각과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와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인격적인 삶이 소중하지 않을까요?
저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야말로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가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묵상합니다. 국장님 잘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저는 감히 가면을 벗은 첫 성인을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누구나 가면을 벗고 발가벗으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성찰과 묵상을 통해 가면을 벗으려고 애씁니다. 그 자체도 가면을 쓴 인간이 아닐까요?
그럴 때마다 저의 기도는 깊어지곤 한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이들에게 비추어지는 모습과 저 혼자일 때의 모습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요?
저 혼자만의 시간에, 공간에도 늘 예수님을 초대하고 만나는 삶을 살고싶습니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우분투'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도 힘차게 살겠습니다.
요즈음은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 떠나 조용한 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감사드려요. ^*^
ubuntu가 던지는 메시지 "I am because you are!"를 다시 생각합니다.
가톨릭이 외치는 다양성의 일치가 우분트정신을 모두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부부에게 한국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서 전 세계를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엘리와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아파트 부근에 새로 문을 연 '전주옥'의 콩나물해장국 간판을 보고
한옥마을의 '백년가'를 떠올렸답니다.
오늘 아침 부산은 봄비가 내릴려는지 잔뜩 흐렸습니다.
다들 보고 싶습니다. 안녕하십시오.^^*
"수도원의 영성 ~"기도,노동,공부"자신을 다 맡기며 내려놓음으로 최선을 다 한 삶을 엿봅니다.
가면을쓰고 산우리의 삶 즉 나의 삶 볼수 있는기회
주심 감사합니다^^^"네가있으니,내가 있다."라는
우분트의 삶~~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나 만이 잘
살면 그만이라는 빗나간 세상에서 우리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은 분명 해집니다.
함께 나아갈 세상을위해 하느님나라의 삼중의 가난
예수님의 가난,성모님의 가난,사도들의 자발적인 복음적 가난을위해 많은 기도해야겠어요~***~
나,우리,신앙인,모두의 삶 되돌이 볼 기회의 강의 고맙습니다. 꽃들과 건강,행복 하셔요~♥~
God with us!!
누군가는 "나를 내려놓아야 상대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독선, 무지와 불통이 하늘 가득히 시야를 가립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우리나라를 두고 금수강산에 하늘이 푸르고 높다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탐욕이 푸른 하늘을 가리고 건너편 능선까지 온통 가려놓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 자신이라도 버리고 비우고 낮추는 삶을 주님께 봉헌해야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신앙의 길이 아닐까요?
기도합니다. 신앙인의 기도가 이뤄지는 삶이 되게 해달라구요.아멘.
부디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