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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8.21.월. 장로교 통합 <총회부흥단> 상임부단장 배동호 목사 설교 (수정본, 8P)
♥ 오늘날 성도들은 ‘거듭남’은 관심이 있는데, ‘성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장시간이 요구되는 聖化(성화)!
성화의 완성은 榮華(영화)이다.
♥ 벧후1장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 김제 용화마을의 한 부자 집이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에게서 전도 받고서 예수를 믿었다. 문화제인 김제 금산교회가 그래서 탄생되었다.
1905년 39세 조덕삼이 아들, 이자익 등 머슴들을 데리고 교회 다녔다.
조덕삼, 이자익이 장로 후보에 올랐는데, 교인들이 대부분이 그의 소작농들이었다. 그런데 조덕삼 집사는 이자익 조사에게 져서,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이 교회를 짓고 그렇게 헌신했는데...
조덕삼 집사는 머슴 이자익을 잘 모시고 교회를 잘 섬기고, 이자익 장로를 신학교 공부를 시키고, 금산교회 목사로 모시고, 섬겼다.
훗날 이자익 목사의 아들이 조덕삼 장로의 손자인 국회의원 4선 조세형 장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참으로 聖化(성화)의 귀감이다.
♥ 루이스 테이트 Lewis Boyd Tate, 최의덕 선교사
• 1862년 9월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주(Missouri) 주 캘러웨이 카운티(Calloway County)의 옥스배스(Auxvasse) 근처에서 출생
• 1889년 매코믹 신학교 입학 – 1892년 졸업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 시작
• 1894년 3월, 전주로 이동하여 선교지부를 건설하며 본격적인 선교를 행함
• 1925년 안식년을 떠나 은퇴를 하기 전까지 전주 선교지부를 기반으로 일하며 순회 전도를 함
• 1929년 2월, 키웨스트(Key West)의 먼 바다로 항해 중, 배 위에서 심장마비로 소천
♥ Lewis B. Tate "The Pioneer"
선교사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는 한국 선교를 시작한 미국 남장로교의 “7인의 개척자(the pioneer band of Seven)”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7인의 개척자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한국 선교를 지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개척자(the Pioneer)”였다. 루이스 테이트는 1892년 11월에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한 후 1925년 건강 악화로 은퇴하고미국으로 돌아 갈 때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남장로교 선교를 개척하고 교회를 건설했다.테이트는 전라북도 지역을 대표하는 선교사로서 순회 전도자, 목사, 건축가, 교회 행정가로 일하며 남장로교 선교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호남지역 최초의 선교지였던 전주 선교지부(station)를 개척하여 호남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건설한 일,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북도 일대의 미개척지에 대한 순회전도를 통해 75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천 명에 가까운 교인들에게 세례를 준 일, 호남지역 전체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서문교회를 설립하고 오랫동안 담임목사로 사역한 일, 그리고 교회법 전문가로서 한국의 장로교 교단조직을 만들 때 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일 등은 그의 활동 가운데서도 특별히 기록할 만하다. 그런데 테이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개척 전도자였다. 따라서 이 글은 그가 전주 선교지부를 개척하고 순회전도를 통해 많은 교회를 건설한 일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루이스 테이트 곁에는 그와 함께 개척 선교사로 내한했던 여동생 매티(Mattie S. Tate)와 의료 선교사였던 부인 마르타(Martha B. Ingold Tate)가 항상 함께 있었다. 매티 테이트는 루이스 테이트와 같이 개척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지부를 개척했다. 그는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고된 순회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마르타 잉골드 테이트는 전주지역 최초의 서양 의사로서 처음에는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루이스 테이트와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도와 전도와 목회 및 교육에 전념했다.
Lewis B. Tate was one of the “Pioneer band of Seven” who founded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 or 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 He was “the” pioneer as he was the first among the Southern Presbyterians to apply for a missionary position in Korea. Lewis Tate reached Korea in November, 1892 with his colleagues and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in 1925 after his health failure. During that period of time, he pioneered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Jeonju region and established many churches there.As a representative missionary of the Jeonbuk region, Lewis Tate was a itinerant evangelist, pastor, architect, and church administrator, and contributed greatly to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As a pioneer missionary, he founded the Jeonju Station, the first station of the Southern Presbyterians” Korea Mission, and developed it into the center for their mission in Korea. As an itinerant evangelist, he founded 75 churches and baptized about 1,000 people. As a pastor, he established the West Gate Church in Jeonju, the mother church of the region, and ministered to it for many years.Besides, Lewis Tate, with his expertise of ecclesiastical laws, helped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to establish laws and regulations when it was first organized. Nevertheless, he was first and foremost an evangelist. Therefore, this article placed an emphasis on his pioneering works to establish the Jeonju Station and to build many churches through his itineration.Two persons who had always been with Lewis Tate were his sister Mattie and his wife Martha Ingold. Mattie Tate came to Korea with Lewis as one of the pioneer missionaries from 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 As a single-woman missionary, she chose to live a challenging life of an itinerant evangelist doing pioneering works for women and children in the Jeonju region. Martha Ingold Tate was the first medical missionary in the Jeonju Station, and worked as such. However, she quit full-time medical work and helped Lewis Tate by doing evangelistic, pastoral, and educational activities.
♥ 김제 금산교회(金山敎會)
북위 35° 43′ 10″동경 127° 02′ 07″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금산교회(金山敎會)은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1908년 전주선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두동교회와 더불어서 한국교회의 초기시대의 예배방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 김제금산교회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의 훈훈한 이야기
(“ㄱ”역자 모양의 금산교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금산교회가 있다. 당시 그 지역의 일대 부호였던 조덕삼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경상도에서 온 이자익이라는 청년을 자기 집의 마부와 머슴으로 사랑채에 두고, 미국 남장로교 Lews Boyd Tate 선교사(한국명:최의덕)로부터 복음을 받아 금산교회를 개척하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교회를 지었다.(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 이자익이라는 사람은 글을 몰라 지주 조덕삼 씨의 아들한테 글을 배우고, 어느 덧 자기 집 주인 조덕삼씨와 같이 세례를 받고, 지주 조덕삼 장로와 머슴 이자익 목사의 흐뭇하며, 감동을 주는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용화 마을은 전주로 가는 길목과 금산사로 가는 길목으로 정읍과 김제 읍으로도 가는 교통 요지였다. 이 용화마을에 지주 조덕삼(故 조세형 국회의원 할아버지)은 馬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마방은 말을 타고 다니던 손님들이 말을 메어 놓고 자고 가는 한 마디로 말 여관이었다.
이자익은 경상도 남해도 출신으로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적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육지로 나갈 것을 결심한 그가 하루는 육지 하동으로 가는 배에 올라 타 선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를 하고 선장의 호의로 하동까지 갔다. 하지만 하동에 도착했어도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시 전라도 남원읍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주로 해서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금산사로 유명한 절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제일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인들이 조덕삼에게 알리자, 조덕삼은 그 소년을 사랑방으로 인도하였다. 이자익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했고, 그 자리에서 그의 딱한 모습을 본 조덕삼은 당장 일감을 그에게 주었는데, 바로 마부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이자익은 열심히 일했다.
과거에는 “두정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세워진 동기가 아주 은혜로웠다.
당시 금산에는“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분은 전주지방에서도 큰 소리를 칠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양반과 천민의 구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분명할 때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전주 선교부를 오가면서 성경을 배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드리며 신앙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은 금산교회에서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테이트(한국명:최의덕)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다. 최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에게 영수(지금의 전임 전도사 역활과 비슷함)로 임명하였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주인이며 부자인 조덕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 질투하지 않았다. 점점 교인이 늘어 나고 이 두 사람도 학습, 세례를 다 받고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게 되자 교회의 일군인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금산교회 내부 모습)
교인들이 모여 1908년 장로를 선출하게 됐다. 주인 “조덕삼”과 주인집의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다. 대부분 교인들은 조덕삼 지주가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 때 조덕삼은 최의덕(테이트)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고 앞자리로 나갔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의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선출해 준 일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자요 주인인 조덕삼이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집의 마부요 머슴인 이자익을 그 교회에 첫 번째 장로로 선택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이자익이 자신의 머슴이며 마부지만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선택이 된 날부터 조덕삼은 이자익을 얼마나 겸손히 받들어 섬기는지... 너무나 잘 섬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자집의 머슴이며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금산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 이 때 조덕삼은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여기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와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 때 조덕삼은 대지만 내어 놓은 것이 아니라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제각을 매입하기도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남녀가 따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교회당을 기역자(ㄱ)로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회당이 완성되자 1908년 당회장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 하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그 다음 주일부터 여성들을 위해 따로 좌석이 마련되어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여성도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남녀를 구별하는 장소에 커튼을 걸쳐 놓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볼 수 없도록 했다. 목사가 설교하는 강대상 쪽에도 역시 목사가 여자들을 볼 수 없도록 커튼을 쳤다.
이러한 소문이 금산리 마을 뿐만 아니라 원평까지 전해지자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교인이 증가하자 테이트 당회장의 사회로 장로를 다시 선출하게 되었다. 이 때 지난번에 낙선되었던, 지주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금산교회는 말할 것 없이 금산리에 사는 주민 모두 좋아했고, 교회는 더욱 부흥돼 갔다.
선교사가 없을 때부터 설교한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조덕삼 장로는 은혜를 받고 그를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전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지원하기로 하였다. 금산교회는 또 한 번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금산교회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자, 최대진 목사를 초대 목사로 초빙하였다. 그 후 191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임실에서 목회하던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제2대 목사로 청빙을 한다. 이렇게 해서 머슴으로 금산에 왔던 이자익이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이자익 목사) (조덕삼 장로)
1924년 9월 13~18일까지 함경도 함흥 신창교회에서 13회 총회가 열렸는데, 총대는 117명이었다. 투표 결과 43세의 젊은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자, 총대원들 모두가 놀랐다. 한국 교회사에서 새벽기도회를 처음 실시했던 길선주 목사도 부총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낙마하였는데, 연소한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이 되다니 놀랄 수 밖에.... 그 뿐 아니라 이자익 목사는 분규가 나는 교회마다 해결사 목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후 그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보고, 아예 총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기에 해방 후 1947년 33차 총회를 소집하고 총회장을 선출할 때 신선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켜오면서 다른 주의 종들은 창씨 개명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했던, 그를 두 번째 총회장으로 선출했고,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판학이 문제를 일으켜 51명 재학생들의 진로를 원활하게 수습할 분은 이자익 목사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34차 총회장으로도 다시 선출되어 장로교회 총회 역사상 재선하는 총회장도 없었는데, 3선[13회,(1924) 33회,(1947) 34회(1948)]은 초유의 일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쳤는데, 배우는 학생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 있었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충남고등성경학교를 발족시켜 이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으로 신학생들에게도 잘 가르쳤던 것이다.
조덕삼 장로의 후손은 조덕삼은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고, 그 아들 조영호도 금산교회 장로가 되고, 손자 조세형도 장로가 되었다. 故 조세형 장로는 국회의원으로 3선 국회의원과 몇 해 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토록 아름다운 기록을 남긴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조덕삼 장로는 임종 때에 이자익 목사를 부르고 자식들에게 금산교회와 이자익 목사님을 대대로 잘 섬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그 때 이자익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6살에 고아가 된 떠돌이를 받아 주어 예수 믿게 하고 장로로 세워 신학 공부시켜 목사 되게 하신 장로님, 내가 이런 장로님을 다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장로님 내 생명이신 장로님!”하는 눈물의 기도는 한국교회를 울렸다.
금산교회 설립자 두 분의 후손 소개
조덕삼(1867-1919)-
아들: 조영호 장로(독립운동가)
손자: 조세형 장로(전 국회의원)
증손: 조성훈 집사(무학교회)
이자익(1882-1961)
1924,1947,1948년(장로교 교단분열 혼란기)
3차례 총회장 역임.
거창지역, 전북, 충청 지역에 많은 교회 개척
대전 신학 설립함.
아들: 이성환 장로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 제일교회, 연변과기대 교수)
손자: 이규석 목사