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paris
▲▼ 파리-베르사이유 궁전(LE CHATEAU DE VERSA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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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saille map
궁전과 정원을 아우른 아래 베르사유궁 약도를 보면 길이 680m에 이르는 궁전 건물이 맨 아래 자그맣게 표시돼 있다. 궁전 본관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축을 중심으로 꽃밭, 정원, 분수, 운하가 끝없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게 설계해 태양왕 루이14세를 중심으로 태양신 아폴로의 햇살처럼 무한하게 뻗쳐나가는 절대왕권을 표현하고 있다. 사방팔방으로 빛을 내뿜는 태양은 요즘 말로 루이14세의 엠블렘이었던 셈이다. 워터 파르테르가 있는 평평한 언덕 '테라스'에 서면 누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웅장하면서도 탁 트인 광경에 가슴이 확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천재적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아름다운 정원은 프랑스식 형식주의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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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쿠르광장(Place Bellecour)
파리 서남쪽 23km에 있는 절대주의 왕권의 영화를 상징하는 대궁전이다. '짐은 국가다' 라고 했던 루이 14세가 20년에 걸쳐 세운 궁으로 이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앙트와네트가 호사를 누리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비운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건물의 규모면에서나 절대왕정의 예술품에서나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궁전이라 할 수 있으며 100ha 나 되는 대정원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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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의 정문 골든게이트(versailles-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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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의 정문 골든게이트(versailles-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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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 우측 조각상'Victory of France over Spain'-프랑수아 지라르동(Francois Girardon)작품 
▼ 정문 좌측 조각상'Victory of France over Spain'-프랑수아 지라르동(Francois Girardon)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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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14세의 청동 기마상(Equestrian LouisXIV)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이다. 재상제를 폐지하고 파리고등법원을 격하시켰다. 베르사유궁전을 지어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신교도를 박해하였고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 결핍을 초래하였다.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때는 30년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으므로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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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
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에 죽자,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부의 임시적인 특사의 성격을 띤 앵탕당(지사)의 직무를 확대하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관료의 조직망을 전국에 폈다. 또 파리고등법원의 칙령심사권을 박탈하여 법원을 단순한 최고재판소로 격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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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왕은 흡사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가 되었다. 왕은 마자랭 재상 때의 재무총감을 독직과 관련하여 단죄하고 J.B.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기용한 것이 그의 치정을 빛나게 하였는데,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보호관세에 의한 무역의 균형을 꾀하는 외에 산업을 육성하고 식민지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콜베르 외에도 많은 명장과 현신(賢臣)이 배출되었는데, 왕은 이들의 재능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플랑드르전쟁(1667∼1668) ·네덜란드전쟁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팔츠계승전쟁) ·에스파냐계승전쟁을 강행하였다. 왕은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파리 교외에 지은 베르사유궁전은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왕의 치세 중에 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이 나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웠고, 이때 프랑스어가 우아하게 세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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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고,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 1685년에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으며, 장세니스트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여, 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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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자 빠르뜨망(GRANDS APPARTEMENTS)
이탈리안 바로크 양식으로 금 장식을 한 구리, 청동, 대리석 등 고급스런 재료들을 주로 사용한 루이 14세 스타일의 화려한 건축물로서, 일주일에 세 번씩 사치스런 파티가 열렸던 장소이다. 그랑다빠르뜨망은 뷔페 연회가 열렸던 Salon de l'Abondance와 루이 14세 때에 당구장으로 쓰인 Salon de Diane, 원래는 대기실이었으나 때때로 리셉션 장소로 쓰인 Salon de Mars, 각국의 외교 사절들을 접견하던 Salon d'Spollon, 화려한 천장화가 유명한 Salon de Venus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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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거울의 방 (Galerie des Glaces)
'거울의 방(Palais du Versailles)'은 원래 2층 테라스가 있었던 곳으로 건축가 '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t)'의 설계로 깊이 73m, 넓이 10.5m 높이 12.3m 의 아주 거대한 화랑이 1678년부터 1688년까지 건설되었고 대연회 무도회장으로 사용한 방이며 천정에 걸려있는 샹들리에와 함께 빛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주며 왕정 시 있었던 '가면 무도회'와 중요한 회의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루이 14세 초기 친정 (1661-1678) 17년을 상징하는 17개의 대형거울과 서쪽을 향한 17개의 창문을 통해 바라 볼 수 있는 대 정원, 대 운하는 정원을 향해 열린 바로크양식의 심오한 느낌을 준다. 내부 장식과 천정화는 왕실 최고화가 '샤를르 르브룅( Charles le brun)'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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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은 프랑스의 발전된 제조기술을 과시라도 하듯이 아치형의 대형 거울이 맞은편 유리창과 대칭을 이루며 장엄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다. 베르사이유를 방문한 귀빈이 국왕을 만나러 대접견실로 들어가는 통로 구실을 했던 이 방은 외국 사절 접견이나,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의 결혼식 같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 사용되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그림은 둥근 천장에만 그려져 있다. 르 브룅은 처음에 아폴론이나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릴 생각이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어 루이 14세의 영광에 대해 그리기로 결정했다. 1681년에서 1684년 사이 완성 된 이 천정화에는 루이 14세가 1661년 통치권을 장악한 때부터 그를 명실상부한 전 유럽 최고의 통치자가 되게 한 1678년의 네이메헨 조약에 이르기까지 루이 14세의 모든 업적이 묘사되어있다. 긴 회랑을 따라 그림들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어 그려져 있고, 벽면에 띠 모양으로 돌출 된 코니스에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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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회랑 양옆에 나란히 배치된 2개의 방은 각각 전쟁과 평화에 헌정된 정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이곳의 장식에서도 거울의 방 천장화의 주제가 계속되어 자연스럽게 국왕의 내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적인 의도가 뚜렷한 이러한 내부 장식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이 거울의 방은 장식이 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하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국왕의 업적과 그가 이룩해 놓은 업적들을 이야기하는 의인화된 상징에서, 왕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과 영웅 또는 고대의 위대한 인물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원대한 목적에 맞추어 설계된 길이 73m에 이르는 방을 장식하기 위해 르 브륑은 당시로서는 유행이 지난 공간 분할 방법을 썼다. 그는 또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생각하고 관람자와 천정화간의 각도를 고려하는 당시의 일반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그림은 관람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수직으로 눈을 들어 쳐다봐야 볼 수 있게 마치 천장에 표구된 듯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빛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프랑스 공화국이 성립되는 선언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쟁종결식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서려있는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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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마르텔(Statue de Charles Martell)
카를 마르텔 또는 샤를 마르텔 (프랑스어: Charles Martell, : 680~741년)은 프랑크 왕국의 동쪽 지방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했다.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이다. 사라센의 침략을 격퇴하여 신망을 얻었으며, 로마 교회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이 컸던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의 왕위를 승인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석권한 뒤, 737년부터는 공석이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은 카를로만 1세와 피핀 3세가 나누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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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ia Libertad - Nuestro Juramento
01. Himno Al Amor(if you love me)
02. Concierto Para Una Voz 03. Tu Me Acostumbraste 04. Nuestro Juramento 05. Palabras Para Julia 06. Popurri De Los Panch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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